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정체성에 대한 성찰*

An Introspection on Violence and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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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도희야>는 영남이라는 한 여성 경찰관이 가정 폭력 속에서 살아온 도희라는 소녀를 만나 그 아이를 보호하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성 경찰이 불쌍한 소녀를 보호한다는 것은 지당한 일일 수 있으나, 두 인물이 내장하고 있는 문제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얽히면서 갈등이 빚어진다. 영남이 가진 문제는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경찰대학 출신의 엘리트 경감이지만,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경찰 조직에서 징계를 받고 궁벽한 어촌 마을의 파출소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희가 지닌 문제는 그녀의 계부 박용하가 마을공동체의 이익에 직결된 외국인 노동자 브로커라는 사실이다. 마을에서 용하는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필요악이기 때문에, 용하의 폭력성을 마을 사람들 뿐 아니라 경찰관들까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감아준다. 따라서 도희는 법과 자본주의 논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피해자가 된 것이다. 영남이 도희를 보호하려고 할 때, 그래서 용하를 처벌하려고 할 때, 마을공동체가 영남에게 맞서 용하를 비호하려고 하면서, 영남의 행동은 단순히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를 경찰이 보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에는 ‘폭력’과 ‘정체성’이라는 키워드가 들어있다.

    개인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정한 정체성으로 환원적으로 판단될 때 개인은 타자화 되며 폭력이 발생한다. 그 판단 기준은 국가가 관장하는 법률일 수도 있고, 보편적 도덕률일 수도 있으며, 공동체의 관습일 수도 있다. 이 영화가 제기하는 정체성에 대한 단일한 판단과 그로 인한 폭력이라는 문제는 가족공동체의 관습, 공직사회의 윤리,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서 발생한다. 첫째, 전근대적인 유교 이념의 잔재에 기대어 자식에 대한 부모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여성에 대한 폄하를 정당화하면서 가족공동체의 관습에 의한 폭력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도희에 대한 폭력과 영남에 대한 타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 공직사회의 윤리에 의한 폭력은 ‘공공성’과 ‘명예’라는 명분으로 개인을 성적 취향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公)과 사(私)를 구별해야 한다면서 공(公)에 기대어 사생활을 침해해도 된다는 이중 잣대와 공직자는 명예를 지켜한다는 위계의식이 깔려 있다. 셋째,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의나 폭력에 눈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법체류 노동자와 같은 이들은 버려진 아동이나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이 영화는 엘리트이자 레즈비언인 여성 경찰과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무방비로 폭력에 노출된 소녀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가정폭력과 동성애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 문제와 연관시켜 배치함으로써 소수자에 대한 타자화와 폭력이라는 사안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그것이 성찰이나 문제제기에만 그치지 않고 피해자와의 동행을 제안하는 실천적 인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어린 괴물’이 되어버린 소녀에게 여성 경찰이 “나하고 갈래?”라고 하는 것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와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이 이상적인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열린 가능성이야말로 영화이기에 가능한 희망일 것이며, 그것을 통한 다양성의 성취야말로 영화가 지켜야 할 몫일 것이다.


    A Girl At My Door tells a story about a female police officer named Yeong-nam who meets a girl named Do-hee that has suffered domestic violence for many years and tries to protect the girl from violence. It may seem natural that a female police officer tries to protect a poor girl, but the issues inherent in the two characters are manifested, being entangled with the social relationships surrounding them, and accordingly cause conflicts. Yeong-nam's issue is that she is homosexual. She was an elite inspector that graduated from the police academy, but she was submitted to a disciplinary action by the police organization for being a lesbian and dispatched to a secluded fishing village as the head of the police substation. Do-hee's issue is that her stepfather Park Yong-ha is a broker of foreign workers that are directly connected to the profits of the village community. Yong-ha is the necessary evil of the village to secure its common good, which is why all the village people and even police officers are aware of his habitual violence against Do-hee and yet turn their eyes away from it. Do-hee is thus placed in a blind spot of law and capitalist logic as a victim. When Yeong-nam attempts to protect Do-hee and punish Yong-ha, the entire village community goes against her and protects him. Yeong-nam's attempt does not remain at the level of police protection for a child exposed to violence but escalates into an economic and social issue. There are two key words “violence” and “identity” at the core of the issue.

    An individual has a variety of identities. When one is reductively judged as a certain identity, he or she is otherized and violence ensues. The judgment criteria can be the laws controlled by the nation, universal ethical codes, or community conventions. Raised by the movie, the issues of single identity judgments and resulting violence are derived from the conventions of family community, ethics of public offices, and logic of capital. First, the conventions of family community rationalize parental violence against children and justify the derogation of women on the back of the remnants of pre-modern Confucian ideology. It is in such a process that Do-hee is subjected to violence and Yeong-nam is otherized. Secondly, the ethics of public offices otherizes individual sexual orientations in the name of "publicness" and "honor." Here, they discriminate against homosexuals according to the double standard that public should be distinguished from private and the rank consciousness that people in public offices should keep their honor. Finally, the logic of capital shuts its eyes to injustice or violence for the sake of community interest, in which process illegal foreign workers are put in a blind spot of human rights just like abandoned children and homosexuals.

    The movie effectively makes narrative of those issues through an encounter between a lesbian female police officer and a girl in a blind spot of human rights in a closed community, thus placing the issues of domestic violence and homosexuality in connection with the violation of human rights against foreign workers and offering a perspective to look at the issues of otherization of and violence against minorities in a broad sense. Those attempts do not remain at the level of introspection or problem presentation but move forward toward a practical perception to propose companions among minorities. The girl has become a "little monster," and the female police officer says to her "Wanna come with me?" It is an accomplishment to show the possibilities of new solidarity to the old types of relationships. Even though it might be an ideal fantasy, such accomplishments of hope ethics and diversity are the shares that movies should keep a hold on.

