희생제의의 관점에서 본 미술품 경매

Art Auction from the Perspective of Sacrifice Rit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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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이 글의 목적은 박수근의 작품을 중심으로 미술품 경매의 사회적 의미와 기능을 고찰하고, 경매를 ʻ희생제의ʼ의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서민적 삶의 소박함이라는 집합표상의 생산과 보존에 미술품 경매장이 맡고 있는 역할을 논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이 글은 미술품 경매장을 경제적 의미의 시장이 아닌 주술-종교적 의례의 연극무대로 간주함으로써, 낙찰가를 성립시키는 마법적인 설득력과 연극무대의 독특한 분위기 그리고 경매장 관객들의 융합된 감정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둘째, 박수근 작품의 경매 낙찰가의 정당성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사이의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펼쳐지는가를 검토한다. 셋째, 미술품 경매장의 의례적 속성을 마르셀모스의 ʻ희생제의ʼ의 용법으로 다시 정식화하고 어떻게 소박하고 선한 가치가 집합표상의 틀 속으로 진입하여 일반 대중을 향해 안정하게 확산되는가를 살펴본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미술품 경매장이 박수근의 소박한 그림과 성품을 금전으로 표상함으로써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어떤 긍정적인 기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aims to reveal the social meanings and functions of art auction through exploring the paintings of Park Soo Keun, and especially analyses the role that the art auction plays in producing and preserving the collective mind represented as the naivety and simplicity of common people’s lives. For this aim, first of all, we define the art auction house not as a economic market but as a theater on which magical-religious rituals are performed in order to analyze sociologically the magical persuasive power to determine a winning bid, the unique atmosphere of the theater and the fused emotions of the auction audiences. Secondly, we explore the conflicts among various interpretations on the legitimacy of the winning bids of Park Soo Keun’s paintings. Thirdly, we reformulate art auction as the ritual of ‘sacrifice’ explored by Marcel Mauss, and examine how the value of goodness and simplicity constitutes into the frame of collective representation and then diffuses stably into the general public’s minds. Our reformulation of art auction as sacrifice ritual is finally expected to point out an unexpected positive function that art auction implicitly plays by representing monetarily the paintings of Park Soo Keun and his characteristics.

  • KEYWORD

    박수근 , 미술품 경매 , 희생제의 , 마르셀 모스 , 집합표상

  • Ⅰ. 들어가며

    오늘날 미술품 경매시장만큼 철저하게 예술의 가치를 심문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얽혀 들어간 미술 작품들은 예외 없이 시장의 제단 위에 바쳐진 후, 각각의 환금성(換金性) 여부를 잔혹하게 시험받는다. 구매 요구가 쇄도하는 작품들은 가격이 치솟고 거침없는 투기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반면 “화폐화될 수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된다”. 그렇기에 미술품 경매장은 “가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아우슈비츠의 재현”(심상용, 2010: 156)으로 비춰진다. 경매시장의 ‘타자’로 남는 작품들은, 그 미적 성취와는 무관하게, 그저 공허하고 무력한 폐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예술이 화폐가 제공하는 환경에 세 들어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Menen, 2004). 그런데 경매시장에 오른 미술 작품은 화폐의 후원이 아닌 화폐의 폭정과 마주치게 된다. 수익성의 논리는 작품에 보란 듯이 개입하고, 예술적 가치의 시효는 전적으로 돈의 향방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다. 그 결과, 작품 시세의 폭등과 폭락을 좌우하는 시장의 ‘불안정성’에 따라 예술적 가치 역시 ‘변덕스러운’ 것으로 강등되고 만다. 특히 이 ‘변덕’이라는 관념은 돈뭉치 앞에서 요동칠 수밖에 없는 예술적 가치의 경박함을 강하게 암시한다. 시장의 그래프가 불안하기에 예술의 본질적 가치 역시 응당 불확실하고 우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경매시장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따라, 한 작품이 미적 위계에서 차지하는 순위도 등락을 거듭하는 일이 잦아진다.

