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빙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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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2014년 4월 발생한 ‘세월호’ 사고에 뒤이어 실종자 구조 및 수색을 위해 ‘다이빙벨’이 투입되었다.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고 수습의 과정과 대응방안을 기록함으로써 이 사고와 관련된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이 글은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이 ‘세월호’ 사고를 한국 사회구성 주체가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대한 영상 기록이자 주장으로서 위치지었다고 간주했다. 이러한 분석을 위해 우선 세계에 대한 인식은 항상 구성되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원본’과 그 복사로서의 재현에 관한 논의를 살펴본 뒤, ‘세월호’ 사고를 기록하는 카메라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다이빙벨>은 한국영화의 안과 밖에서 여러 논란들을 촉발하였던 만큼, 한국 사회는 물론 영화계의 핵심적인 논의들에 관한 징표라 볼 수 있다. <다이빙벨>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두 가지 대립점, 즉 기존 주류 언론과 행정부를 설정한 상태에서 다양한 개입의 미학과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내부 자막의 삽입, 감독의 개입, 감독의 주체위치, 대립점으로 설정한 지점들에 대한 의미들을 검토하였다. 결론적으로 <다이빙벨>은 정서적 근거를 축적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다이빙벨’ 투입의 과정에 대한 성실한 ‘기록’이 전체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서 제시되었다고 보았다.


    This paper argues that the documentary Diving Bell(the English official title is The Truth shall not Sink with Sewol, 2014) constructs subjets of society in South Korea how to deal with the Sewol ferry accident in 2014. It takes its own position as an image record and an argument. Although there are some problems such as distance, editing, choice, or extraction between affairs of ‘original’ and ways of ‘representation’, it carried out the task of the argument and record for establishing derection of the representative truth. This paper analyse the astehticd of intervention and strategy of its own argument: insert of subtitles, appearance of director in the frame, the subjective position of director, and the meaning of mainstream TV news and administration as the conflict point of this documentary. As a result, the documentary, Diving Bell used the strategy for justifying its own argument through accumulating affective bases, but we can say that the detatiled and industrious record on the process of deploying ‘Diving bell’ is the strogest basis that can support its whole argument.

  • KEYWORD

    <다이빙벨> , 세월호 사고 , 개입 , 주장 , 기록 , 재현 , 진실 , 다큐멘터리

  • 1. 구성되는 세계, 재현되는 세계

    세계는 언제나 구성된다. 본질적인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은 허구다.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세계는 ‘구성’(construction)될 뿐이다. 고정 불변하는 혹은 절대 객관적인 진실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세계가 구성되는 것이라는 말은 이와 같이 적어도 두 가지 층위의 의미를 담보한다.

    첫째, 고정 불변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언제나 변화한다. 다시 말하지만, ‘진화’가 아니라 ‘변화’한다. 물론 그 ‘변화’의 방향이 진일보한 것일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에 대한 판단에는 가치의 문제가 개입되어야만 한다. 둘째, 객관적 진실로서의 세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서사론의 초보적 물음은 진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fact) 자체에 관한 물음일 뿐이다. 그 사건이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발생했는가에 관한 물음, 즉 우리가 보통 말하는 서사론의 두 번째 물음이야말로 우리를 ‘진실’의 세계로 인도한다.1)

    다시 말하면 ‘어떻게’에 관한 사정이야말로 우리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어떻게’의 문제란 곧 ‘진실’을 운반하고 전달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것은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시점부터 인간이 창조해 온 수많은 미디어(media; 媒體)들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에 의해 수행될 수밖에 없다. 운반과 전달의 과정 가운데 그 주체는 끊임없이 이미 발생한 사건을 수정하고, 편집하고, 윤색하며, ⋯⋯ 변형시킨다. 그 과정은 즉 ‘이야기’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기도 하다. 많은 미디어들은 그 과정에서 서로 투쟁하면서 저마다의 주체위치(subjective position) 위에서 자신의 형편과 사정에 맞게 ‘이야기’에 해석을 부가한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또 다른 주체들은, 만일 자신이 그저 그 ‘이야기’를 전해지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객체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 해석의 과정에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만의 ‘진실’의 지점까지 도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객체로 전락한 그대로는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되는가에 관한 ‘진실’의 층위를 문제 삼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진실’이란 본질적인(essential) 의미에서 일컫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언제나 어떠한 주관적인 개입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즉 ‘구성’되는 무엇일 뿐이다.