  • KEYWORD

    정체성 , 폭력 , 타자화 , 소수자 , 동성애 , 공공성 , 윤리적 폭력 , 공동체

  • 1. 작지만 젊은 영화, <도희야>

    <도희야>는 2014년 5월22일에 310개의 스크린을 통해 개봉하여 106,000 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다.1) 단순한 수치로 볼 때 이 영화는 천만관객 시대에 언급할 필요도 없는 미미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예 여성 감독의 저예산 데뷔작2)으로서 <도희야>는 나름대로 매우 선전(善戰)한 영화다.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이 제작하고 배두나, 김새론, 송새벽 등 젊은 연기파 배우들이 호흡을 맞추는 것으로 제작이 결정되면서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2014년 4월에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certain Regard)’ 부문에 초청되면서 개봉하기 전에 화제가 되었다. 2014년에는 임권택 감독 영화를 비롯한 한국영화가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에 실패한 때였기에 <도희야>가 한층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개봉 이후에는 네티즌과 기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고른 평가를 받았고3) 영화평론가들에게는 2014년에 주목할 만한 의미 있는 영화로 평가되었다.4) 또한 2014년 상반기에 다양성영화 부문 관객동원 상위 7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무난한 성적이라고 하겠지만, ‘칸영화제 초청’이라는 후광, 그리고 뒤를 이어 미국과 유럽의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5) 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 입소문에 비하면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하이콘셉트 화(化) 되지 않는 다중적인 요소들, 예컨대 장르는 ‘드라마’로 분류되어 있는데, 등급 심의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고, 포스터의 색채나 문구는 음침한 폭력과 스릴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복고적인 위로의 서사가 소구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대중에게 과히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또한 세 배우가 좋은 배우이기는 하지만 도드라지는 스타성은 부족하다는 것 등이 오히려 대중이 선뜻 선택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종의 장애로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다중성이야말로 새로운 영화의 힘일 수 있다. 관객의 분포를 보면 그것을 짐작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 이 영화의 관객 통계에서 연령대별로는 20대가 43.8%로 압도적이고, 그 뒤를 이어 30대가 37.2%, 40대가 18.8%를 차지하고 있다.6) 20~30대가 전체 관객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20~40대가 98.8%를 차지하는 것이다. 요컨대 <도희야>는 눈에 띄게 젊은 세대가 선호한 영화인 셈이다. 7080세대를 주 관객층으로 하는 복고적인 영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최근의 추세로 볼 때 젊은 관객층이 이 영화를 선택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다중적인 결이 젊은 관객과 보다 큰 접면을 마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젊고 새로운 지점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1)<도희야>는 2015년 1월13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누적 관객수 106,543명을 기록했다.  2)<도희야>는 <눈-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2000), (2004),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2007), <영향 아래 있는 남자>(2007) 등의 단편영화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제작비 5억 원의 저예산 영화이자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단출한 가족드라마이다. 이 영화는 인천영상위원회 2013년 인천배경영화 제작지원과 영화진흥위원회 2013년 하반기 독립영화 제작지원을 받아 제작되었고, 2014년 상반기 해외배급선재물 사업에도 선정되어 지원을 받았다. -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http://www.kofic.or.kr/kofic/business/) 참조.  3)<도희야>는 네티즌과 기자들에게서 7점대의 고른 평가를 받았다. - Naver.com, Daum.com, Cgv.co.kr 통계 참고.  4)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대영화연구》를 비롯해 《씨네21》,‘이동진 블로그’등에서 <도희야>는 2014년 한국영화의 수작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이 영화에 대한 장평이 세 편이나 쓰였다는 것도 영화평론가들의 관심을 말해준다. 이 영화에 대한 장평으로는 듀나, 「호평 세례 ‘도희야’ 시골느와르 관점서 보면」, 《엔터미디어》, http://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3458, 2014.5.20.; 김지미, 「흉터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씨네21》 955호,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6997, 2014.5.29.; 김영진, 「[신전영객잔] 그들의 고통은 제대로 표현되었나」. 《씨네21》 959호,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7225, 2014.9.28. 등이 있다.  5)<도희야>는 멜버른 영화제, 토론토 영화제, BFI 런던영화제, 스톡홀름 영화제, 팜스프링스 영화제, 포틀랜드 영화제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하거나 참신한 영화에 상영 기회가 부여되는 섹션에 초청되었다.  6)성별 분포로 볼 때 여성이 65.9%, 남성이 34.1%로 여성 관객이 훨씬 많았다는 저도 흥미롭다. 또한 남성 평론가보다 여성 평론가가 상대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http://www.cgv.co.kr/movies/detail-view/

    2. 소통의 부재와 고독

    <도희야>의 연출자 정주리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외로운 사람’을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외로운 사람 영남’이 ‘또 다른 외로운 사람 도희’를 만나는 이야기가 이 영화라는 것이다.7) 외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 그것은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외롭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고립되었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정서이다. 영남이 파출소장으로 부임하는 첫 날, 전체 상영시간 119분 중 초반 9분 정도에 해당하는 서두 부분에서 그것은 집약적으로 제시된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이 부분을 오프닝과 도입 단락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에서는 영화의 제목에 해당하는 ‘도희’가 소개되며 그 아이의 정신상황이 드러나고, 2)에서는 주인공 영남 또한 문제적 상황에 처해있음이 암시된다.

