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언어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상력

Speech of Trees and Imagination of the Union of Self and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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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topic of ‘trees’ is indispensible for cultivating ecological ideas and sensibility. Trees are not only subjects of life but also esthetical objects to human in themselves. They can be used as personifications of the respectable lives and symbols of existential mysteries and cosmic secrets. Especially, in the mythical context, the cosmic tree has been considered a secret device connecting heaven, earth, and human. Since the modern age, as the human centered development has advanced, the mythical characteristic of trees has been faded away considerably. Nevertheless, the literature has shown the tendency of restoring its ecological energy through the imagination of trees. and reflecting on the ordeal of the modern civilization through the secret of ecological mythology. Lee Chung-jun’s fictions such as “A Bird and a Tree”, “An Old Pine Tree”, “Conversation with a Great Old Tree” are the results of narrative efforts assessing the availability of myths through the speech of trees and the imagination of forests, which has lost since the modern age.

    The tree in “A Bird and a Tree” is a typical one of many cosmic trees appearing in Lee Chung-jun’s fictions, which circulate water, soil and air within heaven and earth vertically and let birds dance with its leaves and fruits horizontally. This is the tree’s life. These cosmic trees have composed the sacred forest where all beings can feel peaceful and happy experiencing ‘the union of self and things’. In “Sleeping on a Tree”, the longing for achieving the harmony between a tree and self and the anxiety for losing it are articulated as important themes. In “An Old Pine Tree” the dream of the harmony between a tree and self is still maintained but the anxiety shown in Lee Chung-jun’s former fictions has been reduced. Instead, this fiction pays attention to the contrast between the constancy of a great tree and the transience of human life. The idea of trees expressed in “An Old Pine Tree” is similar to the common-sense of average men’s.

    In “Conversation with a Great Old Tree” the author presents his regret at the former common-sense view. In “Conversation with a Great Old Tree”, the story that delivers a tree’s profound saying about life and redemption, the tree says that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rees and humans in view of the providence of the great universe. While taking place the conversation between an old tree cosmic tree and a man, simultaneity and sympatry which the tree has emphasized are focused on. The tree emphasizes that “being in the same time and place with yours while existing in the different time and place in the different dimensions and in the different ways, in other words, being in the world with two spaces existing simultaneously” is the essence of the cosmos and the way of existence of all beings’. Lee Chung-jun placed emphasis on the principle of simultaneity and sympatry in reference to the philosophy of ‘the union of self and things’ regarded in the East as important since Lao-tzu and Chuang-Tzu. We can identify Lee Chung-jun’s characteristic in his fictions using ‘trees’ as main topics in which he tried to find the cosmic providence of ‘the union of self and things’ through the speech of trees.

  • KEYWORD

    물아일체(物我一體) , 나무의 말 , 우주목(宇宙木) , 동시성(同時性) , 동소성(同所性) , 이청준 , 「 새와 나무」 , 「 노송」 , 「 노거목과의 대화」 , 「 나무 위에서 잠자기」

  • 1. 자연의 속삭임과 나무의 언어

    생태학적 사유 혹은 생태학적 감수성을 도야하는데 ‘나무’ 제재는 매우 요긴해 보인다. 나무는 “위대한 삶의 표상일 수도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신비와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어떤 근원적 존재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1) 있기 때문이다. 에밀 뒤르켕Emile Durkheim은 나무의 상징화가 외적 물질적 기호로 관념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2) 그의 연구에 따르면, 호주 원주민들은 토템에 대한 관념을 형상화하려는 욕망으로 토템을 조각하거나 문신으로 새기거나 그림으로 그렸다. ‘사고를 물질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에 주목하면서 뒤르켕은 자신의 사회 이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 외적표현, 형상화, 육체성(물질성)의 타당성을 고찰하게 되었으며, “집단적 감각은 특정한 실체적 사물에 고정되어야만 드러날 수 있다.”3)고 언급했다. 이런 뒤르켕을 통하여 로라 라이벌Laura Rival은 이렇게 논의한다. “물질적 형식들의 물리적 표명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과 관련해 물질적 형식에 대한 고찰 및 사회의 물질적 구성에 이론적 초점을 두는 것은 매우 생산적임이 입증되었다.”4) 세계미술사를 장식한 수많은 나무 그림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무와 교감하고, 나무의 말을 들으며, 나무를 따라 온갖 가능성의 우주를 감각할 수 있던 시절은 행복했다. 그렇다는 것은 나무의 신화성이나 상징성과 관련된다. 나무의 신화를 연구한 자크 브로스는 이렇게 적었다.

    이러한 우주목cosmic tree은 대지의 한가운데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비로운 사다리였다. 사람들은 우주목에 의탁하여 신탁을 받기도 했고, 그 우주목에서 뿜어내는 마법의 수액으로 디오니소스적인 축제를 벌이거나, 성스러운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그 우주목들은 신성한 숲을 형성하여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에덴동산에서 나무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무 신화나 상징들은 우리로 하여금 나무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무와 교감하면서 의미를 나누고 나무의 언어로부터 상징적인 생태 학습을 하기도 했다.