    미디어들이 자신의 상황 위에서 ‘이야기’를 구성해내며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양상은 곧 ‘재현’(representation)의 과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논의를 따라 재현의 문제를 “원본과 복사의 관계”로 보고, 그 관계가 세 가지 측면을 함축하고 있다고 정리한 박성수의 논의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첫째, 원본과 복사라는 양자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개재되어, 이들의 분리를 전제로 하게 되며, 원본이라는 대상을 전체로서 포착하게 되기 때문에 총체화라는 과정을 함축하게 된다. 둘째, “재현은 주어진 실재를 있는 그대로 전사, 복사하는 것으로 주장”되지만, 사실 재현 작용은 재현의 대상 자체가 아니며, 언제나 그 일부만을 선택하고 추출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셋째, 재현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환상적인 것”이며 그 과정에는 언제나 “어떤 이야기의 전달이 개입”된다. 그러므로 재현은 “환상적이면서 이야기를 전달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연극적이다”.2)

    이와 같이 재현된 결과로서의 서사물이 독자나 관객에게 수용되는 층위의 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독자/관객은 특정한 사건의 재현으로서의 서사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 ‘사실’과 ‘진실’의 문제가 대두되는 경우, 서사물의 장르에 따라서 이중적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즉 재현된 서사 자체가 허구라고 여겨지는 장르들인 경우, 예컨대 동화나 소설, 영화 등과 같은 경우에 독자/관객은 그 서사의 원본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자신들 앞에 나타난 서사물만을 수용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원본과 복사의 거리라든가 개입, 선택과 추출 등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들은 그저 “있을 법한 이야기에 대한 그럴듯한 재현”으로서의 서사를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그 서사가 실제 현실이 아니라고 즉자적으로 판단하고, 관대한 심리적 허용의 상태에 머물면서 거리와 개입, 선택과 추출의 많은 부분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현실에 실재했던 사실을 재현했다고 간주되는 어떤 장르들, 예컨대 르포문학, 수기, 자서전을 포함하는 전기, 뉴스, 다큐멘터리 등을 수용할 때 독자/관객의 태도는 매우 엄격해진다. 만일 그 원본과 복사 사이에 어떤 거리가 존재한다거나 주관성이 개입됐다거나 선택과 추출이 수행됐다는 점이 발견되면, 그들은 재현된 서사물 자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것이 전혀 가치를 보유하지 못한다고 판단해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중 독자나 관객의 심리적 문제일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서사물 역시 개입과 거리, 선택과 추출이 없이 재현의 과정을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그 어떤 서사물이라 하더라도 재현의 과정을 거쳤다면, 그것 자체가 ‘진실’일 수는 없다. 다만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서사적 진실’ 혹은 ‘재현적 진실’의 층위에 존재할 뿐이다. 서사 장르에 관한 독자성 혹은 관객성의 문제는 결국 우리를 진실한 이야기의 재현 과정에 관한 주관적 개입의 논의로 이끈다.

    1)예를 들면 미국의 서사학자 시모어 채트먼(Seymour Chatman)은 서사론을 다룬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이야기와 담론: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에서 서사물을 ‘무엇’(what)과 ‘어떻게’(way)라는 두 가지 층위로 나누고 ‘무엇’을 곧 ‘이야기’(story)로, ‘어떻게’는 곧 ‘담론’(또는 ‘담화’; discourse)으로 부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비록 롤랑 바르트, 츠베탕 토도로프, 제라르 주네트 등의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을 따라서 이와 같은 제안을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서사론자들이 이와 같은 그의 구분을 원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Seymour Chatman, Story and Discourse: Narrative Structure in Fiction and Film, Cornell University, 1978, 9쪽.  2)이상 재현에 관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 박성수, 「재현, 시뮬라크르, 배치」, 『문화과학』 제24호, 2000. 39-40쪽.

    2. ‘세월호’ 사고와 기록하는 카메라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 경, 하루 전 인천의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하여 제주로 향해 가던 청해진해운 소속의 여객선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군 병풍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전체 탑승객 476명 가운데 구조된 인원은 172명에 그쳤으며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됐다. 특히 이 여객선에는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4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246명이 사망, 4명이 실종됐다.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종종 이와 같은 대형 참사소식을 전해 들었던 경험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이 사건이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온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이 어린 학생들의 단체 수학여행 과정 중에 발생한 사고로 인해 특정 학교의 학생 다수가 인명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다. 재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총괄 지휘와 책임에 앞장서야 할 정부 내 관련 기관들이 초동 대처에 실패하면서 잘못된 정보를 공개했으며, 구조 작업에 필요한 인력과 장비가 사고 발생 이후 8시간이나 지난 뒤에 투입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해당 여객선의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 구조의 노력을 다하지 않고 먼저 배에서 탈출하는 등 법적,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운영사는 관습적으로 여객선 내에 규정 이상의 무리한 화물을 적재하고 여객선 자체를 증축하는 등 불법을 저지르기도 했다.3)

