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y Shelley’s The Last Man: Hospitability at the end of History

메리 셸리의『최후의 인간』─역사 끝에 선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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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decades after the French Revolution witnessed the prolific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apocalyptic literature, tinged with the optimistic vision of political progress and human perfectibility. However, the Romantic writers were cautious to embrace the idea of the end of history, even though it promised an aesthetic space relieved of historical determinants. Mary Shelley’s The Last Man joined this line of Romantic literature which skeptically questions the millenarian desires of political apocalypse by representing apocalypse without millenium. Using the theme of apocalypse as a tool to investigate the place of human beings in the universe and to test diverse political reform ideas to their fullest potential, the novel diagnoses the ideas of representative political subject as the most problematic aspect of political structure. The notion of subjecthood presupposes a political decision as to who can be counted as subject and this decision, according to the novel, assumed a subject that is“ active, free, conscious and willful sovereign,”which Raymond embodies in his exemplary body. Against the sovereignty of Raymond is juxtaposed the subaltern subject such as Sybil. The resistance of Sybil to Apollo, another exemplary subject, is the subtext of the novel, which guides the way out of the grim future of humanity. While the plague exemplifies the universalizing ideal with its principle of sovereignty, Sybil and her descendent Lionel practice the unconditional hospitality so that they can renew the community in a way to embrace singularities of individuals.


  • KEYWORD

    hospitality , apocalypse , principle of sovereignty subject , democratic principle , singularities

  • I. 들어가며

    낭만주의시대에 프랑스혁명을 이해하기위한 인식의 틀로 예언적이면서 묵시론적인 문화 담론이 폭발적으로 등장한 것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해왔던 바이다.1 구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한 혁명적 세력과 그런 식의 과거청산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보수적 세력 간의 팸플렛 전쟁은 묵시 담론의 진보적 성격을 규정하였다. 즉 낭만주의 시대의 묵시 담론은 상당 부분 이성의 힘과 인류의 진화를 믿으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계몽주의적 믿음, 즉 오류투성이의 과거의 역사를 지우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는 낙관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묵시 담론과 낭만주의 문학과의 관계는, 따라서 낭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처럼 내적인 균열과 긴장관계를 지닌다. 즉 프랑스혁명의 묵시론적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소위 낭만주의 1세대 시인들도 현존 질서의 끝을 꿈꾸는 순간에도 그 꿈이 지니는 완고한 불투명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가장 묵시론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는 블레이크(William Blake) 도, 최후의 심판을 거쳐 도달하는 예루살렘을 역사적 공간인 런던을 초월하는 역사의 종말 혹은 완성으로 본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묵시론적 초월주의를 극복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으로 본다(Goldsmith 138). 따라서 골드스미스가 의문을 제기하였던 것처럼, 낭만주의 시인들의 묵시론적인 성향이 과연 예루살렘이라는 탈역사적 공간을 지향하는 것(“building Jerusalem”)인지, 아니면 지양하는 것인가(“unbuilding Jerusalem”)라는 질문은 유의미하다.

    메리 셸리의『최후의 인간』에도 바로 이러한 묵시론적 주제에 대한 낭만주의 시인들의 복합적인 태도, 특히 2세대 낭만주의 시인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회의주의적 성향─예를 들면 바이런(Lord Byron)의 「암흑」(“Darkness”)혹은 셸리(Percy Shelley)의 「삶의 개선 행렬」(‘The Triumph of Life’) 에서 드러나는 비관적 전망─이 드러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셸리를 남성 낭만주의 시인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읽는 방식은 셸리와 남성 낭만주의 시인들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여성주의의 한 독법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멜러(Anne Mellor)는v『최후의 인간』이 남성 낭만주의 시인들의 낭만적 상상력과 남성중심의 정치/사회 개혁에 내재한 “유토피아주의”(utopianism)를 적극적으로 해체한다고 주장한다(Mary Shelley, 159-60). 또한 애런(Jane Aaron)은 이 작품이 여성에게 수동성을 강요하던 당대의 젠더 이데올로기의 억압성에 대한 여성작가의 독특한 투쟁으로 읽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최후의 인간』의 비관적 전망, 즉 새천년이 없는 인류의 멸망이라는 소재 속에서 남성적이라 규정된 역사와 사회적 비전에 대한 비판을 읽는다.