    예컨대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그런 신화적 맥락에서의 나무와 십분 교감했던 작가였다. 그는 집을 옮길 때마다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에 밀짚모자를 쓴 헤세는 정원에서 토마토 가지도 묶어주고 해바라기에 물도 주었다. 싱그러운 함박 웃음으로 포도를 수확하기도 했다. 적어도 헤세에게 있어서, 정원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몸을 맡길 수 있는 자연의 리듬이었다. 혼란스럽고 고통에 찬 시대에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안식처였다. 정원 일을 하면서 자연과 인생의 비의를 성찰했던 헤세는 이렇게 쓴다. “얼마 안 가서 우중충한 쓰레기와 죽음을 뚫고 새싹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썩어 분해되었던 것들은 그렇게, 새롭고 아름다우며 다채로운 모습으로 힘차게 다시 되살아난다. 이러한 자연의 순환은 단순하고 명징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깊은 생각에 빠뜨리며, 모든 종교는 예감에 가득 차 경배하듯 거창하게 그 의미를 해석해 낸다. ⋯(중략)⋯ 지난해의 죽음에서 양분을 얻어 소생하지 않는 여름은 없다. 모든 식물은 흙에서 자라나올 때 그러했듯, 역시 묵묵하고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간다.”6) 이런 질서정연한 자연의 순환을 헤세는 내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땅 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이런 순환 원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성한다. 무정부적 소유 의지를 지닌 인간 행태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이런 헤세이기에 그의 에세이 「나무」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두루 인용되는 다음 대목을 보기로 하자.

    헤세가 성찰한 고독한 사람은 품격 높은 자기세계를 추구하는 존재들 이다. 그러기에 “위대한 고독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숲에서 더불어 혹은 홀로 끊임없는 위험 속에서도 강인하고 옹골차게 자라는 나무를 전범 삼아 자기세계를 도야하려 했던 헤세는 나무의 신화성을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대 문명의 파격적 전개 이후 그것은 점차로 쉽지 않게 된다. 가령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1967)에 이르면 사정은 매우 달라진다. 작가 스스로 “무관심의 수사학적 장소들, 무관심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8)이라고 말했던 이 작품에서 주인공 ‘너’는 그야말로 무관심이라는 현대성의 주제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자연이 여기 있어 너를 초대 하고 또 너를 사랑한다.”는 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시집 『시적 명상』(1820) 중 「골짜기들 」의 구절을 차용하면서도, “풍경은 네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들과 밭의 평화는 너에게 감동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시골의 침묵은 너를 자극하지도 않고 너를 차분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9)고 적는다. 그런 ‘너’는 가끔씩 곤충이나, 돌멩이, 낙엽, 나무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가끔씩 너는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고, 그 나무를 묘사하고, 그 나무를 해부하면서 몇 시간을 머문다: 뿌리, 둥치, 가지, 잎사귀, 잎 하나하나, 잎맥 하나하나, 새로 난 줄기 하나하나를, 네탐욕스러운 시선이 갈망하거나 촉발하는 무관심한 형태들의 무한한 놀이라고나 할까: 얼굴, 도시, 미로 혹은 길, 문장(紋章)들과 기마행렬 같은 것들.”10) 실제로 보기에 따라서 “나무는 초록색의 수천 가지 뉘앙스, 그러니까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수천 개의 나뭇잎들을 뿜어내고 되살려”11) 낼 수 있는 존재이지만, 『잠자는 남자』는 그저 무(관)심하게 나무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면 이런 상태가 된다. “그 나무에 대해 네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결국, 그것이 한 그루의 나무라는 사실일 뿐; 그 나무가 네게 말해주는 모든 것은, 한 그루의 나무라는, 뿌리라 는, 그 다음은 둥치라는, 그 다음은 가지들이라는, 그 다음은 나뭇잎들이라는 사실일 뿐. 너는 나무에게서 다른 사실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무는 네게 제안할 어떤 도덕도 갖고 있지 않으며, 네게 전달할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12) 그러기에 “나무의 힘, 나무의 장엄함, 나무의 삶” 따위도 그 주인공에게는 무관심의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 “의미화를 위한 어떤 자리도 찾아 볼 수 없”13)게 된다. 이쯤 되면 조르주 페렉의 나무는 헤르만 헤세의 나무와 사뭇 다른 것임을, 아니 나무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다른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헤세에게 나무는 삶의 한 전범이었고,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핵심 매개였다면, 페렉의 경우 나무는 그저 무심한 나무일 따름이다. 인간 또한 무심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무관심의 수사학을 인상적으로 펼치고 있는 텍스트여서 나무 심상이 전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에서 보이는 나무는 더 이상 신화적인 상징을 보여주거나 언어적 상징물일 수 없다. 인공 문명의 물결이 무차별적으로 스미고 짜일 때 인간과 사물은 자연스런 존재방식과 관계로부터 벗어나, 피차 무관심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럴 때 신화적 맥락에서 나무의 수액은 메마를 수 있고, 신성한 숲의 정령의 언어들은 고갈 될 수 있다. 문학은 그런 상황을 거슬러서 부단히 나무의 마법의 수액을 빨아들이고, 숲의 정령의 언어들과 대화하면서 인류의 ‘오래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추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 논문에서는 이청준의 「새와 나무」, 「노송」, 「목수의 집」, 「노거목과의 대화」 등에 형상화된 나무의 상상력을 특히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상력이라는 측면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전통에서 보인 물아일체 논의를 간략히 살펴본 다음, 작가 이청준이 소설을 통해 ‘물아일체에의 꿈’을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그 과정에서 나무의 상상력의 특성은 무엇인지를 고찰함으로써, 이청준 소설의 핵심적 특성을 밝힘은 물론, 한국 현대문학이 형상화한 나무의 생태 학의 한 국면을 성찰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오생근, 「시인과 나무」, 『문학과사회』 107호(2014년 가을호), 문학과지성사, 2014, 530쪽.  2)Emile Durkheim, The Elementary Forms of the Religious Life, London: Allen & Unwin, 1915/1976, p. 127.  3)Ibid., p. 236.  4)Laura Rival, "Trees, from Symbols of Life and Regeneration to Political Artefacts", edited by Laura Rival, The Social Life of Trees, Oxford/NY.: Berg, 1998, p. 2.  5)자크 브로스, 주향은 옮김, 『나무의 신화』, 이학사, 1998/2007, 13쪽.  6)헤르만 헤세, 「즐거운 정원」, 『정원일의 즐거움』, 두행숙 옮김, 이레, 2001, 16쪽.  7)헤르만 헤세, 송지연 옮김, 「나무」, 『나무들』, 민음사, 2000, 9-10쪽.  8)Georges Perec, “Pouvoirs et limites du romancier français contemporan,” in Parcours Perec(colloque de Londre mars 1988), Lyon: Presses Universitaires de Lyon, 1990, p. 30. 여기서는 조재룡, 「반수면 상태의 ‘너’가 뿜어내는 위대한 무관심: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 한국어 번역에 부쳐」, 조르주 페렉, 조재룡 옮김, 『잠자는 남자』, 문학동네, 2013, 139쪽에서 재인용함.  9)조르주 페렉, 조재룡 옮김, 『잠자는 남자』, 35쪽.  10)앞의 책, 35-36쪽.  11)앞의 책, 36쪽.  12)앞의 책, 36쪽.  13)로베르 뒤마, 송혁석 옮김, 『나무의 철학』, 동문선, 2004, 106쪽.