    1)에서 영화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영남(배두나)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비오는 날 이차선 지방 국도를 운전해 가던 영남은 다도해안의 작은 섬마을 입구를 지난다.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영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영남이 운전해오는 차로 귀퉁이에서 혼자 놀고 있는 꾀죄죄한 소녀(김새론)를 보여준다. 소녀는 왼쪽 손등에 무당벌레를 올려놓고 오른손으로는 개구리를 잡아 개구리로 하여금 무당벌레를 잡아먹게 하고 있다. 소녀의 잔인한 놀이는 소녀의 처지가 지독하게 외로우면서도 폭력적임을 암시한다. 카메라는 다시 소녀의 시선을 취하는데, 영남의 자동차가 그 시선에 잡히는 순간 소녀는 그 차에 의해 구정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영남이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사과하려고 소녀에게 다가가자, 소녀는 오히려 두려운 듯 뒷걸음질 치다가 너른 논두렁길로 달아나 버린다. 영남이 큰소리로 부르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소녀는 자신이 피해를 입고 상대방이 사과를 하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도 그러한 권리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더 이상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이 소녀가 사람에 대해 피해의식이나 공포가 있음을 드러낸다.

    2)에서는 영남이 자신의 차에 토박이 경찰관 엄 반장(손종학)을 태우고 동네를 돌아보면서 마을의 상황을 파악하고 주요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인물들의 성격이 집약적으로 제시되는 동시에, 영남과 인물들이 소통하기 어려울 것임이 예고된다.

    ①에서 등장하는 할머니(김진구)는 영남이 마을에 와서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동민(洞民)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불법 개조한 오토바이를 음주 상태에서 운전을 하고 있고, 이에 대해 엄 반장은 “위험한께 타지 마쇼!”라고 경고만 하고 만다. 이는 이 마을에서는 ‘인정(人情)’혹은 ‘인심(人心)’이라는 이름 아래 불법과 탈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처리의 바탕에는 노인이 잘못하더라도 노인이기 때문에 차마 엄정한 법적 잣대로 그를 처리할 수 없다는 가치관과 그 행동의 결과가 나쁘더라도 의도가 없었다면 책임을 묻기 힘들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②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태우고 난폭하게 운전하는 박용하(송새벽)의 등장은 이 마을이 움직이는 원리를 한층 분명하게 보여준다. 엄반장의 말을 통해 박용하가 그 할머니의 아들임이 우선적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엄 반장은 노인만 남은 이 어촌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나 조선족이 아니면 일할 사람이 없으며, 박용하는 이 마을에서 유일한 ‘젊은이[영맨]’로 그가 아니면 이 마을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영남에게 말한다. 이로써 박용하가 마을 공동체의 이익을 창출하는 데 필요악과 같은 존재임이 드러난다. 박용하의 오만한 태도와 그의 차에 타고 있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멍한 눈동자는 그들의 갑을관계를 드러낸다. 또한 그러한 박용하에 대한 엄 반장의 배려와 비호는 이 마을에서는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법제나 규범보다 마을 공동체의 자율적이고 편의적인 원리가 우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과정에서 영남이 이 마을에서 무척 외로울 것임은 더욱더 분명해진다. 게다가 용하 모친과 용하의 무례한 언사는 영남의 상황이 따돌림과 외로움을 견뎌야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용하 모친은 곱지 않은 눈길로 영남을 쏘아보며 엄 반장에게 “네 색시냐? 좋겄다! 잘해봐라, 오늘 밤에 신나겄다!”라고 말하고는 가버린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는 엄 반장이 용하에게 영남을 새로 오신 소장님이라고 소개하자, 용하는 역시 불량한 눈길로 영남을 훑어보며 뇌까린다. “솔찮이 미인이시구먼. 섹시하⋯” 이러한 폭력적인 언사들은 소통의 부재를 넘어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밤늦게 새로운 숙소에 홀로 들어온 영남은 낮에 이사할 때 남이 볼세라 생수병에 담아서 박스 채 들여온 소주를 불도 켜지 않은 채 강술로 마신다. 그리고 술에 취한 영남은 산책을 나갔다가 울며 뛰어가는 소녀를 다시 한 번 먼발치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녀의 뒤를 쫓아 뛰어간 길 끝에서 영남은 밤바다를 만난다. 그 밤바다는 방금 울며 도망친 소녀의 불길함을 반영한다. 그것이 영남의 시선을 포착될 때 거기에는 영남 내면의 고독과 적막까지 투영되어 음울하면서도 망연한 느낌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7)네이버 무비토크, 2014.5.13., http://movie.naver.com/movie/magazine/magazine.nhn?nid=2046

    3. 정체성과 폭력

    ‘서울에서 온 여성 파출소창’으로서, 영남이 가진 지역성과 성성, 그리고 직업적 위상은 모두 이 마을의 관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요소들이다. 따라서 영남이라는 존재 자체가 동민들의 호기심을 끌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근대적인 가치와 자본주의적인 논리 사이에서 편의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 마을의 작동 원리는 영남의 정체성과는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용하나 용하 모친과 같이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고 직설적인 인물들에 의해 대변될 경우 영남이 폭력적인 국면에 놓이는 것은 불가피하다.

    영남이 본격적으로 파출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영남의 정체성과 동민들 사이의 갈등은 커지게 된다. 그리고 이 갈등을 촉발하고 고조시키는 매개가 되는 것은 영남이 마을 입구에서 만난 소녀 도희이다. 마을공동체의 불법적 이익을 담당하고 있는 필요악이 바로 도희의 계부 박용하이기 때문이다. 영남이 도희를 보호하려고 할 때, 그래서 용하를 처벌하려고 할 때, 마을공동체가 영남에게 맞서 용하를 비호하려고 하면서, 영남의 행동은 단순히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를 경찰이 보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에는 ‘폭력’과 ‘정체성’이라는 키워드가 들어있다.