    그런데 여성으로서의 셸리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들의 주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셸리가 살았던 낭만기의 다양한 정치 사회 담론들 간의 입체적 차이들을 지움으로써, 결과적으로 셸리의 작품과 다른 묵시론적 작품들과의 섬세한 차이를 밝혀내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셸리가 아버지와 남편의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였다는 멜러의 주장을 예를 들어보자. 과연 고드윈과 셸리(Percy Shelley)가 유토피아주의라는 헐거운 용어로 함께 묶일 수 있으며, 또 이 두 사람이 당시의 “남성적” 개혁운동을 대표하는가? 다시 말하자면, 고드윈과 퍼시 셸리의 차이를, 그리고 그들과 다른 개혁가들과의 차이를 남성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잠식하는 태도가 과연 셸리의 여성으로서의 차이를 드러내는 효과적 방식이 될 수 있는가? 또한 이를 작품 읽기에 적용해 보자면, 사실 『최후의 인간』의 반유토피아주의나 회의주의는 당시에 유행했던 최후의 인간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 캠벨(Thomas Campbell), 후드(Thomas Hood), 바이런등과 같이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에 의해 쓰여진 작품들도 결국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2 이러한 질문들은『최후의 인간』이 새천년의 구원의 가능성이 차단된 종말 의 비전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를 남성적 세계를 비판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낭만주의에 대한 오독이자, 작품에 대한 단순화임을 드러낸다. 만일 이 작품이 멜러의 주장처럼 여성적인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 차별성은 멜러가 거칠게 주장하는 반 낭만주의니, 반유토피아주의니, 회의주의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섬세한 읽기, 그리고 이 작품과 다른 묵시론적 작품들과의 세밀한 차이를 분석해 내는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최후의 인간』이 계몽주의의 보편성, 특히 개개인의 개체성(singularity)과 이질성(heterogeneity)을 넘어서는 어떤 본질주의적 혹은 보편적 주체를 정치 혹은 사회적 연대의 기본 전제로 내세우는 태도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고 본다. 이 전범적 주체는 계몽주의자의 주장처럼 자연권 사상에 입각해 개인의 자율성을 견지하는 자유주의적 주체일 수도 있고, 주류 낭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덕성을 가진 감성적 주체일 수도 있다. 이들은 자율적인 근대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그것이 이성이든 감성이든 간에─에 정초하여, 보편적 시민공동체의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남성 낭만주의 시인들 역시 비록 자유주의적 주체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끝까지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당부분 본질주의적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인간』은 보편적 대변자를 공동체의 기본 개념으로 내세웠을 때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억압, 즉 리오넷(Francoise Lionnet)이 주장하듯이,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신 말해줘야하는 존재들을 타자화하는”(simultaneous othering of those who had to be spoken for because they were said not to possess reason, 5) 과정에 대한 섬세한 비판을 한다. 셸리에게 있어 바로 이 지점이 당시의 정치 사회 개혁 시도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맹점이 되며 진정한 의미의 민주적 질서를 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 입장을 데리다가 『우정의 정치학』(The Politics of Friendship)에서 국가주의, 애국주의, 인종중심주의등과 같은 보편주의의 핵심적 전략으로 본 “표본적 논리” (exemplarist logic 237)를 비판하는 부분과 연결해 보면 그 정치성이 명확해 질듯하다. “표본적 논리”는 “형제애중심주의”(fraternocentrism 239)의 핵심으로 여성에 대한 배제를 경유하는 보편성을 추구하는데, 이 논리에 대해서 『또 다른 진로』(The Other Heading)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보편성은 인간의 본질을 대변하는 특권적 위치에 놓여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특수성이 보편성의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자신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화된 특수성은 이제 하나의 표본이 되어 다른 특수성들을, 혹은 이질적 타자들을 자신의 모습으로 흡수하고 스스로를 성문화한다. 이 과정이 필연적으로 극단적 배타성을 배태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최후의 인간』은 바로 “표본적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정치적 공동체의 배타적 폭력성을 비판하고 이 논리 너머에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인류의 종 말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즉 보편성이 하나의 특수성을 특권화하거나 표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메리 셸리가 이 소설을 통해 제시하는 공동체는 이질적인 타자들이 지닌 특수성 혹은 개체성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조우하는 형태, 다시 한번 데리다의 용어를 빌자면 “환대”(hospitality)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최후의 인간』은 그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대안적 정치원리를 제시하면서 공동체의 쇄신을 기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삼대 정신에서 형제애가 재정의되어야 자유와 평등의 민주적 원리가 실현될 수 있음을, 형제애 중심적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자매들의 목소리로 강변하고 있다.

    1W. H. Oliver의 Prophets and Millennialists, Jon Mee의 Dangerous Enthusiasm, 그리고 Morton D. Paley의 Apocalypse and Millenium in English Romantic Poetry 등 참조.  2당시의 최후의 인간에 관련된 작품들의 간략한 소개는 골드스미스의『예루살렘 지양하기』(Unbuilding Jerusalem) 265-68쪽 참조.