    그러나 이 사건을 접한 이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 침몰 중인 여객선을 비추는 텔레비전 보도화면을 거의 실시간으로 직접 목도했다는 점일 것이다. 사건 발생 직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주요 텔레비전이 생중계를 통해 여객선 침몰 사실을 보도했다. 보도들은 해상에서 서서히 침몰해가는 여객선의 모습을 그대로 방송했다. 시청자들은 사고 발생 직후 갑판 등의 장소에서 구조를 기다렸던 인원을 제외하고 배안에 머물러 있던 승객은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다 밑으로 침몰해 가는 여객선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이미지를 통해 확인했다. 타인의 죽음의 과정을 생중계를 통해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청자들의 충격은 매우 끔찍한 경험으로 각인되었다.

    이처럼 미디어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다시 재현의 과정을 거쳐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 즉 미디어의 재현 과정에서 에서 거리와 개입, 선택과 추출의 문제가 어김없이 발생했다. 전대미문의 사건 속에서 심리적 충격에 노출된 시청자들은 이와 같은 거리와 개입, 선택과 추출의 문제를 ‘용서’할 수 없었고, 이러한 현상을 진실과 다른 ‘왜곡보도’라고 명명하고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급기야 기자들을 비하하는 용어인 ‘기레기’라는 말까지 등장할 지경이었다.4)

    뉴스 보도를 위해 파편적으로 현실을 기록하던 카메라는 사고 발생 초기부터 현장의 소식을 시청자에게 알려주는 말 그대로 ‘보도’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 기록된 이미지와 더불어 언어와 자막, 분석과 해석, 추정과 예측 등의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개입했던 생산 주체의 주관적 재현은 시청자들에게서 그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지지를 획득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3)이상 세월호 사고에 관한 내용은 다수의 관련 보도 등을 종합하여 정리하였음.  4)임철순, 「기레기를 누가 키웠나」, 『한국일보』2014.6.27.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말이 확산되고 있다. 세월호 승객 전원 구조라는 대형 오보에다 희생자들의 가족이나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과열 취재경쟁, 왜곡보도 이런 것들이 기레기라는 말을 낳게 했다. 인터넷 지식사전에는 ‘세월호 참사 당시 일부 언론이 앞 다퉈 오보를 쏟아 내면서,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는 보도를 하는가 하면 선정적, 자극적 기사로 전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공영방송으로 자처하던 공중파 방송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설명돼 있다.”

    3. <다이빙벨>: 영화 안과 밖의 논쟁들

       1) 원본 ‘다이빙벨’과 복사 <다이빙벨>을 둘러싼 논란들

    그 뒤 세월호 사고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기록,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이 제작됐다. <다이빙벨>은 세월호 사고를 제재로 한 첫 영화가 됐다. 물론 그것은 세월호 사고 자체를 담았다기보다는 사고 이후 그것에 대한 한국 사회 구성 주체들의 대처 방식을 문제삼고 있다. <다이빙벨>이 문제삼고 있는 구성 주체는 대표적으로 기존의 주류 언론과 행정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이빙벨>의 원본 사건은 크게 ‘세월호 사고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다이빙벨의 투입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원본 사건으로서 ‘다이빙벨’ 및 그에 대한 보도들과 그것의 복사로서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은 2014년 한국 사회에 중요한 몇 가지 물음들을 제기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 주된 논란의 쟁점들은 다음과 같은 층위에 걸쳐 있다. 첫째, 실종자 수색 및 구조 과정이라는 사고 현장, 즉 원본으로서의 현실에서 ‘다이빙벨’ 투입 및 철수를 반복하는 과정에서의 유효성 및 필요성 논란. 둘째, 원본의 복사로서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의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선정과 상영 철회 요구 및 상영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논란. 셋째,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의 주장과 이른바 ‘진실’에 관한 논란. 넷째, <다이빙벨>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영화제에 대한 감사 및 집행위원장에 대한 사임 요구와 관련한 논란.