    2. 물아일체(物我一體)와 열린 마음

    사물과 인간, 세계와 자아, 객관과 주관이 험악하게 분열되지 않고 혼연일체를 이룬 경지를 동양에서는 이른바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 불러 왔다. 이 물아일체론은 노장과 유가의 경우 입장이 약간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도는 경계가 없다.”(夫道未始有封)고 생각하는 노장의 경우, 물아일체는 가장 높은 경지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노자에 따르면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14) 이게 우주의 기원이다. 여기서 ‘무’에서 ‘유’로의 변화, 즉 ‘형체와 속성이 없는 것으로부터 형체와 속성이 있는 것으로’의 변화가 주목된다. 그처럼 “노자는 ‘무’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의 근원은 ‘무’이며, ‘무’의 근원은 다시 ‘없음의 없음’이고, 다시 ‘없음의 없음의 없음’, ‘없음의 없음의 없음의 없음’⋯⋯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로부터 무궁한 시간과 공간의 체계가 열린다.”15) 무궁한 시간과 공간의 체계 속에서 헤아리면 대부분은 상대적인 의미만을 확보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차별적인 눈으로 볼 때, 만물이 크다는 일면만으로 그것이 크다고 여긴다면 크지 않은 것이 없으며, 만물이 작다는 일면만으로 그것이 작다고 여긴다면 작지 않은 것이 없다.”16)고 언급했던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인식의 제한성으로부터, 사물의 상대성을 설명하고,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사물의 속성에 차별을 두는 것을 반대”17)한다. 그래서 “천지는 나와 병존하고, 만물은 나와 하나가 된다”18)고 말한다. 이런 장자의 물아일체의 경지에 대해 중국 철학자 진고응(陳鼓應)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이런 물아일체의 사례로 널리 알려진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릴 수 있다. 『장자』의 「제물론」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장자가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니다가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되어 있었다.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좀처럼 구분할 수 없었다.20) 이렇게 장주와 나비, 피아(彼我), 물(物)의 시비(是非) ‧ 선악(善惡) ‧ 미추(美醜) ‧ 빈부(貧富) ‧ 화복(禍福) 등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만물은 결국 하나의 세계로 귀결되고,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된다고 장자는 생각했다. “도는 경계가 없다.”(夫道未始有封)고 도가에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인간 삶에서는 그 ‘경계’로 인해 온갖 분별이나 차별들이 생겨나고 시비가 일어난다. 파벌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틀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러면 분별 없고 경계 없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접근하기 어렵다. 그렇다는 것은 인간이 정신적 자유를 향유하기 어렵다는 말과 통한다. 이에 장자는 “열린 마음을 기르는 것이 최선의 대책”21)이라고 말하는데, 이때 “열린 마음은 ‘자연의 곳간’[天府]처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포용”한다. 장자가 ‘보광’(葆光)이라고 불렀던 이와 같은 마음 상태는, “마음을 텅 비우고 통달을 이루도록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도량을 한 곳에 모으는 것”22)을 말한다.