       1) 가족공동체의 관습과 친권(親權)이라는 폭력

    도입 부분에서는 영남이 마을 입구에서 만난 소녀의 이름이 ‘도희’라는 것과 이후 마을을 순찰하며 차례로 만난 할머니와 박용하가 도희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암시만 될 뿐 관객에게 명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영남은 그러한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영남이 도희의 이름을 확실히 알게 되고 도희가 처한 가정 폭력의 상황을 알게 되면서 영남과 용하의 갈등, 나아가 신참 파출소장이자 이방인인 영남과 마을공동체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다음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영남이 도희의 상황을 알게 되는 과정을 장면별로 정리한 것이다. 앞에 붙인 장면 번호는 필자가 임의로 매긴 것이다.

    #1에서 #3까지에서 영남이 동리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상황이 제시된다. 서울에서 온 여자 파출소장에 대해 동리 사람들은 엄청난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그러나 영남은 마을 사람들과 도통 어울리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을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4에서 영남이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이 반복되고, #5에서는 술이 떨어지자 음주운전을 하여 슈퍼마켓에 가서 술을 사는 불법적인 행동이 제시되면서 관객은 영남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러한 행동이 남성이 아닌 여성 경찰에 의해 이루어지고, 더구나 그것이 보수적인 지역 공동체에서 발각되었을 경우에 어떤 불미스러운 결과를 초래할지 짐작하기 때문이다.

    영남과 용하의 첫 번째 충돌은 #6에서 일어난다. 도희가 용하에게 폭행당하는 현장에 영남이 뛰어들어서 용하를 제압하고 경찰서에 현장범으로 연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찰관으로서의 영남의 정체성과 용하 가족의 가치관이 충돌한다. 용하네 집 마당에서 영남이 용하를 제압하자 노모는 “내 자식 내비 둬!”라고 외치며 막무가내로 영남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7에서는 파출소에서 잠이 깬 용하가 자식을 때리는 것도 범죄라는 영남의 말에, “내 딸내미 내가 교육도 못 시킨대요?”라고 반문한다. 이를 통해 자식은 부모의 소유이고 부모의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 가정의 문제는 그 가정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보편적인 법의 적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고가 드러난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는 소위 훈육이라는 명분의 폭력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용하 가족을 비롯한 이 마을 공동체가 일관된 규범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 반장이 용하를 두둔하는 대사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엄 반장은 용하가 친딸도 아닌 도희를 보살피고 있는 것이라며 “저 자식 없으면 동네가 굴러가질 못한다.”고 다시 한번 말한다. 이는 용하의 폭력성을 마을에서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마을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공권력까지도 용하의 비행을 눈감아 주고 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누군가 그 이해관계에 개입하여 마을에 손해를 끼친다고 판단되면 마을공동체는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라면 그 결과는 더욱 자명하다. 영남이 용하를 연행한 것은 마을공동체의 이익에 위협을 가한 행동이었다. “저 자식이 없으면 동네가 굴러가질 못한다,”는 엄 반장의 대사는 영남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말의 이면에는 만약 영남이 용하를 더 몰아세운다면 그것은 마을 전체의 생활을 위협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하가 폭력적으로 관리하는 불법체류 노동자 문제를 영남이 건드리자 마을 전체가 영남에게 분노하며 그녀를 몰아낼 빌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때 마을 측에서 내세우는 명분은 가족공동체의 윤리이며 마을 측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것은 그 동안 마을의 그 누구도 보호하지 않았던 도희이다. 도희에게 법적인 보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남이 도희를 임의로 데려갔고, 동성애자인 영남이 도희를 성추행했다는 것으로 용하가 영남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때 영남이 경찰관으로서 법률에 의거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건 처리를 통해 보여준 정체성은 문제의 국면에서 배제되고, 그녀의 성정체성만이 표면화된다.

       2) 공직사회의 윤리와 동성애의 타자화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정체성을 갖게 마련이다.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동료 사이에서는 의리 있는 친구일 수 있고,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일 수 있다. 존경받는 학자라고 하더라도 동성애자일 수 있고, 동성의 아이를 입양하여 잘 키우는 부모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일한 정체성으로 대상을 파악할 때 폭력이 발생한다.8) 영남이 도희를 보살핀 것은 경찰관으로서의 소명의식과 보편적인 인간의 도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남이 동성애자로 규정되는 순간 그녀의 행동은 모두 동성애자의 성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되어버린다.9) 그리고 그러한 폭력은 비단 마을공동체의 윤리적 잣대로서만이 아니라 공공성을 명분으로 하는 공권력에 의해서도 자행된다.