    이러한 논란들은 각각 영화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며 진행됐다. 그것은 영화의 제작과 유통 및 그 이후에 이어진 일련의 과정 속에서 생산되었다. 첫 번째 경우가 영화 밖 현실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동기를 제공한 원본의 논란이라면, 두 번째 논란은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 상영 과정 중에 발생한 영화의 유통에 관한 논란으로, 이는 원본이 복사되어 유포되는 상황에 관한 문제를 담고 있다. 세 번째 논란은 영화 자체의 것으로 원본과 복사의 거리에 관한 문제를 보여 주었으며, 네 번째 논란은 영화 밖에서 이루어지면서 원본이나 복사의 문제 자체에서는 오히려 벗어나 있다. 그러나 두 번째와 네 번째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 작동해 왔던 ‘영화계’ 내부의 문제들을 들추어 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의 현재적 위치를 또 다른 층위에서 가늠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중요한 ‘영화적’ 의제들을 던져주었다. 요약하건대 현실의 사건으로서 ‘다이빙벨’을 둘러싼 문제들과 그 영화적 재현으로서 <다이빙벨>을 둘러싼 문제들은 원본-복사-유통-유통 이후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물론 그 일부로서 영화계 내부에 잠복해 있던 다양한 문제들을 가감없이 노출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 자체를 말하기에 앞서 영화가 위치해 있던 일련의 과정 속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면모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를 평가하거나 비평하는 척도들은 다양할 수 있다. 미학적 시각에서 그 예술성을 논의할 수도 있고, 대중적 시각에서 오락성이나 산업성을 논의할 수 있으며, 기술적 시각에서 그 진보를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고, 특정한 장르의 역사성을 논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영화가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 놓여 있는 사회기구(social institution)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이 보유하고 있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당겨 말하면,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이 <다이빙벨>을 모종의 예술적 정체나 산업적 산물, 혹은 기술적 진보 등의 층위에서 논의하는 일은 핵심을 벗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영화로서 <다이빙벨>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은 이러한 지점들에서는 얼마간 벗어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만일 동시대적 문제들에 대해 촉각을 집중해야 한다면, 또한 영화라는 존재가 만일 사회·역사적 의미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2014년 현재 한국의 영화가 위치하고 있는 지점과 그 존재 양상을 포착하기 위해서라면, <다이빙 벨>은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어떤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다이빙벨>의 위치

    21세기 한국 다큐멘터리는 거대한 양적, 질적 변화를 수반했지만, 여전히 사회적 이슈를 주요한 발언 의제로 삼아왔던 1980년대 후반 이후 ‘운동’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5) 물론 동시에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대한 다양한 실험 또한 수행되고 있는 점도 사실이다. 예컨대 매우 사적인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서사로 구성하는 경우가 자주 확인되고 있으며, 때로는 감독이 직접 출연을 통한 ‘배우되기’ 실험도 이미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새로운 실험들은 모두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다큐멘터리의 영화적, 사회적 기능들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다이빙 벨>의 공동감독이기도 한 안해룡이 선언한 바와 같이 한국의 다큐멘터리, 그 가운데서도 독립다큐멘터리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운동’으로서 시작한 한국 다큐멘터리는 “개인적 사색과 고민보다는 집단의 정의와 당위에서 문제를 조명하고 판단하고 분석하고 정의하는 데에 익숙해있다”는 것이다.6)

    2014년 가장 문제적이었던 다큐멘터리 <다이빙벨>도 이러한 한국 다큐멘터리의 경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의 발생과 그 이후 정부가 취한 일련의 조치, 그리고 거대 언론의 보도 태도 등에 대한 문제제기로 만들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본으로서의 사회 현실이 어떻게 그 자체로 문제적이며, 또한 그 복사로서의 다른 재현들이 어떻게 편집과 개입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지속적 물음을 던진다. 그리하여 복사로서 재현된 서사들이 임의적, 혹은 고의적으로 선택, 추출해낸 뒤 내버렸던 남은 이미지들을 찾아나서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 작업의 수행 과정에서 감독의 주체위치(subjective position)는 매우 핵심적인 가치 체계를 구성해낸다.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은 이상호와 안해룡에 의해 공동 연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주류 언론사 기자였던 이상호는 해직 이후 대안언론인 ‘고발뉴스’의 제작을 담당해 왔다. 그는 스스로를 “대한민국 대표 탐사전문기자”로서 “주류 언론이 외면한 진실을 파헤치는 중”이라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안해룡 역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폭넓게 표현하는 영상 저널리스트”로서 ‘위안부’ 문제를 날카롭게 다루었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 등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국 사회의 다양한 모순을 비판적으로 이미지화했던 감독이다.7)