    II. 시빌의 예언―유령적 주체, 유령의 공동체

    『최후의 인간』은 역사와 예언의 혼종적 지점에 위치한다. 작가의 서문에 의하면 두 명의 친구들이 1818년 나폴리(Naples)에서 시빌의 동굴을 우연히 발견했으며, 동굴에는 고대어와 영어, 이태리어등 혼종적 언어로 쓰여진 시빌의 예언이 순서와 구성이 뒤죽박죽인 채로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도 미래에 대한 예언과 최근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나열, 이름들, 애도서 등등과 같이 다양한 장르가 혼종되어있다. 이러한 무질서한 기록에서, 작가와 그의 친구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발췌, 각색(adaptation), 번역(translation)하여 현재의 서사 구조를 구성해 내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시빌의 예언이자 아직 현재가 되지 않은 미래를 살아온 화자의 과거를 담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복잡하게 엮어내는 서문은,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소설의 근원적 목소리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구성하는 다양한 목소리 속에서 가장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목소리는 아마 시빌의 목소리일 것이다. 시빌은 이 작품과의 연관성을 넘어서 여성주의비평가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산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잔 구바(Susan Gubar)는 시빌이 상실되었으나 회복 가능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빌의 문서를 발견한 작품의 화자는 여성 해독자이자 시빌의 후계자가 되며 동굴은 여성 작가의 원천적 경험의 세계가 된다(98). 더 나아가 이 작품의 가지는 언어의 혼종성과 파편성은 여성의 욕구, 즉 남성과 같은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여성의 욕망이 언어화될 때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결과이다.

    그러나 이처럼 『최후의 인간』을 여성의 원초적 경험의 기록으로 읽는 독법은 작품을 읽는 실제의 경험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특히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작품 내의 여성의 욕망은‘원초’적 형태라기보다는 오히려 왜곡되어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바바라 존슨(Barbara Johnson)은 프랑켄슈타인에서 여성 괴물의 부재와v『최후의 인간』에서 여성 화자의 부재를 예로 들면서, 메리 셸리가 여성의 경험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The Last Man”). 또한 푸비(Mary Poovey)는 셸리가 여성을 이상화하는 감성주의 이데올로기에 연루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녀가 여성의 자율성에 대한 욕망을 사춘기 소녀의 욕망처 럼 미성숙한 욕망으로 치부하는 등, 여성적 자율성에 대한 일종의 죄의식에 사로잡혀있었음을 추적한다(46). 이 점은 작품 속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진 아이드리스(Idris)가 남성적 시선으로 이상화된 여성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점, 또한 남성적 세계에 관여하려는 여성인 윈저 공작 부인과 에바드니(Evadne)는 “부자연”스러운, 괴물적 모습을 보인다는 점 등과 중첩되면서 과연 이 작품이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경험을 재현해 내는가에 대해 의심을 하도록 한다.