    이런 도가의 사유와 비슷하면서도 유가에서는 주체의 의지적 요소를 더 강조하는 것 같다. 실학시기 양명학자였던 정제두(鄭齊斗)의 『霞谷集』을 따라 유가의 물아일체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용』에 이르기를,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만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다면 능히 사람의 성(性)도 다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면 능히 물(物)의 성(性)도 다할 수 있는 것이며, 물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면 천지가 화육(化育)되는 것도 도울 수 있는 것이며,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면 천지와 같이 참여[參]할 수 있는 것이라.”[『중용』 22장]고 하였다. 주자는 이르기를, “사람이나 물(物)의 성(性)은 또한 나의 성(性)인 것이니, 다만 받은 바의 형기(形氣)가 같지 않기 때문에 다름[異]이 있는 것이라.”[『중용』 22장 주]고 하였다.23) 도가의 경우 ‘무’(無)가 근원이었는데, 유가에서는 ‘성’(性)이 근원이다. 장자(張子 장횡거(張橫渠)를 말함)에 따르면, “성 (性)이란 것은 만물의 한 근원이요, 내가 사사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오직 대인(大人)이라야만 능히 그 도(道)를 다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설[立]려면 반드시 함께 서는 것이고, 알려면 반드시 두루 알아야 하는 것이며, 사랑하려면 겸하여 사랑[兼愛]하는 것이고 이루려면 홀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니, 저들이 스스로 물욕(物欲)에 가리우고 막히어서[蔽 塞] 나의 이(理)에 순응할 줄을 모른다면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24)[『정몽』(正蒙) 권1』 성명편(誠明篇)]이다. 집의(集義) 맹자는 이르기를, “만물(萬物)이란 모두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25), 내 몸에 돌이켜서 성(誠)으로 한다면 즐거움이 이보다 클 수가 없는 것이고, 서(恕 나를 미루어서 남에게 미치는 것)를 힘써 행한다면 인(仁)을 구하는 것이 이보다 가까울 수가 없는 것이라.”26)[『맹자』 진심편 상]고 하였다. 이에 맹자는 ‘마음을 다하면 성(性)도 알고, 하늘도 안다.’(盡心則知性知天以此)며 ‘인’(仁)을 강조했다. 마음을 다해 인을 실천하면 “하늘의 밝음이 너의 나들이에 미치고, 하늘의 아침 햇볕이 너의 노는 데를 비친다는 것이니, 한 물건에도 체(軆)하지 않는 것이 없는”27)[『시경 』 생민편(生民篇)의 주]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유가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유가의 맥락에서 퇴계 이황은 “개개 사물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사물의 뒤편에 있는 보편적 추상성에 대한 방향성 있고 지속적인 반응, 오랜 동안의 수양에 의한 정서적 일치감”28)으로서 물아일체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이렇게 퇴계는 단지 경물(景物)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물의 理와 자아의 理를 알고, 그 둘이 궁극적으로 하나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30) 둘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것인데, “그것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자연과 나를 합일시켜주는 것은 그것이 ‘活 理’이기 때문”31)이다. 퇴계의 산수시에서 보이는 수정(守靜)과 관조(觀 照)의 모습32)은 물아일체의 심연의 풍경이기도 하다. 퇴계의 산수시에 나타난 물아일체의 논리를 검토한 신연우에 따르면, 철학적으로 독특한 퇴계의 주장인 이발설(理發說)은 “논리상 이가 발할 수 있는가” 라는 반론에 직면할 수 있지만, “물과 아가 만날 수 있다는 이발설은 물아일체를 구현하기 위한 시적 발상으로 보면 크게 공감가는 면”33)이 있다고 한다.