    이와 같은 감독들의 주체위치는 끔찍한 재난을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이 어떠한 지향점을 상정하고 제작되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다큐멘터리들이 종종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들, 즉 다양한 관객들로부터의 문제가 제기되는 경향들을 익히 알고 있다. 예컨대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들에 대한 일련의 비판들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서현석은 그에 대한 비판이 “정치적 성격”으로부터 “면밀한 텍스트 분석에 의한 학술적 문제제기까지 다양하”다는 전제 위에서 심지어는 정치적 성향과 상관 없이 그의 영화를 두고 “문제에 대한 접근태도와 이를 제시하는 수사학적 방식에 결정적이 오류가 내재한다”고 비판하거나 “양식적 미흡함을 인정하더라도 작품의 정치적 효력만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옹호하는 주장들로 양분된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마이클 무어에 대한 논박이 “그의 성격과 외모에 대한 조롱으로부터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기 위해 필요한 상영조건이 위배, 왜곡되었다는 지적, 영화에서 제시되는 증거적 자료를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지적, 단순히 거짓을 말했거나, 진실을 일부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필요에 따라 왜곡했다는 지적” 등까지 다양하며, 심지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판단”마저 제시되어 그 비판의 정도가 매우 신랄했다고 설명한다.8) 마이클 무어에 대한 미국 내 평단과 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은 어쩌면 <다이빙벨>의 연출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다이빙벨>이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논쟁은 비판적 다큐멘터리들이 언제나 갇히게 되는 ‘진실’이라는 프레임의 문제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다이빙벨>이 자신의 영어 제목을 “The Truth Shall not Sink with Sewol”라고 명명한 것 또한 이 같은 문제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진실’은 항상 구성되는 것이므로 다원적 존재 양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단 하나의 고정 불변하는 본질적인 ‘진실’이란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말하는 ‘진실’, 즉 어떤 주체에 의해 발화되는 ‘진실’이 원본에 가장 근접해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거리, 즉 원본과 복사 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복사는 영원히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결국 묘사나 주장 등과 같은 방식으로 제시되는 복사로서 ‘재현적 진실’은 언제나 체제 완결적인 근거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방향의 문제가 설정된 위에서 지속적으로 구성되어가는 과정 속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한 서사물은 비록 제작, 생산되었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완결된 체계를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유통의 과정 속에서 무수히 많은 주체들과 만나면서 다시 의미의 재구성 과정을 겪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재현적 진실’은 특정한 서사물의 생산주체로부터 이미 결정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주체들의 층위에서도 여전히 구성되고 있는 과정인 셈이다. 그러므로 ‘재현적 진실’로서의 <다이빙벨> 또한 생산주체의 강력한 지지를 통해 구성됐지만, 수용주체 역시 이를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입장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3) <다이빙벨>: 개입의 미학과 전략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은 여러 관련 정보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존 주류 언론 권력에 대한 가감없는 비판과 회의의 지점에서 구성된다. 이러한 영화적 구성은 다큐멘터리의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특징이라고 여겨져온 몇 가지 법칙들을 위반하거나 해체하면서 수행된다. 물론 그러한 위반이나 해체가 <다이빙벨>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며, 이미 많은 다큐멘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 오고 있는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감독이나 카메라맨이 프레임 내부에 위치하면서 서사의 일부분을 이끌어간다거나, 그 자신이 1인칭 주관적 시점의 해설자로서 등장한다거나, 인터뷰 방식이 일관되지 않고 매우 즉시적이거나 비계획적이라거나 하는 점들이 그렇다. 그런데 <다이빙벨>은 이러한 실험적 요소들을 갖추면서도 여전히 자료화면의 직접 인용이나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자막을 삽입하는 등 전통적 다큐멘터리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함께 갖추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다이빙벨>은 다큐멘터리의 실험적 요소와 안정적 요소들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서사를 구성한다.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흐름은 감독 자신의 출연을 통한 인터뷰와 전체 서사의 진행이라는 중요한 축과 세월호 참사 발생 및 이후 날짜별 실종자 수 등을 띄우면서 시간의 흐름을 고지하는 자막 및 그와 더불어 보이스 오버로 삽입되는 기존 언론 아나운서의 보도 음성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축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는 기본적으로 다이빙벨의 관련 보도(JTBC), 다이빙벨 현장 투입, 구상 및 제작(플래시백), 제1차 투입, 철수, 제2차 및 3차 재투입, 재투입 성공, 수색 성과 없이 종료, ‘의도적인’ 실패 선언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과정은 주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제시되는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기법적 측면들의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중에서도 자막은 예컨대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 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 침몰”, “세월호 침몰 직후 컨트롤 타워는 없었다”, “해경은 골든타임이 지나도록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했다”(00:50)는 등의 주장을 펼치는데 이는 영화의 시작 직후 초반부에 삽입되면서 이 다큐멘터리가 어떤 위치에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강력하고 직설적인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 그 이후 침몰 바다의 장면이 배경으로 배치된 상태에서 제시되는 일련의 풀 쇼트 자막은, 예컨대 “2014년 4월 20일 참사 5일째 실종 244명”(7:45) 등과 같이 구조 작업 과정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삽입되는 풀 쇼트 자막은 주류 언론 아나운서의 구조 상황을 알리는 보도 음성과 함께 배치됨으로써 일종의 동일 쇼트 내에서 문자와 음성이 동시에 교차하는 변증법적 특징을 구성하게 된다.