    이러한 의심은 시빌의 목소리를 남성적 언어의 지배를 받지 않은 여성의 원초적 경험을 재현하는 새로운 목소리로 단순화 시킬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언자로서의 역할은 자기 안의 경험을 재현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언의 근원이 되는 신의 목소리, 시빌의 경우는 아폴로 즉 남성의 언어를 투명하게 재현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이다. 따라서 예언가로서의 시빌은 사회적 역할상 남성의 언어의 투명한 대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빌에게는 예언자로서의 기능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으니, 그것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아폴로와의 결혼을 거부했다는, 즉 남성의 욕망과 다른 자신의 욕망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모래알만큼의 나이만큼 늙어가면서 살아야하는 형벌을 받는다. 즉 시빌의 정체성은 문화와 사회이전의 순수한 여성의 경험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이미 남성적 질서 속에 고정된 역할을 부여받은 여성, 그리고 그 질서가 자신의 욕망에 가하는 억압의 실체를 자신의 육체에 그려내는, 자신의 욕망이 자신을 파괴하는 모순을 몸으로 체험하는 비극적 존재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즉 이러한 독법에 의하면 여성이라고해서 상징적 질서 밖을 경험할 수 있는 특권적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구조 밖을 꿈 꿀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이 있다면, 이 특권은 여성이라는 본질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상징질서에 처해있는 위치, 즉 여성이 질서에 구속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저항하는 양면성을 그 육체의 경험으로 그러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시빌이 작품의 중요한 상징이 된다는 여성주의비평가들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그녀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의 측면에서는 그들과 거리를 둔다. 아폴로의 질서과 시빌과의 관계는, 단순히 통제와 저항의 측면이 아니라 통제와 저항이 이미 어떠한 적대의 관계망 속에 관련되어 있음을 통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복합적인 관계야 말로 『최후의 인간』이 묵시론적 낭만주의 작품과 가지는 관계이자 여성-상징질서로부터 소외된 존재들을 대변하는 의미로서의 여성─이 낭만주의 사회 정치 개혁 담론과 가지는 관계의 제유가 된다. 이런 점에서 골드스미스가 시빌의 이야기가 이 작품의 거의 모든 부분을 구조화 한다는 것은 유의미한 주장일 것이다.3 이렇게 본다면 시빌의 신화에서 가장 집중해야 할 부분은 그녀가 태양의 신 아폴로의 욕망을 거스르고, 자신의 욕망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아폴로가 탐했던 시빌의 육체가 조금씩 소멸되는 형벌을 받는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늙어서 작아진 시빌은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않으며, 조롱에 갇힌 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이는 시빌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위치까지 박탈당했다는, 즉 누가 인간에 포함되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도 권력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 작품이 표본적인 인간 주체를 세우고, 이를 보편화시키는 공동체의 법을 쟁점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아폴로가 아닌 시빌의 목소리로 쓰여진다는 것은, 이 소설이 인간 공동체의 구성원리의 가장 핵심인 법과 권리의 기원을 사유하며 그 너머를 표상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셸리가 그리는 2073년에 영국이 세습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변화하였다는 사실은, 군주제를 복원하려는 원저 공작부인과 레이몬드의 야망을 배경으로 놓았을 때는 분명한 정치적 진보이다. 그러나 류(Joseph W. Lew)가 지적하듯이 공화제도 나름의 한계를 지닌다. 류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공화제의 형태를 “기한제 군주제”(short-term monarchy 274)라고 칭하는데, 즉 호민관의 임기가 5년으로 제한된 것을 제외하고는 호민관의 특권이 왕의 특권과 그리 다를 바가 없고, 특권계층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이 정치체제의 문제점은 그것이 호민관의 인격을 전범적인 주체의 모습으로 승격시킴으로서 보편화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이다. 에드리안은 호민관과 국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국가의 주권은 호민관인 레이몬드 개인의 주권과 동일시되는데, 즉 호민관의 판단은 국가의 판단이며, 그의 보호는 국가의 보호가 된다. 그의 시간과 야망이 국가에 속해있는 것처럼 동시에 국가도 그의 판단과 보호에 속해있다. 레이몬드의 특수성과 국가의 보편성은 여기서 하나로 흡수된다. 이는 대의민주주의에서처럼 호민관이 시민을 대변한다는 차원 보다 한발 더 나아가 호민관이 국가와 동일시되는 과정, 즉 국민으로 간주될 수 있는 정치적 주체의 모습을 대변하는 과정을 시사한다 하겠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우정의 정치학』(Politics of Friendship)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민주주의가 실현하는 국민의 의지란 “능동적이고 자유로우면서 의식적이고 의지강인하며 통치 적인”(active, free, conscious and willful, sovereign xi) 존재의 의지라 정의한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이러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국민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민주주의의 수량적 투표제의 한계를 “민주주의는 센다, 투표를 세고 주체를 센다, 그러나 개별성은 세지 않고 세어서도 안된다”(Democracy counts, it counts votes and subjects, but it does not count, should not count, ordinary singularities. x)고 지적하는 것이다. 수량적으로 셀 수 없는 존재들, 즉 시빌과 같이 인간으로 속하지 않는 인간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공동체의 의지 형성 과정 속에 포함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 의사결정과정이 필연적으로 특수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자아의 수량적 합에 의한 것이라면 그 과정은 필연적 배제와 한계가 개입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21세기 영국의 공화정의 문제점은 바로 호민관이 대표하는 주체를 보편적 정치주체로 일반화하려는 시도이며, 이 태도는 시민들의 개별적 차이를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시민들은 자신의 의지가 없이 “오류 없는 규칙”(faultless rules)에 의해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이는 사회의 질서 속에 산다. 그들의 개별적 의지는 레이몬드의 보편화된 의지(beneficial will)와 동일시되며, 이러한 사회의 규칙에 대한 저항은 ‘악’(evil direction)이자 무질서(disorder)로 규정된다. 이 시대의 문화적 가치를 초월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레이몬드는 시민들을 동등한 위치, 즉 사회의 메카니즘 속에서 동일화 될 수 있고 수량화 될 수 있는 존재로 축소한다. 그들은 법칙을 따르기만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는 사회, 레이몬드라는 인간에 정초되어있는 동일화의 사회를 살고 있다. 이는 레이몬드가 당시 서양 문명의 본류로 인식되었던 그리스의 영웅이라는 점과 서양 철학(특히 그리스 철학)에서 자기 동일성의 은유로 사용되었던 태양과 지속적으로 비교되는 점 등과 더불어, 그가 일탈과 방황을 금지하고 고유한 자기현시의 원리를 전 세계에 투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4