    14)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老子』 40章.  15)陳鼓應, 최진석 옮김, 『老莊新論』, 소나무, 1997, 248-249쪽.  16)以差觀之因其所大而大之則萬物莫不大. 因其所小而小之則萬物莫不小. 『莊子』 「秋水」.  17)陳鼓應, 앞의 책, 249쪽.  18)天地與我幷生萬物與我爲一. 『莊子』 「齊物論」  19)陳鼓應, 앞의 책, 250쪽.  20)이 호접지몽의 물아일체 경지에 대해서는 이미 백과사전 류에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 별개의 것이건만 그 구별이 애매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사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구별,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라는 경지,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다만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이처럼 피아(彼我)의 구별을 잊는 것,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해 호접지몽이라 한다.”(『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9011&cid=40942&categoryId=32972)  21)陳鼓應, 앞의 책, 251쪽.  22)앞의 책, 251쪽.  23)中庸曰惟天下至誠。爲能盡其性。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朱子曰人物之性。亦我之性。但以所賦形氣不同而有異耳。(<物我一性>, 「經學集錄」, 『霞谷集卷十七』(한국문집총간 160권 452쪽.))  24)張子曰性者萬物之一源。非有我之得私也。惟大人爲能盡其道。是故立必俱立。知必周知。愛必兼愛。成不獨成。彼自蔽塞而不知順吾理者。則亦末如之何矣。(<物我一性>, 「經學集錄」, 『霞谷集卷十七』(한국문집총간 160권 452쪽.))  25)만물(萬物)이란 ⋯⋯ 있는 것이니: 맹자의 이 말은 송유(宋儒)의 만물 일체설(萬物一體說)이 되었고, 양명도 이 대목을 인용하여 “夫萬事萬物之理, 不外於吾心, 而必曰窮天下之理, 是殆以吾心之良知爲未足, 而必外求於天下之廣⋯⋯”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주자의 격물설을 반박하는 입론의 바탕이었다. (『전습록』)  26)集義孟子曰萬物皆備於我矣。反身而誠。樂莫大焉。强恕而行。求仁莫近焉。(<物我一性>, 「經學集錄」, 『霞谷集卷十七』(한국문집총간 160권 452쪽.))  27)昊天曰明。及爾出王。昊天曰旦。及爾游衍。無一物之不體。(<物我一性>, 「經學集錄」, 『霞谷集卷十七』(한국문집총간 160권 452쪽.))  28)신연우, 「이황 산수시의 양상과 물아일체의 논리」 , 『한국사상과 문화』 20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03, 59쪽.  29)이황, 『도산전서』3, 권 53, 「答權童仲丙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127쪽. 여기서는 신연우, 앞의 논문, 60쪽에서 재인용함.  30)신연우, 앞의 논문, 61쪽.  31)신연우, 앞의 논문 63쪽. ‘活理’에 대해서는 최진덕, 「퇴계성리학의 자연도덕주의적 해설」, 김형효 외, 『퇴계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164쪽 참조.  32)심경호, 「퇴계의 수정과 관조자연」, 김형효 외, 앞의 책, 347-416쪽 참조.  33)신연우, 앞의 논문, 66쪽.

    3. 이청준 소설에 나타난 나무의 상상력

       3-1. 이청준의 우주목과 ‘보광’(?光)의 역학

    이청준의 ‘南道 사람’ 연작의 하나인 「새와 나무」는 이미 그 표제의 비유부터 의미가 각별하다. 이는 작가 자신이 산문을 통하여 나름대로 해석을 해놓은 것이기도 하다. 나무는 “혼자서 수분을 빨아들이고 햇빛을 취하여 줄기를 키우고 잎을 펼치며 열매를 맺는” 자족적인 실체이다. 나무 잎들이 무성해지면 새들이 찾아들고 아름다운 노래가 깃들어진다. “높고 울창한 나무 가지 속에 갖가지 새들이 날아들어 그 낭자한 노래 소리로 하여 나무와 새가 하나의 삶으로 어우러져 합창을 하는 그런 사랑의 나무”, 바로 그것이 이청준이 소설로 꿈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힘찬 생명과 삶의 나무, 혹은 자유와 사랑의 빛의 나무”34)라고 한다. 얼핏 보기에도 『莊子』의 「齊物論」에 나오는 天籟 즉 하늘의 퉁소 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즉 온갖 소리들을 나름의 조화 속에 잠기게 하는 자연의 절대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따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러한 혹은 모든 조화를 자연의 절대 속에서 차지하는 그런 모습이다. 이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저절로 조화를 획득하여 어울리는 그런 합창이다. 새와 나무에 관한 이청준의 꿈, 혹은 이청준의 합창은 그런 경지를 동경한 것처럼 보인다.35)

    「새와 나무」는 소리(판소리)를 찾아 남도를 순례하던 한 나그네가 외딴 산골에서 우연히 ‘나무’와도 같은 사내를 만나 ‘빗새’ 이야기를 듣는 이야기다. 정처 없이 남도를 떠돌던 나그네가 폐원과도 같은 과수원 비슷한 수림에서 한 사내를 발견하는데, 그가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였다.”고 서술자는 적는다. 「새와 나무」는 소설 초입에서 “나무처럼 보였”던 사내가 끝부분에서는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있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과정의 사연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장면에서 서술자는 “나무들 사이에 서” 있는 “그 사내”를 초점화 한다. 그는 나무들 사이에 있을 뿐만 아니라 나무들의 겨울나기를 위해 짚옷을 싸입히다가 하늘을 쳐다보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나무들 사이에 인접해 있던 그는 나무를 위해 일하면서 나무에 더 가까이 겹쳐지게 되고, 마침내 나무처럼 보였다는 것은 세 가지 맥락에서 성찰의 세목을 제공한다. 첫째, 나무와 사내의 교감과 어울림 혹은 물아일체의 측면이다. 둘째,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통해 나무처럼 보였다고 한 대목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목의 상징성을 떠올릴 수 있다. 셋째, 그런 우주목과도 같은 나무-사내를 수정(守靜) 관조(觀照)하는 서술자의 태도와 그 풍경과 물아일체를 이루려는 서술자의 열린 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런 세 맥락은 이 소설을 읽는 데 역동적인 기대지평을 형성할 수 있다.