    전체 다큐멘터리의 흐름 속에서 주요 쇼트에는 화면의 좌하단 또는 우하단에 쇼트의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도 제시되는데, 이러한 자막의 성격은 사실 기존의 다큐멘터리들에서도 자주 확인할 수 있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쇼트를 구성하면서 치밀한 계획과 준비에 따라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개연성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극영화 장르와는 달리, 임시적이고 즉시적인 상황에서 촬영을 수행함으로써 쇼트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다양한 정보들이 불충분한 상태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필요로 하는 다큐멘터리의 경우 자주 활용할 수 밖에 없는 구성 도구라 할 수 있다.

    특히 일부 자막들은 감독 자신의 SNS(Twitter)를 옮겨와서 배치한 경우도 있다. 이 또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던 실시간에 감독 자신이 어떤 의도와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자막 배치는 곧 전통적인 근대 미디어에 대한 뉴미디어의 보조적 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근대 미디어로서의 영화는 뉴미디어의 도움을 얻게 되고, 나아가 자신의 고유한 프레임 중 일부를 그에게 내어줌으로써 관객들에게 더욱 강렬한 정서적 호소를 하게 되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주장에 대한 관객의 동화를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둘째, 감독 자신의 개입은 첫 번째 시퀀스부터 매우 직접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관청의 복도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국회의원과 고위 공무원들을 쫓아가며 질의하는 장면이 모두 4개의 쇼트로 연이어 제시된다. 시퀀스는 핸드헬드 카메라, 비정상적인 프레임 구도, 감독의 단도직입적 질문, 그에 대한 답변의 회피 등과 같은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감독의 개입은 영화의 전반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프레임 내부에 위치하는 감독은 자신이 매우 주도적으로 다큐멘터리의 서사를 구성해 가면서 기존 언론의 보도를 적극적으로 반박하거나,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스스로 공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다큐멘터리가 가장 첨예한 대척점으로 삼고 있는 대상은 주류 언론의 보도 태도다. 특히 초반의 시퀀스들은 주류 언론의 보도 내용이 사운드 또는 이미지와 함께 먼저 제시되고 그에 대한 감독 자신 또는 인터뷰이(interviewee)의 반박이 이어지는 변증법적 구조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제시되는 기존 언론의 진술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매우 공식적이고 이성적인 언어와 수사로 구성되지만, 감독이나 인터뷰이들의 언어는 감성적인 언어와 수사들로 구성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이러한 과정은 이 다큐멘터리가 기존의 권력에 대한 강력한 도전과 문제제기를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권력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른바 ‘주류 언론’인데 그 중에서도 주로 사운드와 이미지로 보도를 전달하는 텔레비전 뉴스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때로 인터넷 보도 화면의 이미지 등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보도기사를 전달하는 기자의 음성이 주를 이룬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텔레비전 권력과 영화 권력의 충돌이라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두 미디어의 충돌은 매우 의미심장하면서 동시에 의아한 물음의 지점을 형성한다. 즉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현대 이후 텔레비전이라는 신흥 미디어의 등장은 결국 영화라는 미디어의 위기와 쇠락, 그에 따른 대응을 초래했다. 즉 이미지를 둘러싼 상호 견제와 경쟁의 과정에서 텔레비전이 일정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오히려 텔레비전과 같은 정규 방송 시스템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대안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미디어가 창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방송 시스템이 보여주지 못하는 이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더욱 폭넓은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사안에 대한 관객들의 판단을 돕고자 한다. 이 때 가장 강력한 대안적 시스템은 역시 자유롭고 창의적인 공간으로서의 인터넷 온라인을 염두에 둘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감독 역시 이같은 대안적 공간을 선택했으나, 인터넷 공간에서의 정보 전달은 파편화되는 양상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집약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해야 할 필요를 갖게 됐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대안으로서 영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선택되었다. 물론 영화 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측면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 시스템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의 폭과 깊이를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이빙벨>은 텔레비전과 영화의 충돌 혹은 투쟁 속에서 영화가 개척해 낸 새로운 자유와 도전의 공간을 제시한 셈이 되었다.