    돈이 예술의 동기이자 결말이라는 생각은 현대미술의 경향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익히 잘 알려진 앤디 워홀(Andy Warhol),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제프 쿤스(Jeff Koons),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사례(Dossi, 2007; 조진근, 2009)는 말할 것도 없고, 금전과 예술의 완전한 결별을 주창했던 20세기 후반의 개념미술 조차 비슷한 행로를 밟았다(진휘연, 2004). 적지 않은 국내 신진 화가들의 미적 감수성과 창작 경향 역시 이러한 방향에 수렴하고 있다. 오늘날 “다수의 작가들은 치열한 이윤추구와 경쟁의 논리를 따라 자신의 작품을 그럴싸하게 설명하고, 자신을 프로모션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신중하게 학습한다. 이들의 작가적 예민함은 시장의 취향에 부합하도록 스스로를 조정하는 일에 투여된다”(심상용, 2010: 62). 이러한 추세를 단단하게 만드는 데는 비평가 집단, 화랑, 아트 페어, 유명 갤러리, 힘 있는 컬렉터 등 미술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동원된다(Tompson, 2010; 강수미, 2012; 한여훈, 2012; Polsky, 2012). 미술품의 가치가 거래량과 거래 가격으로 판가름 되는 현실에서, 경매시장은 가장 확실하게 예술을 자멸의 길로 이끄는 음험한 장소로 나타난다. 경매시장에서 미술 작품이 맞닥뜨려야 할 유일한 현실은 예술이 있어야 할 본래 자리의 상실, 예술이 예술임을 식별하게 해주는 기준들의 소멸로 드러난다. 그곳에서 미적 지평은 위축되고 창작 정신은 동파한다.

    그러나 경매 시스템의 폭력적인 논리만으로 그 사회적 의미와 기능을 손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미술품 경매시장은 미적가치에 암운을 드리우고 그 진지함을 훼손시키는 폭력의 공간이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바로 그 폭력성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가치를 양육하고 보존하는 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 글은 미술품 경매시장이 일으키는 가치의 생산과 보존의 측면을 박수근의 작품들에 새겨진 낙찰가의 의미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왜 박수근인가?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생애가 미술시장의 여느 블루칩 계열의 화가들과는 달리 애처로운 인간사(人間事)를 함축한 신화적 모멘트를 지녔다는 점이다. 이 신화적 모멘트에 의해, 처음에는 미지의 대상이었던 박수근의 소박한 삶이 ‘기정사실’로 자리매김하고, 이렇게 확고해진 소박함은 다시 위대한 인간 드라마의 플롯으로 전개된다. 그의 그림들이 전시되고 팔려나갈 때마다 이 플롯은 더욱 공고해지고 폭넓은 대중들에게 각인된다(강정화, 2012: 22-27). 그의 작품에 순차적으로 매겨진 경매가는 이 신화를 더욱 확고부동하게 해주는 상징적 보증으로 작용한다.

    이렇듯 경매 시스템은 미적가치를 질식시키는 하나의 ‘악(惡)’이 될 수 있지만, 적어도 박수근의 사례에서는 한 인간의 소박한 생애로 재현되는 ‘선(善)’을 구축하는 장치로도 작용한다. 어떻게 화폐의 권력이 득세하는 경매 시스템이 소박하고 선량한 가치의 생산에 기여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선/악의 의미구조에 관한 물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내용물로 갖는 성/속의 형식적 대립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악함은 그 대립항인 선함을 끌어들여 성/속의 의미와 경계에 관한 절박한 요구를 계속 유지 시킨다. 악은 선의 출현과 진행에 버팀목 역할을 하면서, “악함에 대한 비난, 사악한 의도에 대한 고백, 집단의 처벌과 정화 의식을 유발한다”(Alexander, 2007: 256). 미 술품 경매장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박수근의 작품들에 돈을 끌어들임으로써, 도를 넘어선 어떤 비상식적인 사태에 대한 각성, 화폐로 대체될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추모와 애도, 그리고 돈에 물든 세속에 대한 집단적 반성의 계기를 쇄신하고 추동한다. 경매 시스템은 박수근의 그림에 고가의 낙찰가를 새겨 넣었지만, 신비하게도 돈과는 거리가 먼 ‘서민적 삶의 소박함’이라는 선한 가치를 증대시킨다. 이렇게 상식 밖의 돈뭉치들로 인해 박수근의 삶의 가치는 우리의 상식적 세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게 된다. 소박함의 가치가 그 부정항인 고가의 돈을 매개로 출현하는 과정, 바로 그것이 박수근 작품의 경매 낙찰가가 궁극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돈과 예술 그리고 서민적 소박함, 이 세 가지 가치가 박수근의 사례 속에서 빚어내는 ‘뜻하지 않은’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논의 절차를 거치기로 한다.