    그러나 레이몬드 그 자신도 이 동일화의 세계를 뒤흔드는, 계산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자신이 명징한 대낮의 세계, 즉 ‘현실’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레이몬드의 지적은 태양으로 동일시되는 레이몬드로서는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대낮의 세계에 의해 현실화를 이루지 못하는 ‘꿈’의 세계에 사랑, 명예, 즐거움, 그리고 우정등과 같은 유의미한 삶의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대낮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이는 레이몬드가 살아가는 규칙과 규범, 가치 명령의 동일화의 세계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현실과 꿈을 구별하는데, 오히려 꿈이라 규정된 세계가 보다 가치있는 세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태양으로 상징되는 계몽의 이미지, 혹은 해방의 이미지가 어쩌면 진정한 계몽도 해방도 아니라는 회의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현실의 세계는 그다지 견고하게 자신을 꿈이라 는 비현실의 영역으로 지켜내지 못하는데, 이는 꿈으로 분류된 요소가 자주 현실에 출몰하고 있으며, 레이몬드는 그것을 유령이라는 비실체로 환원시켜 자신의 세계를 방어할 뿐이다. 따라서 이 유령의 존재는 결국 태양의 세계가 그 빛으로 우리를 눈멀게 함으로써 보지 못하게 하는 세계이자, 그럼에도 그 빛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계인 것이다. 꿈과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배제와 포함의 원리는 서문의 시빌과 아폴로의 관계를 다시 한번 연상시키면서, 레이몬드/ 아폴로의 태양의 세계가 감추는 세계가 바로 시빌의 유령적 정체성일 것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 작품은 바로 태양의 빛에 의해 사각지대에 놓여진 유령의 공동체, 즉 시빌이 자신의 몸으로 그려내었던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움직인다. 이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 논의하겠지만, 이 세계가 법과 질서를 벗어나 자신의 개체적 욕망을 추구했던 시빌의 쪼그라든 몸을 수용할 수 있는 공동체임은 확실할 듯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류 멸종의 위기에 처한 라이오넬과 아이드리스는 자신의 죽음 뒤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새로운 존재는 공상 과학 소설에서 그러하듯이 인간과 다른 종─외계인들─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당시의 주체구성의 원칙이 되었던 자아 중심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가진, 새로운 관계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태양의 신 아폴로의 빛나는 지성에 동화되기를 거부했던 시빌의 목소리로 구성된 이 소설은 바로 동일화의 원리를 내세우는 영국의 정치공동체를 차이의 윤리로 해체하는 과정을 형상화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골드스미스는 이 작품이 라이오넬 길들이기의 과정으로 읽으며, 라이오넬이 에드리안의 목소리를 이 작품에서 재현하는 과정과 문명화된 영국이 야만의 세계를 정복하는 제국주의적 과정의 유비관계에 주목한다. 그리고 시빌을 남성적 상징계로의 진입 이전의 여성의 본원적 몸의 경험을 재현하는 존재로 읽는 여성주의 독법을 전면으로 뒤집어, 골드스미스는 시빌이 남성적 이데올로기를 수동적으로 재현해야하는 운명을 지닌 존재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본 논문이 시빌과 아폴로의 관계, 작품 내의 라이오넬과 에드리안의 관계, 그리고 현실에서 메리 셸리와 퍼시 셸리의 관계를 골드스미스처럼 단순한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골드스미스와 차이가 있다.  4개념 혹은 철학의 명사중심주의와 연결하여 태양중심주의를 해체적으로 읽는 방식은 데리다의 “White Mythology: Metaphor in the Text of Philosophy.” 참조.

    III. 전염병―절대적 타자와 환대의 문제

    인류 종말의 원인이 되는 전염병의 시작은 레이몬드가 봉쇄되어있던 콘스탄티노플의 방위막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과 겹쳐진다. 레이몬드가 이끌고 있는 그리스와 터어키의 전쟁은 낭만주의시대에 특히 1821년 그리스 독립운동의 배경속에서 필연적으로 셸리(Percy Shelley)의 『헬라스』(“Hellas”)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 독립운동을 강력히 지지하던 셸리가 이 작품의 서문에서 “지금은 억압받는 자들이 억압하는 자들을 맞서 싸우는 시기”라고 선언한 것은 유명하다. 즉 『헬라스』는 종교와 자유, 고전주의 가치를 확보하려는 그리스인의 노력과 터어키의 이교도적, 전제주의적 특징을 대립시켜 그리스의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셸리의 시도였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셸리(Mary Shelley)는 그리스와 터어키의 유사성을 강조한다.5 터헨의 주장처럼 이는 셸리가 터어키과 그리스의 전쟁을 ‘문명과 야만’(110)의 충돌로 보기 보다는 문명과 문명 속의 야만과의 충돌, 나와 내 안의 야만성과의 조우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전제적이고 폭력적인 터어키 군주의 특징들이 이미 태양으로 동일화된 레이몬드에게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터어키와 그리스의 전쟁은, 동일화의 핵심에 서 있는 레이몬드가 칼을 들고 문을 향해 서서병사들에게 “진격하여 소유하라”(139)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적 가치가 폭력적으로 동양의 타자성을 침범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레이몬드가 이 도시에 들어가는 순간 폭발음과 함께 화염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레이몬드가 아폴로의 힘을 꿈꾸는 파에톤과 같이 자기가 통제하지 못하는 태양에 빛에 의한 아이러니컬한 죽음을 경험함을 암시한다. 태양이 상징하는 이성, 자유, 민주주의, 문명 등과 같은 이상들이 바로 레이몬드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전 세계로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한다는 점은 이러한 동일화의 폭력성에 대한 증인이 된다.