    셋째,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와 같은 충돌 혹은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감독의 주체 위치와도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기존의 주류 언론의 기자였다가 해직 당한 뒤 이른바 ‘대안언론’을 통해 탐사 보도를 제작, 방송해 온 언론인으로서 감독 이상호의 특수성, 즉 기자라는 주체위치, 그리고 기존 언론에서 기자의 자격으로 보도 영상을 제작해 왔다는 특수성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가 왜 이러한 방식, 즉 감독 자신이 처음부터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개입하면서 서사를 구성하는지에 관한 물음에 답변해 주고 있다. 다큐멘터리 내부에도 이러한 자신의 주체위치를 분명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이 다큐멘터리는 당초부터 한 편의 기획된 ‘영화’로서 제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기자의 취재 과정을 담은 보도 영상으로 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다이빙벨>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존재를 어떻게 간주할 것인가에 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즉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이빙벨>은 당연히 ‘세월호’에 관한 영상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느 기자의 ‘취재 과정’에 관한 영상 기록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는 실제로 감독 자신이 뉴스를 진행하는 화면이 등장하기도 한다.(7:27-40)

    이것은 앞서 사례를 들었던 바와 같이 마이클 무어의 영화를 두고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반박과 유사한 논리가 <다이빙벨>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다이빙벨’ 자체에 관한 기록을 넘어서서 한 기자에 관한 기록으로도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원립이 정교하게 제기한 바와 같이,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물음이 바로 이 문제와도 연계돼 있다. 문원립은 ‘기록’과 ‘주장’으로서의 다큐멘터리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고, ‘주제’라는 관점에서 다큐멘터리의 개념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다큐멘터리는 두 가지 조건, 즉 “주된 주제가 실제의 어떤 것이어야” 하며, “그 주제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연출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단, 그 연출된 장면이 말(내레이션 등)에 대한 예시(illustration)일 경우는 예외로 한다”고 부가했다.9) 그의 주장을 따라서 우리가 만일 <다이빙벨>을 기자 이상호의 취재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간주한다면, 기자의 보도 과정으로서 연출된 모든 화면들은 ‘말에 대한 예시’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도 쇼트의 프레임이 곧 다큐멘터리의 프레임과 일치하고 있는데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다큐멘터리 프레임이 보도 프레임을 폭넓게 포함하는 쇼트들로 구성된다면, 그 자체를 놓고 기자의 취재과정에 관한 영화라고 간주하는 데에 큰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 영화에서 보도 쇼트의 프레임은 곧 다큐멘터리 자신의 프레임과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넷째, 물론 다큐멘터리로서 <다이빙벨>을 이렇게 특정 기자의 취재 과정이라고만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극적인 해석을 더한다면, 분명 그것은 ‘다이빙벨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중반 이후부터 이에 대한 더욱 집중적이고 본격적인 스토리가 제시된다. 그 과정에서 이 다큐멘터리 자신이 겨누고 있는 또 하나의 대립점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는데, 그 공격의 지점은 바로 공권력(행정부)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초반 이용욱 해경 정보수사국장에 대한 인터뷰를 시도하는 과정과 이후 “사복조 경찰관들이 100명 정도 깔려있다”는 감독의 주장(8:29 이후)을 통해 여실한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다이빙벨’을 둘러싼 직접적인 주장을 통한 공권력에 대한 비판은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의 등장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제시된다.