    영남이 사생활로 인해 경찰 조직 내부에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도희가 영남을 따르게 되고 영남이 그러한 도희를 집에 데려와 자장면을 먹인 이후에 밝혀진다. 이후의 내용을 장면 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9에서 영남이 경찰서를 방문했을 때 경찰 선배(김민재)는 영남으로 인해 경찰대학 동문회까지 소집되었다는 것을 알리며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면 아무도 영남을 보호해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똑바로 좀 하자!” 영남이 서장실에 들어갔을 때 서장(문성근)은 ‘그런 쪽’에 편견 없다. 사생활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그렇지만 ‘공직사회’이기 때문에 ‘말썽 날 게 뻔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영남의 사생활이 경찰 조직에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여기에서 앞서 영남이 받지 않던 ‘은정’의 전화가 환기되며 그 사생활의 문제가 동성애였음이 감지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선배의 ‘똑바로 하자’는 표현과 서장의 논리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똑바로 하자’는 것은 이성애자를 가리키는 영어표현 ‘straight’를 상기시키며 선배는 동성애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이는 나중에서 영남이 용하에 의해 아동 성추행 혐의로 고소되었을 때 “너 무슨 병 있냐?”고 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동성애는 질병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반응은 오히려 진솔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10에서 서장의 반응은 이중적이며 그의 논리는 모순을 드러낸다. 그는 엄연히 사생활에는 관여하지 않고 ‘그런 쪽[동성애]’에는 편견이 없다고 하면서, ‘공직사회’라는 명분을 들어 경찰은 동성애자여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편다. 게다가 “학교 명예도 있고⋯”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동성애’와 ‘학교 명예’를 대비시킨 것에는 이미 동성애는 고상한 명예를 더럽히는 천하고 나쁜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의 모순된 언술에는 동성애자인 이상 다른 어떤 정체성으로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와 함께 ‘공공성’ 혹은 ‘윤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다. 영남이 동성애자인 이상 그녀가 유능한 후배라거나 소명감 있는 경찰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편견(偏見)은 공정하지 못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서 바라본다는 뜻이다. 편견이 없다던 서장이야말로 편견에 가득 차 있음을 모순된 언술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공권력은 공공의 이익을 대표하여 공공성을 가진 주체에 의해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행사되는 힘이다. 그것은 애초에 ‘자연 상태’10)의 무분별한 폭력을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국가’라는 대표 주체로 이양된 것이다. 그런데 국가나 그것에 준하는 공공단체가 우월한 의사의 주체로서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강제할 때 그것은 자연 상태의 야만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된다. 설사 그것이 민주적 의사 수렴 과정에서 이루어져 다수의 의견을 대표하는 힘의 행사라고 하더라도 다수에서 소외된 소수에게 그 힘은 또한 폭력일 수 있다. 영남은 성적 소수자로서 공공성과 명예의 이름으로 그런 폭력을 당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가 어촌공동체의 이익을 건드렸을 때 다시 한 번 공공 윤리라는 폭력의 피해자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좁은 바닥이 더 무섭다. 눈치가 빤해서 누군가 조금이라도 튀는 게 보인다? 이런 데서 말나는 거 눈 깜짝할 사이야.”라는 선배의 충고는 현실에 매우 적실한 경고인 셈이다.

       3) 자본의 논리와 소수자에 대한 공적 폭력

    이야기에서 금기는 깨지기 위해 설정된다. 앞서 선배가 영남에게 한 충고는 그런 일이 벌어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영남은 서울 출신 엘리트 여성 경찰이라는 것만으로도 어촌 마을에서 이미 ‘튀는’ 사람이었는데, 도희와의 인연으로 인해, ‘그가 아니면 마을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용하와 맞서면서 ‘정말 튀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의 긴장은 영남과 용하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고조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영남과 용하의 갈등에 도희를 둘러싼 가정폭력의 문제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을 배치함으로써 아동폭력과 불법 체류 노동자의 문제를 연관시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두 문제가 연관되는 기저에는 마을공동체의 경제적 이익이라는 자본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용하가 불법적이지만 마을에 이익이 되는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에 용하의 가정폭력과 불법체류 노동자들에 대한 폭행을 모두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남이 불법체류 노동자에 대한 합법적 해결과 그에 따른 용하의 처벌을 행하자 영남은 문제를 일으킨 불법체류노동자 바킴과 함께 응징과 제거의 대상이 된다. 용하가 경찰관들 앞에서도 “다 동네 잘 되자고 일한 것밖에 없다”고 큰소리를 치며 당당하게 “날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외치는 것은 이 마을의 권력이 합법적인 영남에게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미용실에서 마을 아낙들이 영남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면서, 바킴을 일러 ‘미친 새끼’, ‘성질이 지랄 같다’, ‘짐승같이 생겼다’고 들으란 듯이 말할 때 그 욕설은 영남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남이 출입국관리사무국과 경찰을 불러 용하를 정식으로 연행하는 순간 마을 남자들이 영남에게 직접 대고 “가만 보니까 소장인가 뭔가 젊은 년이 계급장 달았다고 웬만히 쑤시고 다녀야재”라고 뇌까릴 때 영남은 이 마을에서 완전히 축출될 것임이 명백해진다. 그것은 영남과 바킴이 나란히 철창 안에 갇히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눈앞에 확증된다.

    영남이 축출되는 이유는 마을공동체의 영리를 위한 불법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지만 그녀에 대한 응징은 아동성추행에 대한 법적 처벌 차원에서 진행된다.11) 그런데 일견 연관이 없어 보이는 그 이유와 과정에는 공통적으로 보편성의 폭력이 내장되어 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문화적 특수성에 반응하는 데 실패한 보편성, 자신의 적용가능성의 영역 안에서 포함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반응하면서 재정식화 되지 못하는 보편성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보편적 이해관계와 특수한 이해관계들이 갈라질 때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이 도덕의 문제로 주제화되는데, 이때 보편자가 개별자와 화합하거나 개별자를 포함하지 못하고, 보편성에 대한 요청 자체가 개별자의 권리를 무시하게 되는 상황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12) 영남에 대한 응징은 그 보편성의 에토스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는 예를 잘 보여준다.

    마을공동체는 이미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운용되면서 한편으로는 전근대적 윤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두 항목은 모순되고 대립되는 형태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 잣대로서 경우에 따라 편의적으로 이용되며 상호 유착되어 있다. 즉 마을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한다는 농촌공동체적인 미덕이 불법과 탈법을 눈감아주며 그 이득을 위해 공모하는 명분이 되고, 마을의 이익에 불리한 소수자를 잔인하게 축출하는 윤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영남이 경찰서에서 아동성추행으로 조사를 받는 과정은 이성애자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더 정상적이라는 인식이 어떻게 폭력화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애초에 형사(박진우)는 동성애자는 우선적으로 성적 욕망에 충실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심문을 이어간다. 다음은 형사와 영남의 대화이다.