    스테렌버그(Lee Strerrenburg) 등과 같은 평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좌절시키는 전염병이 왕정, 공화정, 대중 민주주의, 종교 정치 등과 같은 다양한 정치적제도의 쇄신 가능성에 대한 회의를 표현한다고 본다. 사실 레이몬드의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에드리안의 공동체의식에 기초한 일종의 덕치정치, 그리고 라이란드의 자유경제 중심의 민주주의 등을 비롯한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다양한 정치 실험들이 전염병 앞에서 무력화된다는 점은 사회 개혁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어쩌면 소설의 비극적 결말은 그 어떠한 공동체도 개별성을 지우는“표본적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비관적 전망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공존의 삶이 결과적으로 타인을 수치화 할 수밖에 없다면, 수치화 될 수 없는 개별성의 편에 선 셸리에게 억압 없는 공동체란 불가능한 개념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세계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전염병은 동시에 공동체를 쇄신하는 원리가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작품에서는 전염병이 모든 이들을 성별, 연령, 국적, 인종 등의 차이 없이 획일적으로, 즉 수치화 할 수 있는 존재들로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생존자들은 더욱더 서로 서로를 그 독특한 개체성으로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대륙에서 창궐한 전염병으로 인해 외국인들이 영국으로 몰려올 때, 영국인들은 국가적 차이를 넘어서 외국인을 환대하는 일종의 코스모폴리탄적 공동체의 모습을 보인다. 영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해 야기된 생필품 품귀사태와 빈곤층의 확산을, 특권계층의 자발적인 희생 즉 사유지 기증과 사치물품 소비 억제 등을 통해 극복하려한다. 이 태도는 칸트의 『영구적 평화』에서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으로 정의된 이방인에 대한 환대 보다 급진적이라 하겠다. 칸트는 환대를 윤리적 공동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외국인 개인의 권리의 문제, 즉 다른 나라에 갔을때 적대 받지 않을 권리로 정의한다(329). 즉 칸트에 의하면 인류는 지구공동 소유권이라는 권리가 있는데, 인류는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고, 따라서 그 누구도 한 지역에 특권적 점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국인들은 그들이 방문한 지역의 질서와 평화유지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그 지역에서 적대시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또한 칸트는 이 권리가 방문권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지 거주권은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거주는 또 다른 계약(pact)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가 내세운 환대의 조건과 비교해 볼 때, 역병을 피해 영국에 도착한 외국인들은 방문이 아니라 거주의 목적이 강하고 동시에 평화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조건을 위반하고 영국에 궁핍과 무질서를 야기시킨다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영국인은 이들을 환대하는데, 이것은 칸트식의 조건부 환대를, 즉 권리로서의 환대를 넘어서는 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영국인들의 환대를 개인적인 권리의 확대로서의 칸트식 환대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계약 당사자들의 권리와 지위를 넘어서는 절대적 환대 개념과 함께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칸트의 이방인은 절대적으로 배척되고 이질적인 야만인/미개인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를 조건부 환대라 부른다. 조건부 환대는 환대 관계를 가능하게도 동시에 환대관계를 제한하고 금지하기도 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이방인과 절대적 타자를 구분하면서 전자에는 환대를 후자에는 적대를 표현하는 것이 조건부 환대의 특징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부 환대에 반하여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를, 즉 자신의 집을 이방인(이름을 가진, 사회적 위상을 가진 이들)에게만 아니라 이름 없는 절대적 타자에게도 개방할 것을, 그러면서도 그에게 상호성을 요구하지도 말 것을, 권리로서의 법 또는 정의와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Hospitality 25).

    외국인에 대한 영국인의 태도에 암시되어 있었던 무조건적 환대의 모습은 최후의 인간인 라이오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라이오넬은 전염병에 직접적으로 감염된 유일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기적적으로 전염병으로부터 회복되어 일종의 면역을 가지게 된 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감염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라이오넬이 영국 제국주의적 억압에 대한 죄 값을 그 직접적 피해자인 흑인에 의해 치르게 되었다는 입장(Lew 276)과 면역력의 획득에 초점을 맞추어 타자를 인식하려 하지 않고 끌어안으려고 할 때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성립될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Mellor, “Introduction” xxiv). 본 논문은 이 대립적 입장을 어느 한쪽으로 해소하기 보다는 이 두 입장을 동시에 포괄함으로써, 이 장면이 무조건적 환대가 지니는 이중적 움직임, 통상적 의미의 환대와 단절되었기에 환대와 적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움직임을 표상한다고 본다.

    라이오넬과 흑인이 대면하는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장면이 서사구조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한다. 이 흑인은 피난을 가기 위해 라이오넬의 집에 결집한 영국의 생존자 중 한명이다. 에드리안과 라이오넬이 런던의 생존자를 찾으러 외출한 사이 라이오넬의 큰아들 알프레드는 전염병에 감염되며 불안에 떠는 아이드리스는 남편과 오빠를 찾으러 나간다. 그 사이 라이오넬과 에드리안은 양부모를 잃은 고아 소녀를 구한다. 이 장면에서 암시되는 이방인 고아소녀와 친자식인 알프레드와의 치환 가능성─가족 대신에 이방인을 선택하는 무조건적 환대의 절대적 증여가능성─은 이방인을 환대했을 때 당할 수 있는 불행의 모습을 보여준다. 데리다에 의하면 조건부 환대는 손님과 기생자를 분리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나의 내-집을, 나의 자기성(ipseity)을 나의 환대 권한을 주인이라는 지상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무조건적 환대는 자기성과 지상권을 공고히 해주는 손님뿐만이 아니라 자기성과 지상권을 훼손하는 절대적 타자에 대한 환대를 포함하기에, 자신의 가정과 자기 주체의 동일성을 희생될 위험에 처한다. 이처럼 알프레드 대신 고아소녀를 선택하는 서사 구조는, 라이오넬의 집 내부에서 흑인과 알프레드와의 치환관계로 이어진다. 집에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감지한 라이오넬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들어섰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이 바로 흑인의 포옹과 키스였다.