    첫째, 미술품 경매장을 경제적 의미의 시장이 아닌 주술-종교적 의례의 연극무대로 간주함으로써, 낙찰가를 성립시키는 마법적인 설득력과 연극무대의 독특한 분위기 그리고 경매장 관객들의 융합된 감정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 무대에서 튀어나오는 박수근 작품의 낙찰가는 그저 그림 구매에 들어간 비용 정도로만 그 의미를 끝맺지 않는다. 그것은 한 장의 그림을 일순간 황금덩어리로 만드는 경매장 고유의 밀교적 특성과 그 내부의 관객을 사로잡는 집단적 환몽의 효과를 낱낱이 보여준다.

    둘째, 박수근 작품의 그림 값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사이의 갈등의 스펙트럼이 어떤 방식으로 펼쳐지는가를 고찰한다. 미술품 경매장의 은밀하고 밀폐된 속성 때문에 그 외부의 관찰자는 경매 행위의 정당성에 관한 상이한 감정을 품고 좋은 것과 나쁜 것, 정의로운 것과 부정한 것,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배타적인 원리를 수사학적으로 양식화하는 다양한 논쟁을 양산한다. 이 논쟁의 핵심은 경매라는 사건의 수용(불)가능성을 판별하는 가치들 사이의 대립에 놓여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 글은 박수근 작품의 그림 값을 둘러싼 상이한 해석이 ‘상식의 경제’와 ‘거품 경제’의 대립에서 출발해 예술에 대한 ‘금전적 보상’의 테마를 거쳐 ‘애도’와 ‘속죄’의 차원으로 이르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셋째, 미술품 경매장의 의례적 속성을 ‘희생제의’의 용법으로 다시 정식화하고, 이러한 희생제의의 숨겨진 기축이 경매장 바깥인 전체 사회 속에서 포착될 수 있음을 논한다. 사실 낙찰가의 사회학적 의미를 보다 온전히 복원하기 위해서는, 돈, 예술, 도덕과 연루된 가치들이 벌이는 다툼의 ‘외부’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바로 이 외부에서 바라봤을 때, 미술품 경매장은 가치들의 힘겨루기가 일어나는 전쟁터가 아니라 박수근 작품의 피난처와 안식처를 결정짓는 장소로 인식될 수 있다. 일단 경매장 안쪽에서 그림의 보관인이 정해지고 나면, 경매장 바깥에서는 소박하고 선한 가치의 집합표상이 일반 대중을 향해 안정하게 확산된다. 이렇듯 희생제의의 공간을 경매장 외부로까지 확대하게 되면, 박수근 작품의 경매와 연관된 여러 담론들의 논쟁에 침묵하고 있는 일반 대중이 사실상 희생제의 과정을 주도하는 진정한 의뢰인(sacrificiant)이라는 점이 드러날 수 있다.

    미술품 경매시장 고유의 희생제의의 배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삶의 특수한 의례 양식이 버티고 있다. 이러한 의례 양식의 주관 아래, 미술품 경매장은 박수근의 삶과 작품을 돈에 얼룩지게 만들면서 돈에 침식되지 않는 소박한 서민적 가치를 확산시킨다. 결국 박수근 작품의 낙찰가가 지닌 최종 의미는 돈과 예술 어느쪽으로도 포섭할 수 없는 소박한 서민적 가치의 사회적 동인(動因)의 맥락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술품 경매장이 소박함으로 충전된 우리의 집단 기억을 구축하고 재생시키는 과정에서 맡는 역할, 다시 말해 박수근의 금전적 표상이라는 ‘악’에 내재된 긍정적인 기능을 살펴봐야 한다.