    이 쇼트는 롱 쇼트로 처리되어 카메라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다큐멘터리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객관화하려고 했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뒤이어 이종인은 전화통화에서 “어느 사람이 막냐고? 누가 그러느냐고? 본청에서. 그 담당국장.”(19:7-19)이라거나 “이 집단이 이 일을 맡았으면 안됐었다.”(21:21-23), “악마 같더라고 악마! 산 생명이 그렇게 있는데도 눈하나 깜짝 않하고, 왜 그랬는지 어떤 조직의 어떤 뭐 위에서 지시사항이라든가 방침이 뭐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건 악마 집단이야 악마.”(26:10-27), “한 마디로 한 마디로 개같아. 무슨 말인지 알아? 이거를 막는 사람이 양심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개같아. 내 방송 앞에서 이런 얘기하면 안되는데, 그럼 안돼. 자리가 뭐 체면이 뭐 그렇게 중요해. 권력이 한없이 가냐고. 그러면 안돼. 이러면 안되는 거였어. 이러면 안돼.”(29:38-30:13) 등과 같은 언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확보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쇼트들은 영화의 전통적인 촬영 법칙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180도 법칙’을 위배하거나, 격한 감정으로 울음을 쏟아내는 인터뷰이를 담아냄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서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서적 근거를 확보해 가는 과정은 다른 장면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특히 이종인 대표가 인터뷰이로서 처음 등장하는 신이(5:34 이후) 해경과 계약한 구난 업체인 언딘의 담당자와의 인터뷰가 교차 편집되고 있다든가, 유가족과 해경 청장, 해양수산부 장관과의 대화 장면(31:14 이후)에서 감독 자신이 격앙된 감정을 드러낸다든가, 이종인 대표와의 인터뷰가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감독과의 사적 대화가 수행된다는가 하는 장면들이 모두 그렇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감독은 관객들에게 정서적 근거들을 확보해 주면서, 그것을 통해 사안을 판단하는 일정한 간접 증거로 축적할 수 있도록 제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한 정서적 근거와 더불어 축적된 간접 증거 위에서 감독 자신의 화면 내부의 내레이션, 즉 보도라는 형식을 빈 직접언술을 통해 “언론의 오보”는 “언론과 정부가 한 패”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정서적 전략은 사실 특정한 문제를 인식하거나 해결하려는 과정 속에서 종종 관건적인 요소로 작용하면서 제도나 관습, 이념의 문제 등을 포괄해 내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10)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다이빙벨>은 이와 같은 개입의 미학과 전략을 통해 한 기자의 취재 과정과 더불어 특정한 주제에 관한 관찰을 동시에 배치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들을 축적했다. 이는 새로운 양식의 ‘보도 다큐멘터리’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다이빙벨>은 중반 이후 ‘다이빙벨’의 투입 과정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관한 사실적 ‘기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체 ‘기록’의 과정 자체를 통해 지금까지 자신의 주장으로서만 존재했던 기존 언론과 행정부에 대한 비판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를 확보하기도 한다. 따라서 만일 <다이빙벨>에서 이러한 중반 이후, 특히 후반부 장면이 ‘기록’될 수 없었다면 이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무게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이렇게 첨예한 논란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다양한 사안들을 다룸에 있어, 그에 대한 무수한 주장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최종 심급은 결국 ‘기록’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5)이승민, 「21세기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경향에 대하여」, 『독립영화』 제42호, 2012, 10-12쪽.  6)안해룡, 「독립다큐멘터리의 투쟁의 역사」, 『독립영화』 제10호, 2001. 12쪽.  7)이상 공동감독에 대한 소개 중 인용 부분은 <다이빙벨>의 공식 전단지 참조.  8)서현석, 「‘진실’의 끔찍한 무게: 마이클 무어와 다큐멘터리의 유동성」, 『한국언론학보』 제48권 6호, 2004, 398-400쪽.  9)문원립,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영화연구』 제43호, 2010, 129-134쪽.  10)임대근, 「문화, 환경, 기술: 의미작용과 지식생산의 재구성」, 『문화+콘텐츠』 제1호, 2012 참조.

    4.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다이빙벨>은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사고를 한국 사회의 구성 주체가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대한 영상 기록이자 주장으로서 위치지어진다. ‘원본’으로서의 사건과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 사이에 개입되는 거리와 편집, 선택과 추출 등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현적 진실’의 방향을 가늠하기 위한 요소로서 ‘주장’과 더불어 ‘기록’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글은 <다이빙벨>이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기까지 다양한 개입의 미학과 전략이 수행되었음을 분석했다. 자막의 삽입, 감독의 개입, 그것을 가능케 했던 감독의 주체위치, 나아가 이 다큐멘터리가 대립점으로 설정하고 있던 지점들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다이빙벨>은 정서적 근거를 축적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이빙벨’의 투입 과정에 대한 성실한 ‘기록’이 전체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서 제시되었다고 보았다.

    2014년 한국 영화계의 안팎을 논란으로 점철시켰던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그것은 다시 말하면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에 관한 근본적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물음이 단지 다큐멘터리의 정의에 관한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장르로서의 다큐멘터리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일을 넘어서면서, 그 사회적 역할에 관한 문제제기까지 수행하고 있다. 전대미문의 끔찍한 사건을 대처하는 우리 사회 각 구성 주체의 태도와 입장들, 그 이면에 직조되어 구조화된 문제들의 일단을 들추어내는(reveal) 일이 진일보한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러한 ‘기록’의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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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영화 <다이빙벨> google
  • 10. <다이빙벨> 공식 전단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