    라이오넬의 가장 큰 욕구는─그가 아무리 타자를 향해 열려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가족, 자기 집, 자기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흑인이 라이오넬의 가장 큰 욕구를 좌절시키며 그가 가족과 대면하는 순간을 지연시킨다. 즉, 흑인은 라이오넬에게 (조건부) 환대의 법들을 전복시키면서 가족을 향한 것보다 더 친밀한 (무조건적)환대를 자신에게 베풀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결코 환대의 주체(주인)의 자유의지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환대의 대상(손님)의 강압적 폭력에 의해 이루어지며, 주체는 이 과정에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즉 도망가려는 라이오넬의 생명에 자신의 죽음의 숨결을 침투시키는 이 음험한 손님은 주인인 라이오넬의 위치를 폭력적으로 전복시켜 그의 인질로 삼는다. 죽어가는 흑인의 강압적인 포옹과 키스를 피하려고 애를 썼던 라이오넬이 곧이어 죽은 알프레드에게 포옹과 키스를 한다는 것은 라이오넬이 자기 의사에 반하여 알프레드가 아닌 흑인의 임종을 지켰음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무조건적 환대가 요구하는 자기 동일성의 희생, 자신의 주권을 아무런 보답 없이 포기하는 과정이 단순히 주체가 더 많은 타자를 무한히 포용 하고자하는 의지의 산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무조건적 환대는 그 포용의 한계, 주체적 의지의 파열 지점까지 주체를 끌고 나가, 결국 주체가 주체일 수 없게 만드는 원리인 것이다.

    국가와 인간의 주권(sovereignty)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의 환대의 법을 뒤집는 이 경험은 배제의 원리인 “표본적 논리”로 구성되는 공동체를 뒤집는 새로운 공동체의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이오넬의 자기성과 지상권을 뒤흔드는 이 타자와의 접촉에 대해 공포와 혐오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공포스러운 경험이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제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동일성을 벗어나, 절대적 타자와 대면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폭력적이지만,─그래서 데리다는 주인이 손님의 인질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셸리는 그 접촉의 순간 에 환대의 한계,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라이오넬은 이 경험으로 인해 자아 동일성을 넘어서는 인류의 절대적 타자라 할 수 있는 시빌의 언어를 계승하게 된다. 이 사실은 그가 자신을 로빈슨 크루소와 대조하는 장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루소가 『에밀』에서 근대 개인주의의 원형으로 본 로빈슨 크루소는 28년간 무인도에서 군주로 군림하면서 자율적이고 자기 충족적 삶을 산다. 크루소에게 결핍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자원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지, 타인과의 관계의 부재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짐(Firdous Azim)이 주장하듯이 크루소는 통일적 근대 주체의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타 주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에 몰두한다. 즉 크루소는 스스로를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타자들과의 이항대립적 구도를 성립하고 타자를 길들이거나(프라이데이의 경우) 배척한다(야만인의 경 우). 아마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타인의 발자국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공포와 불안감이야말로 이러한 이항대입적 주체화 구도를 시사하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오넬은 바로 크루소가 타인에게 느끼는 불안감을 꼭 집어내어서 그 부분이 자신과 크루소의 차이라 지적한다.

    이 인용문에서는 라이오넬은 타인을 적대적으로 주체화 과정에 흡수하려는 로빈슨 크루소와 대조적으로 무조건적인 환대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여기에 드러나는 “인간적 공감”은 전염병 경험 이전의 라이오넬의 특징적 성격이었던 “사회적 감정과 공감과”의 차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의 공감은 그룹의 사람들에게 각각 합당한 자리를 그리고 모든 감정에는 적절한 조화를 부여하는 것을 그 기능으로 한다. 즉 공감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고착화하는 권력 구도를 무화하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역할, 기존의 질서와 차별을 보다 확고히 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힘에 다름아니다. 이는 크루소가 자신의 식민지인 무인도에서 배척해야하는 식인종인 타자와 자기의 식민 주민으로 포용할 수 있는 프라이데이를 구분하는 과정과 다를바 없다. 크루소는 프라이데이는 호감가는 외모와 온순한 성격 등을 이유로 바람직한 타자로 규정하게 그에게 자신의 종이라는 합당한 자리를 부여한다(206). 프라이데이에 대한 ‘환대’가 “야만인”에 대한 적대와 연결되어 있음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적 공감”은 사회가 규정한 합당한 자리와 조화를 뒤흔들면서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존재들, 그래서 우리가 공감해서는 안되는 서문에 나타난 시빌과 같은, 혹은 죽어가는 아들을 만나지 못하는 흑인과 같은 존재들을 향한다. 그 개체성이 표본적 주체의 모습과 너무 동떨어져서 나와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조차 없는 그 존재들을 고통스럽게 끌어안는 것이 “인간적 공감”의 특징이기에 라이오넬은 또 다른 프라이데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식인종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 공감과 사회적 공감의 차이는 조건부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의 차이처럼, 기존의 권리와 법 안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것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가의 차이이다.