    Ⅱ. 밀교 집회로서 미술품 경매장

    2007년 5월 22일, 서울옥션의 경매 품목으로 등장한 박수근의 「빨래터」가 출발점이자 경쟁작으로 삼아야만 했던 것은 공교롭게도 그의 또 다른 작품이었다. 기존 경매 최고가는 같은 해 3월 그의 61년 작(作) 「시장의 사람들」이 K 옥션에서 세운 25억 원, 이날 「빨래터」는 「시장의 사람들」이 세운 이 기록을 갈아치웠다. 물론 「빨래터」가 「시장의 사람들」보다 비싼 가격에 팔렸다고 해서, 「빨래터」의 미적가치가 그만큼 더 고양된 것은 아니다. 사실 3분 30초 만에 실현된 것은 미적가치의 상승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의 급작스러운 성화(聖化)이다.

    미술품 경매장은 예술과 돈의 “가치들이 서로 교환되는 도가니”(Baudrillard, 1972:127)이자, 작품의 성스러운 주조(鑄造) 과정을 효과적으로 연출하는 연극무대로 간주할 수 있다(Smith, 1989; Herrero, 2010). 경매장의 관객들은 발단, 절정, 대단원의 막이 순차적으로 강화하는 성화 과정에 이끌리고 사로잡힌다. 그들은 “같은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고, 서로 상대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지 인식하고 서로의 감정에 휩쓸리는”(Collins, 2009: 160) 정서적 전염을 체험하면서, 한 폭의 그림을 일상적 실재로부터 떼어놓는 절대적인 격리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보게 된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경매장이 단 하나의 창문도 없이 외부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세계로 제시된다는 사실이다(Smith, 1989: 112). 하나의 닫힌 세계로서 철저히 가공(架空)되지 않는다면, 미술품 경매장은 생선 공판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매장의 입구에는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경매 품목들이 Lot 번호와 하한가를 단채 도록으로 전시되고 있으며, 안쪽 벽에는 이곳을 통해 걸작으로 뒤바뀐 많은 그림들이 경매장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경매사의 “어휘 선택과 말씨는 완벽하고 제스처는 절제”(Thornton, 2011: 28)되어 있는데, 그는 경매보조사와 함께 높이 설치된 연단 위에 올라가 진지하고 초연한 태도로 입찰자들의 의사를 민첩하게 읽어낸다. 그의 말과 제스처는 온통 작품의 구매 흡입력을 드높이는 데 바쳐져 있다. 경매장의 뒤편에는 입찰자와 관람객을 분리하는 붉은 색 차단선이 배치되어 있고, “배심원석처럼 난간을 친 곳”(Thornton, 2011: 48)에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부지런히 전화 입찰에 응하고 있다.1) 작품들은 차례차례 앞으로 불려 나와 스크린에 전시된 채 자신에게 유리한 가격 판결을 기다린다.

    정교한 외관, 매너, 무대장치 그리고 의식 절차로 이루어진 이 모든 광경의 핵심에는 응찰용 팻말을 든 입찰자들의 투기적인 경쟁 게임이 있다. 경매 입찰자들은 경제적 사고의 의지를 포기한 비(非)공리주의자처럼 보인다. 작품을 고가(高價)의 돈을 들여 매입하는 행위 안에는 화폐를 ‘반(反)경제적인’ 방식으로 일순간 탕진하겠다는 대담함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가 상승의 장애물을 뛰어넘는 내기 돈들이 불확실한 결말을 향해 쏟아질 때마다 관객들은 온 정신을 집중하고 긴장한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카드가 나올 것인가. 마침내 입찰자들이 감추고 있던 자기 패가 모두 공개되고 결말이 확정되면 게임은 끝난다. 참여자들을 일순간 열광하게 만드는 이 연극무대는 특별한 주술-종교적인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다. 바로 이 에너지에 힘입어 그들 사이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다.