    형사는 동성애자가 동성(同性) 아이의 옷을 벗기고 몸을 만졌다는 이유 하나로 성추행을 확신한다.13) 여기에서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정체성, 예컨대 부모, 연인, 자식, 친구, 동료 등으로서의 측면과 가능성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논리적 으로는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하는 환원적 폭력이 형사의 언술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교활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의리가 없고, 흑인이기 때문에 야만적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흑인이나 유대인에 대한 그러한 시각에 대해서 지금 우리 모두 편견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게 된 것은 따져보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편견이기 때문에 정당한 판단이 아니라고 우리가 말하면서도 합리적 이성으로 대자적으로 바라볼 때와 즉자적으로 반응할 때와는 다를 수 있다. 편견에 반대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흑인이나 유대인을 직접 만났을 때 호감을 갖지 못할 수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를 만나면 불결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반응은 분위기와 여론이 어떠냐에 따라서 다르게 표출될 수 있다. 형사가 영남을 ‘동성애자’라고 칭하자 경찰서 안의 사람들이 모두 영남을 쳐다본다. 그 시선에서는 그들이 즉자적으로 느끼는 동성애자에 대한 낯설음이 아동성추행이라는 혐의와 겹쳐지며 영남을 ‘불결한 동성애자’로 바라보는 편견이 발현된다. 형사의 질문과 경찰서 안의 반응 안에서 우리는 즉자적인 반응이 여론이 되었을 때 편견이 진실을 어떻게 호도하게 되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경우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8)인간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일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데에서 폭력적인 사태가 발생한다고 말한 것은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이다.-아마르티아 센, 『정체성과 폭력: 운명이라는 환영』, 이상환·김지현 옮김, 바이북스, 2009, 57-86쪽 참고.  9)‘동성애자들은 성욕을 억제하기 힘들다’는 것은 동성애자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 중 하나이다. - 공자그 드 라로크, 『동성애』, 정재곤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95-99쪽 참조.  10)토마스 홉스는 국가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공통의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 각자가 자기 보존을 위해 싸우는 상태, 그래서 무원칙한 각자의 전쟁이 지속되는 상태를 ‘자연 상태’라는 이론적 개념으로 설명했다. 여기에서는 폭력이 사적인 차원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원칙이나 공권력에 의해서도 행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개념을 잠시 빌렸다.-‘자연 상태’의 개념에 대해서는 공진성, 『폭력』, 책세상, 2009. 참고.  11)퀴어학자 겸 소설가인 애너매리 야고스는 존 디밀리오의 주장을 인용하며, 동성애는 자본주의 시대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즉 동성애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의 의미가 새롭게 부상하고 동성애자가 하나의 종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도시화와 산업자본주의의 성공에 따라 발생한 가족과 성적 관계들의 구조조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이론 입문』, 박이은실 역, 도서출판 여이연, 2012, 25-26쪽.  12)Theodor W.Adorno, Problems of Moral Philosophy, trans. Rodney Livingston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p.15;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2014, 17쪽에서 재인용.  13)성의학자인 공자그 드 라로크에 의하면, 동성애자들이 자녀를 원할 경우 그것을 소아애호증으로 보는 견해는 보수적인 계층들 사이에 편재(遍在)하는 편견(偏見)이다.-공자그 드 라로크, 『동성애』, 정재곤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145-150쪽 참고.

    4. 경계의 진실과 동행의 제안

    이 영화에서 영남의 도희에 대한 태도는 무고하다. 그녀가 “어떤 비정상적인 의도로 도희의 신체에 접촉한 사실이 추호도 없고, 다만 폭력에 오래 상처받고 망가진 한 아이를 곁에 데리고 있었을 뿐”임을 관객이 보았고 증언할 수 있다. 그런데 도희의 영남에 대한 태도는 형사의 말처럼 ‘이상한 데’가 있다. 영남에게 함께 목욕하자고 제안한 것도 도희이고, 욕조 안에서 영남의 벗은 몸을 먼저 껴안은 것도 도희이다. 또한 도희는 영남과 동일한 수영복을 사고 영남처럼 머리까지 커트한다. 도희의 이러한 태도는 영남의 말대로 영남이 경찰제복을 입고 있고, 또 나쁜 짓 남자도 혼내주고 힘이 있어 보이니까 그런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관객의 눈에도 도희의 태도는 영남의 말 이상으로 보인다.

    도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계부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계부와 할머니로부터 의 폭력에 길들여지며 자란 아이이다. 도희는 피학을 자신의 운명적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며 수용한다. 그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엄마의 도망인 것으로 추정된다. 어미를 닮아서 요사를 떤다고 폭행을 당하거나, ‘잡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도희에게 ‘나쁜 피’를 타고났음을 각인시킨다. 따라서 도희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고 생각하면서 피할 수 없는 폭력을 수용하고 인내한다. 그것은 때때로 차라리 스스로 자신을 때리는 자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영남이 은정을 만나고 늦게 들어갔을 때 영남을 기다리던 도희가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이 감히 영남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했고 사랑받는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잘못이며, 그러한 자신을 영남이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기라도 처벌해야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희는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로부터의 폭력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아이에게 어느 날 경찰 제복을 입은 영남이 나타나 괴롭히는 친구들을 쫓아내주고, 자신을 때리는 계부를 제압하여 연행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어른이 아이를 때리는 건 아주 나쁜 거야. 그렇게까지 맞을 땐 누군가에게 얘기를 해야 돼, 반드시!” 이 순간 도희에게 영남은 세상에서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유일한 구원자이자 보호자가 된다. 도희에게 영남은 세상의 법을 말해주는 아버지이자 자신의 감싸고 안아주는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영남에 대한 도희의 맹목적인 집착은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면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만한 일이다. 굳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아기가 자라면서 부모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그 욕망과 감정 면에서 연인에 대한 사랑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 아님은 일반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14) 따라서 도희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영남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렌즈 삼아 도희와 영남을 바라보기에 도출될 수 있는 판단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도 그 애매한 경계를 느끼며 두 인물을 불안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그 불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인물이 헤어지면 그 불안은 해소될 것인가? 관객의 불안이 해소된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도희는 할머니를 죽음에 몰아넣고 계부를 파멸시킬 정도로 위험한 아이다. 피학에 길들여진 만큼 가학적으로 쉽게 변할 수 있는 아이이기도 하다. 도희가 영남을 만나고 난 후 할머니를 죽음에 몰아넣는 것은 폭력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이에 대해 도희는 눈물을 흘리며 “소장님이 맞지 말라고 했잖아요?”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도희가 취할 수 있는 저항 방법이 자신이 그 동안 체득해온 폭력적인 방식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자신의 유일한 수호자이자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소장님을 위해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행동도 이 아이에 내재된 폭력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가를 짐작케 한다. 권의경(공명)이 도희를 가리켜 ‘어린 괴물’이라고 칭하는 것은 도희의 위험성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희를 두고 떠나려던 영남은 ‘어린 괴물’이라는 말에 발걸음을 돌린다. 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새로움을 보여준다.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매달리던 도희, 무슨 일이든지 다 할 테니 같이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도희를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던 영남이 ‘어린 괴물’을 껴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선택인가는 관객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도희를 굴 속같은 집에 홀로 두고 가는 것은 더 이상 안 된다는 당위가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암묵적으로 흐르게 된다.