    5터한(Filiz Turhan)은 『다른 제국』 (The Other Empire)에서 대영제국의 식민지 확장을 정당화하는 담론에서 영국 정부의 타락상을 비판하기 위한 담론까지 다양한 방식의 글에서 터어키와 오스만제국이 전제국가의 상징으로 빈번히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IV. 결론을 대신하여―시작이 되는 끝

    왕정, 공화정, 대중적 민주주의 등이 통일적 주체를 정치적 주체로 내세우는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통찰은 무조건적 환대의 법을 실천하는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이 가능성이 손님이든 기생자이든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환대이든 적대이든 그 누구에게도 실천 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서 비로소 드러난다는 점은 이 가능성이 과연 진정한 가능성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것은 오히려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만 인종적 문화적 차별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 즉 무조 건적 환대의 불가능성에 대한 역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성급한 결론으로 치닫기 전에 우리는 작품의 독특한 시간성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의 서문에서 명시 되었듯이 이 소설의 기초가 된 1818년 나폴리의 동굴에서 발견한 문서는 2099년의 유일한 생존자가 2073년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쓴 기록이었다. 즉 현실의 미래는 문서 속에는 이미 과거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독특한 역전에 대해서 로맥스(William Lomax)는 이 작품이 직선적 시간관을 의도적으로 훼손함으로써 기독교적 목적론과 철학적 거리를 두기 위한 전략이라고 지적한다(8). 그 결과 시작과 종말로 이루어진 역사관이 아닌, 나선형을 그리며 회전하는 종결되지 않는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간관은 알렌(Graham Allen)이 강조한 내러티브의 역전과도 연결된다. 알렌에 의하면 작품 속의 캐릭터들은 사건들을 역사적 필연으로 경험하지만, 독자의 경우는 작품의 사건 속에서 독자 당대의 문제를 중첩해서 읽게되며, 그 결과 작품 속의 필연을 역사적 상대성으로 경험 하게 된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올브라이트는 필연적으로 종국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내러티브 속에 사실은 에드리안의 광기와 기적적 회복, 레이몬드의 실종과 기적적 복귀, 라이오넬의 감염과 기적적 회복 등과 같은 무수한 역전과 반복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가역성’(reversibility) 속에서 우리는 작품의 비극성을 극복할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목적론과 결합된 직선적 시간관과 인본주의적 관점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전염병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결말의 긍정적 읽기는 더욱 확실해 진다.

    멜로와 애런(Jane Aaron) 등과 같은 여성주의 평자들은 전염병을 억압받은 여성의 분노로, 류나 비월(Bewell)같은 탈식민주의 평자들은 전염병을 착취받는 식민지의 보복으로 읽는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처럼 전염병을 보편에 의해 억압받았던 이들의 반격으로 보기에는 전염병이 바로 그 보편의 성격을 극대화하는 측면이 있다는 모순이 있다. 존슨이 주장하듯이 작품에서 유일한 보편성은 전염병 밖에 없는데(World, 33), 이는 전염병과 연결되어 “보편적 감염”(universal visitation), “보편적 비참”(universal misery)등과 같이 “보편적인”(universal)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사용되는 것에도 드러난다. 모든 차이를 지우는 “위대한 평등 주의자”(the mighty leveller 307) 인 전염병은 개체적 차이를 지우고 “투표수를 세고 주체를 세는”수량적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표상하고 있는 듯하다. 데리다는 개체성을 가진 개인 간의 평등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 간의 평등만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문제점(equality for all becomes the objective or quantifiable equality of roles, not of persons, Politics 36)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위대한 평등주의자 전염병이 인간 간의 차이를 지우고 익명적으로 인간들을 흡수할 때 라이오넬이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그들의 개체성을 지탱하고 있음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개체성의 기록으로서의 『최후의 인간』은 수량화된 인간 너머 교환 불가능한 자아의 고유성(authenticity of irreplaceable self, 36)을 지키기 위한 시도이고, 보편적 주체 생산의 전 세계적 팽창의 상징인 전염병에 대한 효과적 저항이 된다. 그것이 라이오넬이 두려워했던 독자의 부재─내 글을 누가 읽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이오넬 그 자신도 “죽음은 죽음이 아니며, 인간은 멸종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의 지각에 종속되지 않은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Death is not death and humanity is not extinct but merely passed into other shapes, unsubjected to our perceptions. 301)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우리의 지각에 종속되지 않은”존재들은 현재의 법의 권한, 권리, 의무에 종속되지 않은, 그러기에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주체들이다. 아마 이들이 라이오넬의 독자가 되지 않을까? 그들도 그들만의 “반쯤 발가벗은 흑인”(negro half-clad)의 포옹과 키스를 공포와 기대감으로 기다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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