    미술품 경매장은 여러 면에서 밀교적(密敎的) 성격의 종교집회를 연상시킨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낙찰의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경매사의 화술은 일종의 주법(呪法)에 가깝다. 그는 사람들을 비일상적인 꿈의 세계로 데려가고(“33억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집단적 열광의 클라이맥스 바로 앞까지 몇 차례 초대했다가 (“더 없으십니까?”) 마침내 누가 가장 운이 좋은 자인가를 알려준다(“낙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주법(呪法)을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은 행운의 주인공을 질투하거나 선망하지 않는다. 누가 그림을 가졌는가보다는 결말에 이르는 진지하고 엄숙한 모든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한 장의 그림이 얼마만큼의 돈을 강탈할 수 있는가를 결정짓는 승부, 그 넘치는 화폐량이 제공하는 자극적인 분위기 하나하나가 그들을 미술품 경매장으로 이끄는 주된 동기로 작용한다.

    이곳에서 고양되는 특별한 열기를 고려해 봤을 때, 「빨래터」에 새겨진 엄청난 금액을 일확천금의 시세가치를 겨냥한 투자액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그것은 경제 영역 저편에서 움트는 또 다른 가치를 표상한다. 45억의 화폐량은 박수근이라는 이름 밑에 수북이 쌓이는 상징적 봉헌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봉헌물이 눈덩이처럼 불어 날수록, 박수근의 화명(畵名)은 그의 그림들에 중대한 주술적인 전염 효과를 일으킨다. 박수근은 금과 같은 존재이기에 그의 서명이 들어간 그림들은 모두 희소한 귀중품으로 ‘분류’된다. 2000년대 이후 박수근의 그림들에 매겨진 경매가의 비정상적인 폭등을 상기해보자. 2001년 9월 「앉아 있는 여인」이 4억 6천만 원(서울옥션)에 거래된 이래, 2005년 11월 「나무와 사람들」이 7억 1천만 원(K옥션), 2006년 2월 「시장의 여인들」은 9억 1천만 원(서울옥션), 2006년 12월 「노상」은 10억 4천만 원(K옥션), 2007년 3월 「휴식」은 10억 5천만 원(K옥션)의 낙찰가를 기록했다.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농악」의 낙찰가는 단번에 20억 원까지 치솟았다.2) 이로써 박수근의 작품은 상식적인 경제 질서에서 완전히 해방된 세계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경매가의 급등은 박수근의 작품들에 새겨진 미적 탁월성과는 무관하다. 그의 그림들은 오로지 박수근이라는 이름의 유명세에 의존하면서 경매 낙찰가의 부풀어 오르는 증식과 거침없는 전이 논리를 따랐다. 그 와중에 박수근이 - 아직 ‘박수근’이 아니었을 때 - 국산 화장품 홍보 잡지 『장업계(粧業界)』에 그렸던 보잘 것 없는 삽화들까지도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3)

    이런 관점에서 박수근이라는 이름은 풍요로 팽창된 힘의 관념인 마나(mana)와 일맥상통한다. 박수근의 서명은 단지 그림의 주인만을 가리키는 상징이 아니라, 그의 모든 그림들을 “상징적으로 일치”(Mauss and Hubert, 1999: 71)시켜 하나의 원리 아래 ‘분류’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 힘은 경매 과정의 정교한 의례와 공명하면서, 박수근의 이름이 새겨진 모든 대상을 온갖 위해와 침범으로부터 지켜내고 그 밖의 다른 대상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이렇게 해서 그의 그림들은 하나의 특별한 종(種)으로 전환한다.