    그것은 김새론이라는 아역 배우의 필모그래피와도 연관된다. 김새론은 <아저씨>에서 부모로부터 방치된 채 옆집 아저씨(원빈)의 보호를 받는 아이 소미였고, <여행자>에서도 아버지(설경구)에 의해 버려져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였다. 주지하다시피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저씨는 소미의 책가방 안에 생필품을 채워서 아이에게 주고는 “이제 혼자 서는 거야.”라고 말하고 떠난다. <여행자>에서 아이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프랑스에 입양되어 혼자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어떻게 자립할 수 있겠는가? 한국에서는 책임질 사람이 없어서 프랑스까지 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영남은 아이에게 다가가서 말한다. “나하고 갈래?”

    그 동안 이러한 동행의 제안이 없었기에 그것은 참신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놀라운 결론이어서가 아니라 관객과의 공감대에 놓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도희가 또 버려진다면 안 된다는 불안과 기존 영화들과의 맥락에서 그러한 결말은 진부하다고 관객이 어렴풋이 예감하는 상태에서 그러한 결론을 보여주기 때문에 안도와 더불어 참신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남이 도희를 두고 간다면 도희는 매우 위험한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 농후하다. 도희는 기존의 존재론적인 장 안에서 이미 주체로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된 아이이기 때문이다. 도희가 그 마을공동체에 있는 이상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남이 도희와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것은 도희에게 자기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론 도희가 향후에 ‘괴물’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것은 영남 혼자 책임질 수 있는 몫은 아니다. 영남과 도희가 어촌을 떠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이 탄 차가 억센 비를 만나고 다시 날이 갠 도로를 달리게 되는 것은 그들의 앞날이 결코 평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따라서 영남이 도희를 외면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남의 책임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식을 이 영화에서는 ‘불안하지만 용감한 동행’의 제안을 통해 드러내며 우리의 마음속에 있던 이상적 당위와 책임감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14)우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하나의 구분법이고 일반적인 관념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네사 베어드, 『성적 다양성, 두렵거나 혹은 모르거나』(김고연주 옮김, 2007, 이후) 참조.

    5. 맺음말

    신예 정주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 <도희야>는 작지만 새로운 영화다. 이 영화는 5억 원의 저예산으로 누적 관객 10만여 명을 기록했다. 자본의 크기와 관객 수 면에서 본다면 천만 관객 시대에 미미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던지는 문제 제기와 그것에 대해 내놓은 나름대로의 대안은 사려 깊으면서도 마음을 울린다. 관객 중에 청년과 여성이 대다수였다는 것과 2014년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이 영화를 초청한 것은 그러한 성취에 대한 화답이라고 하겠다.

    <도희야>는 영남이라는 한 여성 경찰관이 오랜 시간 동안 가정 폭력 속에서 살아온 도희라는 소녀를 만나 그 아이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성 경찰이 불쌍한 소녀를 보호한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두 인물이 내장하고 있는 문제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얽히면서 갈등이 빚어진다. 영남이 가진 문제는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경찰대학 출신의 엘리트 경감이지만,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경찰 조직에서 징계를 받고 궁벽한 어촌 마을의 파출소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희가 지닌 문제는 그녀의 계부 박용하가 마을공동체의 이익에 직결된 외국인 노동자 브로커라는 사실이다. 마을에서 용하는 공동의 이익을 이한 필요악이기 때문에 용하의 폭력성을 마을 사람들 뿐 아니라 경찰관들까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감아준다. 따라서 도희는 법과 자본주의 논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피해자가 된 것이다. 영남이 도희를 보호하려고 할 때, 그래서 용하를 처벌하려고 할 때, 마을공동체가 영남에게 맞서 용하를 비호하려고 하면서, 영남의 행동은 단순히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를 경찰이 보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에는 ‘폭력’과 ‘정체성’이라는 키워드가 들어있다.