    ‘보광’(葆光)같은 열린 마음은 나무처럼 보였던 사내에게서 먼저 현시 되면서 상호 교환되는 양상을 보인다. 나그네를 마치 아는 사람을 부르듯 손짓하여 부르고, 나그네도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사내에게 다가간다. 사내는 나그네를 청해 정겹게 저녁을 대접하고 잠자리까지 제공한다. 밤늦은 시간까지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때 이야기의 교환은 곧 열린 마음의 교환이다. 그럴수록 사내와 나무 사이의 물아일체는 심화된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나무를 심고 나무와 더불어 사는 열린 마음이다. 사내의 형이, 가정 형편상 소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도회지로 떠나간 후, 어머니는 빗새[雨鳥] 이야기를 하면서 집 앞에 작은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어 정성껏 돌본다. 빗새는 봄부터 가을까지 비가 오는 날에만 구슬프게 울어댄다는 (허구적인) 새다. 비가 와도제 몸 하나 깃들일 둥지마저 없는 새이기에 날씨가 궂으면 그렇게 젖은 몸을 쉴 의지를 찾아 빗속을 울며 헤매 다닌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런 빗새 이야기를 하면서 잎과 가지가 무성한 동백나무를 심은 것은, 일차 적으로는 빗새에게 의지처를 제공하려는 마음이겠으나, 다른 측면에서는집 나간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성공하지 못한 아들이 집에 돌아와 크게 자란 그 동백나무를 보면서 ‘나무’와도 같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다. “긴 세월 허구한 날 어느 골목을 헤매고 다녔더냐. 바람 차고 어두운 밤인들 어느 한데다 의지를 삼았더냐.”는 어머니의 말에 남루한 귀향자는 “바깥 세상을 나가 보면 엄니 같이 자식을 일찍 객지로 내보내고 사는 노인네들을 자주 만날 수가 있어서요. 그런 분들의 인정으로 제가 이렇게 다시 무사하게 돌아온 걸요.”38) 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돌아온 형은 몇 년간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듯 집 주변에 과수를 비롯한 나무를 심으며 수림을 일군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다시 집을 떠나고 만다. 이제 어머니가 없는 자리에, 측은한 빗새를 위해 ‘나무’를 심는 역할을 동생(사내)이 떠맡는다. 사내는 그렇게 나무를 심으며 빗새와도 같은 형을 어머니를 대신해 기다린다.

    빗새와도 같은 형을 기다리던 사내는 어느 날 그 수림을 찾아든 시인을 만나게 된다. 도시 생활에 지친 시인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자신의 지친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는 공간과 마주치게 된다. 노을이 질 무렵까지 한 나절을 그 자리에서 망연히 앉아 있던 시인 이, 사내에게는 빗새의 형상으로 보였음은 물론이다. 하여 그를 도와주기로 한다. 시인은 우선 땅만이라도 산 다음에 돈이 더 생기면 둥지를 틀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내는 밭주인과 협의하여 계약금도 없는 계약을 성사시킨 다음, 집 자리를 제외하고 나무를 심어준다. 그러나 시인은 결국 돈을 마련하지 못해, 그 땅에 둥지를 틀지 못한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에 죽었다는 시인을 위해, 사내는 못 이룬 양택(陽宅) 대신에 음택(陰宅)이라도 그 땅에 마련해주고 싶어 했지만, 이미 화장하여 강물에 뿌려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여전히 나무를 심으며 빗새들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나그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그네는 사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무로 보였던 사연에 대해 깨우치게 된다. “그는 한 마리 빗속의 새였고 주인 사내는 숲속의 나무였다. 그리하여 새는 나무를 보았고 나무는 다시 새를 본 것이었다. 낯모른 집을 따라 들어와서도 그토록 마음이 편해진 것 역시 거기에 곡절이 있었던 것 같았다.”39) 어머니와 동백나무, 어머니와 아들, 아들과 동백나무, 사내와 어머니, 사내와 나무, 사내와 시인, 사내와 나그네, 나무와 새 등 모든 관계는 서로 보광의 열린 마음으로 스미고 짜여 있다. 특히 나무와 인간, 나무와 새 사이의 물아일체의 경지는 극진하다. 교감과 나눔, 조화와 상생을 통해 물아일체의 순기능을 극대화한다. 어머니의 나무도 그렇고 사내의 나무도 일종의 우주목(宇宙木)이다. 수직적으로는 땅과 하늘, 물과 흙과 공기를 순환시키고, 수평적으로는 새로 하여금 자신의 잎과 열매와 더불어 춤추게 한다. 그것이 나무의 삶이다. 그런 나무들이 신성한 숲을 이룬다. 그 숲에서 모든 존재들은 신비롭고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 그 숲에서 소리와 사람은 혼연일체의 경지에 들기 쉽다. 보광의 열린 마음으로 물아일체의 경지에 들 수 있다. 이것은 작가 이청준이 나무와 함께 꿈꾸려 했던 물아 일체에의 꿈의 단적 모습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충만한 것이면서도 텅 빈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사내는 끊임없이 소리를 찾아 떠도는 나그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집터를 찾든 소리를 찾든 그야 노형 좋으실 대로 할 일이겠소마는, 글씨 내 보기로는 노형이 바로 그 소릿가락 같은디⋯⋯ 자기 잔등에다 소리를 짊어지고 어디로 또 소리를 찾아댕긴다는 것인지⋯⋯”40) 사내가 보기에 나그네(주체)의 탐색 대상인 소리는 곧 나그네 안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주체와 대상 사이의 물아일체의 형상이다. 그럼에도 주체는 “자기 잔등에다 소리를 짊어지고 어디로 또 소리를 찾아” 떠난다. 자기 안에 소리가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도는 텅 빈 것이 지만 그것의 작용은 꽉 참이 없이 무궁하다”41)고 한 ‘道沖而不盈’의 세계를 생각한다면 사내와 나무의 관계, 나그네와 소리의 관계는 ‘텅 빈충만’의 역학 속에서 부단히 도를 보광하려는 마음과 통한다. 또 “만물이 잘 자라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인도하려하지 않고, 잘 살게 해주고도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으며, 무엇을 하되 자신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룬 공 위에 자리잡지 않는다.”42)고 했던 노자의 ‘功成而弗居’의 세계와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런 동력으로 인해 물아일체의 꿈은 더욱 심화된 지평으로 탄력성을 얻는다. 그러면서 우주목의 신화성도 거듭 탐문된다.