    그런데 경매장에서 일어나는 작품의 마법적인 성화는 그 필연적인 상관항으로 화폐가치와 미적가치 각각의 희생을 요구한다. 이 희생에 힘입어 그림은 돈과 예술의 고유한 지대에서 벗어나 집단적인 몰두와 탐닉의 대상으로 뒤바뀐다. 박수근의 작품이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다투는 현기증 나는 투기 경쟁에서, 한 작품이 승리를 거둘 때마다 화폐의 일상적 가치는 점점 더 무력해진다.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서, 45억 2000만원의 화폐 가치는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추락했고 「빨래터」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끌어올려졌다. 그림 한 점을 엄청난 화폐량과 맞바꾸는 것은 분명 (경제 논리쪽에서 보면) 폭력적인 결론이다. 그것은 45억에 해당하는 일상의 품목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광경을 연출한다. 별 쓸모없는 그림 한 점을 손에 넣기 위해 저 많은 돈을 포기해야한단 말인가. 그것은 어떤 하찮은 물리적 실체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온 경제적 기반이 순식간에 붕괴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두려움이 박수갈채로 끝맺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탄성’이 아니라 ‘탄식’을 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경제적 허탈감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또 다른 탄식이 튀어나올 수 있다. 그 비통함은 「빨래터」의 철저한 금전적 환원에 따른 미적 가치의 위태로움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엄청난 화폐량이 쏟아 부어졌다고 해도, 돈과 교환된 작품은 결국 그 미적 가치의 바닥만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경매가는 작품의 구매 욕구만을 증언한다. 그렇기에 예술 작품은 화폐와 맞바꿔지는 순간 참혹한 미적 빈곤에 시달리게 된다. 미술품 경매장은 이 참혹함을 특정 계층의 광기어린 투기 경쟁을 통해 연출하는데, 여기서는 작품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 아니라 급박한 소유욕만이 전면화된다. 사실 경매장의 고객은 작품의 미적 탁월성을 숙고할 여유도 그럴 의사도 없다. 그는 자신의 은행 잔고만을 생각하면서 구매 의사를 즉각 결정해야만 한다.

    이처럼 미술품 경매는 화폐가치의 무상(無相)함과 미적가치의 빈곤을 극적으로 연출하면서 작품을 신성한 사물로 격상시킨다. 한 편에서는 아무런 유용성도 없는 작품을 손에 넣기 위해 어마어마한 금액의 세속적 가치가 포기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화폐의 권능 앞에서 작품의 미적가치가 무력하게 산산조각 나고 만다. 이처럼 작품의 낙찰가는 미적가치에 대한 조예와 안목은 물론 사회에서 유통되는 상식화된 금전 가치를 괄호로 묶으며 등장한다. 한 폭의 그림이 뛰어난 걸작으로 바뀌었음을 승인하는 미술품 경매장은 일상의 시공간에서 탈각되어, 금전과 예술에 대한 어떠한 문제제기도 허용하지 않는, 그 자체 ‘괄호 친 경험’이 이루어지는 특수한 현상학적 체험의 장이다(Alexander, 2007: 340). 그러므로 경매장 안쪽에서 낙찰가의 진실성에 대한 판단은 늘 유보되기 마련이다.

    반면 미술품 경매장의 ‘바깥’은 이러한 현상학적 체험에 대한 혐오와 의심이 증폭하는 세계이다. 이 외부 세계는 작품의 성화를 가져온 정서적 에너지가 소멸하고 고조된 열기가 급속히 냉각되는 곳이다. 화폐가치와 미적가치를 가두었던 괄호가 열리고, 이제 사람들은 작품의 성화를 가져온 마법적 환경과 그 산출물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작품의 성화가 임의적인 가격 판정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미술품 경매란 관객들의 정서적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간교한 술수이자, 더 나아가 작가의 영혼까지도 상업화하려는 비열한 기획으로 비춰진다. 예술작품이 손익계산을 따지는 세계에 들어섰다는 것 못지않게, 그렇게 많은 돈이 그림 구매에 탕진됐다는 점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또한 박수근의 부재 속에서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그림 값 판정은 불법 행위이자 명백한 사기 행각으로도 인식된다. 그것은 마치 값비싼 광물을 찾기 위해 주인의 허락도 없이 이곳저곳을 함부로 시굴하는 절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고가의 돈을 놓고 벌이는 경매 행위는 이미 세상을 떠난 박수근의 소박한 삶에 대한 모욕으로도 여겨진다.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들은 경매 낙찰가의 ‘적정성’과 ‘공정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Heinich, 2006: 198). 그것은 구체적으로 비상식적인 낙찰가가 작품의 적정가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낙찰 행위 자체가 과연 공정한 것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함축한다. 이 질문은 작품의 성화를 창조하는 경매 의례의 정당성을 비롯해 작품의 금전적 성화, 그리고 그렇게 성화된 작품의 사적 소유가 떠안고 있는 도덕성의 문제까지도 동시에 건드리고 있다.