    개인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정한 정체성으로 환원적으로 판단될 때 개인은 타자화 되며 폭력이 발생한다. 그 판단기준은 국가가 관장하는 법률일 수도 있고, 보편적 도덕률일 수도 있으며, 공동체의 관습일 수도 있다. 이 영화가 제기하는 정체성에 대한 단일한 판단과 그로 인한 폭력이라는 문제는 가족공동체의 관습, 공직사회의 윤리,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서 발생한다. 첫째, 가족공동체의 관습에 의한 폭력은 전근대적인 유교 이념의 잔재에 기대어 자식에 대한 부모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여성에 대한 폄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희에 대한 폭력과 영남에 대한 타자화가 발생한다. 둘째, 공직사회의 윤리에 의한 폭력은 ‘공공성’과 ‘명예’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성적 취향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한다는 이중 잣대와 공직자는 명예를 지켜한다는 위계의식이 깔려 있다. 셋째, 자본의 논리에 의한 폭력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의나 폭력에 눈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법체류 노동자와 같은 이들은 버려진 아동이나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이 영화는 레즈비언 여성 경찰과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녀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가정폭력과 동성애의 문제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 문제와 연관시켜 배치함으로써 소수자에 대한 타자화와 폭력의 문제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관점을 마련한다. 2000년대 들어서며 ‘동성애’가 주요한 문화코드 중 하나로 부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업적 의도로 사적인 사랑의 비극이나 시각적 쾌락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았고,15) 동성애를 사회적 맥락과 연관시켜 바라보는 것은 부분적으로 시도되었을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도희야>가 보여주는 동성애에 대한 시야의 폭과 심도는 의미가 깊다.

    또한 <도희야>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성찰이나 문제제기에만 그치지 않고 실천적 인식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어린 괴물’이 되어버린 소녀에게 여성 경찰이 “나하고 갈래?”라고 동행을 제안하는 것은 기존에는 없었던 관계 맺기이다. 대개의 경우 괴물이 된 소녀는 홀로 남겨진다. 그러한 결말에 이를 경우 영화는 문제제기에 그치게 된다. 그런데 영남이 도희를 태우고 서울로 가면서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관계와 연대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것이 현실적 개연성이 희박한 이상적인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열린 가능성이야말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이며, 그것을 통한 다양성의 성취야말로 영화가 지켜야 할 몫일 것이다.

    15)이에 대해서는 주창윤, 『대한민국 컬처 코드』, 21세기북스, 2010, 139-187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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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아마르티아 센 2009 『정체성과 폭력: 운명이라는 환영』, 이상환·김지현 역 google
  • 11. 애너매리 야고스 도서출판 여이연 『퀴어이론 입문』, 박이은실 역 google
  • 12. 주디스 버틀러 2014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양효실 역 google
  • 13. 김 영진 2014 「[신전영객잔] 그들의 고통은 제대로 표현되었나」. [《씨네21》] google
  • 14. 김 지미 2014 「흉터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씨네21》] google
  • 15. 2014 「호평 세례 ‘도희야’ 시골 느와르 관점서 보면」 google
  • 16. 네이버 영화 google
  • 17. 다음 영화 google
  • 18. <도희야> 공식홈페이지 google
  • 19. 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 google
  • [] <도희야>의 포스터
    <도희야>의 포스터
  • [] 영남이 처음 도희를 대면하는 장면. 영남의 자동차 때문에 구정물을 뒤집어쓴 도희가 차에서 내려 다가가는 영남을 보면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영남이 처음 도희를 대면하는 장면. 영남의 자동차 때문에 구정물을 뒤집어쓴 도희가 차에서 내려 다가가는 영남을 보면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 [] 영남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영남의 모습과 그러한 시선으로 포착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것은 영남의 고독한 상황과 내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영남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영남의 모습과 그러한 시선으로 포착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것은 영남의 고독한 상황과 내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 [] 마을에서 영남의 파출소장 부임을 환영하는 장면. 이 장면에서 영남은 마을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마을에서 영남의 파출소장 부임을 환영하는 장면. 이 장면에서 영남은 마을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 []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폭행 문제로 영남이 용하와 맞서는 장면. 이후 영남과 용하의 갈등은 체포와 고발로 이어지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폭행 문제로 영남이 용하와 맞서는 장면. 이후 영남과 용하의 갈등은 체포와 고발로 이어지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 [] 비오는 날 아버지에게 폭행당한 도희가 영남의 집으로 뛰어든 모습
    비오는 날 아버지에게 폭행당한 도희가 영남의 집으로 뛰어든 모습
  • [] 영남이 비에 흠뻑 젖은 도희를 목욕시키기 위해 옷을 벗기자 폭력에 상처 입은 만신창이 몸이 드러난다. 영남은 폭력에 상처받은 이러한 도희를 어루만지고 보호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동성애자이기에 아동성추행이라는 혐의를 받게 된다.
    영남이 비에 흠뻑 젖은 도희를 목욕시키기 위해 옷을 벗기자 폭력에 상처 입은 만신창이 몸이 드러난다. 영남은 폭력에 상처받은 이러한 도희를 어루만지고 보호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동성애자이기에 아동성추행이라는 혐의를 받게 된다.
  • [] 영남과 도희가 백화점에서 쇼핑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영남과 도희가 백화점에서 쇼핑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 [] 해수욕장에서 영남과 도희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동네 사람이 나타난 아는 체를 하자 도희가 영남의 목을 꼭 끌어안는 모습. 영남만 바라보는 도희의 시선과 영남을 껴안는 도희의 표정에서 영남에 대한 집착이 잘 드러난다.
    해수욕장에서 영남과 도희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동네 사람이 나타난 아는 체를 하자 도희가 영남의 목을 꼭 끌어안는 모습. 영남만 바라보는 도희의 시선과 영남을 껴안는 도희의 표정에서 영남에 대한 집착이 잘 드러난다.
  • [] <도희야>의 마지막에 이제는 영남에게마저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춤조차 추지 못하는 도희에게 다가가 영남은 말한다. “나하고 갈래?”
    <도희야>의 마지막에 이제는 영남에게마저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춤조차 추지 못하는 도희에게 다가가 영남은 말한다. “나하고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