       3-2. 나무와의 물아일체(物我一體)에의 꿈

    「나무 위에서 잠자기」(1968)에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 팽나무 위에 올라가 잠을 자는 사람들의 풍경과 그것을 보고 주인공도 그리 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하고 도회지로 떠나왔다는 삽화가 담겨 있다. 주인공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커다란 팽나무 그늘로 찾아와 오수를 즐기거나 잡담을 하곤 했다. “팽나무는 한 5미터 높이에서 가지들이 수평으로 갈라져 나갔는데, 그 가지 하나가 유난히 넓게 벌어져 사람 하나가 몸을 눕힐 만한 자리가” 되어 “그곳에는 항상 누군가가 편하게 올라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43) 어린 주인공은 그것을 보면서 늘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영락없이 나무 아래로 떨어질 텐데 어쩌면 저렇게 태평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궁금해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그 가지 위에서 잠을 잘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를 가지게 된다. 주인 공이 조심해서 그 넓은 가지의 잠자리로 다가가 보니 과연 꼭 한 사람의 몸을 눕힐 만한 공간이 되었다. 하여 슬그머니 몸을 뉘어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주 편하게 잠자는 것처럼 보였는데, 막상 올라가보니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 “조마조마하고 불안해서 그대론 여간 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정신만 더 말짱해 왔다. 오히려 잠이 들어버릴까 봐 겁만 났다. 잠이 들고 나면 영락없이 거기서 굴러 떨어지고말 것만 같았다. 나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다시 나무를 내려오고 말았다.”44)

    이 삽화에서 우리는 작가 이청준이 상상했던 나무와의 물아일체의 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인간이 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잠이 든다는 것은, 마치 울창한 나무 가지에 새가 모여들 듯이, 나무와 일체가 된 경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 주인공이 나무 위에서 잠자기를 욕망한 것은 곧그런 자연 상태에서의 물아일치의 꿈을 동경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인공적인 문명이 전개될수록 그 꿈은 막막한 것이 되고, 그럴수록 불안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이 삽화는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물아일치의 꿈은 훗날, 앞서 살펴 본, 「새와 나무」에서 그 원형적인 모습으로 형상 화된다.

    시골 출신 작가인 이청준은 도시로 나와 생활하면서도 늘 시골의 자연 상태, 고향에서의 삶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많은 논자들이 언급했듯이 도시와 시골의 길항관계는 이청준 소설의 핵심적인 축의 하나이다. 이 때 고향적인 것, 시골에서의 자연 상태에 대한 동경은 종종 나무와 물아일체의 꿈으로 변주된다. 「큰 나무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수필에서 이청준은 불변하는 큰 나무의 은혜와 축복을 예찬하면서, 상대적인 인심의 유전(流轉)에 대한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어릴 적소풍 갔던 섬에 가서 여전히 변하지 않고 “긴긴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이토록 자기 삶의 터를 올연히 지켜가기도 하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큰 나무는 그런 뜻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고마운 은혜요, 보이지 않는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래 마을에 그런 거목을 정자나무나 당산목으로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아직 그런 고향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사람 들은 그 거목의 은혜와 축복에(그것을 심은 조상들의 지혜까지도) 스스로 감사하고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할 것이리라.”45) 이 경험을 소설화한 것이 「노송」(1981)이다. 섬에 오른 주인공은 “어마어마하게 큰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울립해 있”는 풍경에 감탄한다. “그 소나무들은 옛날 소풍 때 그대로 우람스럽게 둥치를 버티고 서서 먼 창공의 바람기로 우우우 영겁의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간 세월이 더하고 덜함이 없었다. 흐르는 세월 따라 시들고 꺾임도 없었고, 병들고 늙음도 없는 것 같았다.”46) 요컨대 “그 압도적인 생명의 웅자”에 경탄해 마지않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큰 나무들 역시 우주목의 형상이다. 하늘을 향해 ‘영겁의 노래’를 연주하는 큰 나무들은 영원한 생명처럼 하늘과 땅의 기운을 연결한다. 그런 나무 기운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동화되고 일체가 된다. 동행했던 집안 형님의 나무 아래서 잠자기는 자연 상태에서의 편안한 휴식과 몽상을 뜻한다. 굳이 나무 위에서 잠자기가 아니라도 그쯤 되면 물아일체의 경지라 할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물아 일체의 과정이다. 「노송」에서 오래된 큰 나무는 변함없이 영원한 존재, 항상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인간은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의 입장에서 영겁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나무의 미덕을 닮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그 아래서 편안하게 잠자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무와 물아일체가 될 때, 어린 시절 지녔던 나무와 물아일체가 되지 못해 불안해했던 증상은 줄어들 수 있다.