    1미술품 경매장의 밀폐된 구조, 경매사와 경매보조사의 외관, 전화응찰을 비롯한 경매 현장 전체 분위기에 관해서는 K옥션과 서울옥션의 경매 갤러리를 참조할 수 있다(http://www.k-auction.com/Company/CompanyInfo.aspx; http://www.newsis.com/gallery/view.htm?cID=1&pID=1&page=1&s_skin=&s_date=&e_date=&s_k=&pict_id=NISI20140725_0009959207)  2박수근 작품의 호수와 재료에 따른 가격 상승 현황은 이호숙(2008: 68-78)을 참조할 수 있다.  3유홍준은 『장업계』의 삽화만큼이나 박수근의 삶이 주변적인 위치로 밀려나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그 삽화들의 예술적 가치를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박수근의 대상 파악 능력과 조형적 재창조력은 여기에서 확연히 엿볼 수 있다고 하겠는데 우리는 박수근의 회화작품들이 나목, 아낙네 등 한정된 소재만 보여주는 아쉬움을 이 삽화를 통해 달랠 수 있다”(유홍준. 2003: 155).

    Ⅲ. 박수근의 그림 값에 대한 해석들

    한 작품의 낙찰가가 거리낌 없이 폭등하게 되면, 그 치솟는 금액의 정체를 규정할 수 있는 내용은 극도로 불확실해진다. 그것이 새로운 미적 이념을 기념하는 것인지 첨단의 소재와 기법을 칭송하는 것인지, 소수 고객의 취향에 부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작품의 사회적 발언력을 증언하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표면에 드러난 것은 그저 괄목할만한 가격 상승기조의 센세이션일 뿐이다. 게다가 이 센세이션 조차 ‘전체로서의 사회’가 아닌 미술품 경매장만의 밀교적 열광에 결부되어 있기에, 낙찰가의 의미는 늘 어떤 정당화의 위기에 처해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경매 낙찰가의 의미가 떠안고 있는 불확실성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거나 옹호하려는 다양한 해석들이 출현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낙찰가의 급등이 화폐가치의 일상성과 미적가치의 고귀함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만큼, 돈의 상식적 수준과 예술의 보편적 이념을 ‘회복’하면서 낙찰가의 상승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이러한 해석의 방향은 크게 보아 다음의 두 가지 입장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상식적인 경제관념’의 입장에서 경매장의 가격매기기를 ‘거품 경제’와 유사한 관행으로 해석하려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 입장은 고가의 박수근 그림이 ‘실물 경제’의 안정적 척도를 부정하는 하나의 징후이자 오늘날 미술시장이 구조적 불안정성에 돌입했음을 증명하는 계기라고 여긴다. 두 번째 입장은 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즉 박수근의 작품이 고액 거래되었다는 사실은 생전 인정받지 못했던 ‘화가’에 대한 ‘사후 보상’의 차원에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4) 이 경우 낙찰가는 돈에 의한 예술의 청산이 아니라, 예술의 고귀함에 대한 금전적 찬양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두 가지 입장 외에, 스펙터클한 낙찰가 속에는 정작 ‘인간’ 박수근에 대한 표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특히 박수 근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경매가를 박수근의 소박한 삶에 대한 모욕이자 그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공허한 재화로 인식한다. 이제 이 세 가지 입장에 따른 경매가의 표상들을 검토해보자.

       1. 거품의 경제와 상식의 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