       3-3. 동시성(同時性)과 동소성(同所性): 우주목의 언어와 생명의 섭리

    그런데 나무/인간을 영원/찰라, 항상성(恒常性)/무상성의 대립으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반성하면서 작가 이청준은 더 큰 생명의 섭리 안에서 현묘한 나무의 말을 듣는다. 「노거 목과의 대화」(1984)는 표제가 이미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노거목이 들려주는 말을 서술자가 전해주는 형식의 소설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보면 다양한 나무 신화들에서 나무 (정령)과 대화하는 풍경이 그려 지고 있는데,48) 이 소설에서 노거목은 우주 삼라만상의 섭리를 설파하면서 인간 중심의 비좁은 상식적 견해들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다.

    강남구 삼성동의 삼릉(三陵) 일대에 수림 지대에 수령 300여 년을 헤아리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거목이긴 하지만 인간들에 의해 훼손되기도 해 “참연하면서도 외경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면 서도 “해마다 봄이 되면 그 위쪽의 둥치에서 새 가지와 무성한 잎들을 쏟아 내놓는 것이 무슨 생명력의 합창이나 절규와도 같은 우렁찬 무엇을 느끼게 하곤”49) 하였다. 그 거목으로부터 주인공은 우연히 “생명과 구원에 관한 유현(幽玄)한 나무의 이야기를”50) 듣게 된다. 주인공은 “생 명의 무한성”을 지닌 나무에 비해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절망스럽다고 말한다. “저의 일회적인 생명은 이렇게 병고 속에 해마다 영육이 쇠진해 가고 있습니다. 그 유한성이 당신 앞에 저를 이토록 절망케 하곤 합니다.”51) 이에 나무는 주인공에게 “무한성과 유한성”으로 나무와 인간을 대립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단순한 비교의 결과라며, “절대적 진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를 다시 살펴보아라. 해마다 잎이 다시 피고 생명의 성하(盛夏)를 맞아 어우러질 뿐, 그 계절을 되풀이 살아갈 뿐, 내게도 생명은 일회적인 것일 뿐이다. 내가 어찌 무한의 생명력을 지녔더냐, 그리고 너만이 그 유한의 생명을 지녔더냐. 너의 생명이 유한하고 나의 그것이 무한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다만 네가 그것을 자신과 비교해 보는 때문일 뿐이다. 나 역시 하나의 생명을 일회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나는 너희 인간들보다 몇 개의 세월을 더 사는 것뿐이다.”52) 즉 절대적 진실의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보면, 혹은 장자의 맥락에서 무궁한 시간과 공간의 체계로 보면, 나무와 인간의 생명 원리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명의 본질,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을 터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주 만상의 본질의 실상”은 무엇인가?

    일단 나무는 도가의 흔적을 따라 도(道)나 무(無)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없음, 없음의 없음, 없음의 없음의 없음⋯⋯ 이렇게 없음의 심연을 응시하다보면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지도 모른 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나무는 동시성(同時性)과 동소성(同所性)의 담론을 통해 물아일체론에 현묘한 체계를 부여한다. 소설에서 이 대화 장면은 사람들에 의해 노거목이 이미 베어진 다음의 일이다. 즉 나무의 죽음이 이루어졌는데, 죽으면서 나무는 주인공을 위해 ‘말’을 나무 안에 남겨 놓았다. 주인공은 그 덕분에 나무의 말을 듣게 되지만, 그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듯 없는, 혹은 없는 듯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어디에 있습니까. 본질로 돌아간 당신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나무는 이렇게 답한다.

    그러니까 나무는 지금 주인공과 같은 장소에 있지 않다. 이미 죽음으로 다른 공간대에 진입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의 말을 담아 둔 나무의 몸(베어진 나무토막)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런데 나무의 그 말은 이미 과거에 담아 둔 것인데, 주인공은 현재 그것을 듣는다. 시간적으로 다른 차원,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느 순간 동시성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나무는 말한다. 그렇다는 것은 동소성의 측면에서도 비슷하게 추론할 수 있다. 「나무 위에서 잠자기」의 어린아이가 불안했던 것은 나무와 자신이 물리적으로 한 몸이 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 위에서 잠자다가 분리될 것 같은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송」에서 형님의 경우처럼 나무 아래서 잠잔다 하더라도 이 동소성의 실상을 천착하며 불안에 빠지지 않아도 좋다. 나무 위나 나무 아래나 결국 같은 장소, 즉 동소성이 구현된 지점이 되겠기 때문이다. 이런 동시성과 동소성 개념은 물아일체의 논리적 틀을 우주적으로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해 보인다. “무량겁의 시간차와 동시성, 무한 거리와 동소성”55)이 논리화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역동적 섭리 때문이자, 인간의 상상력 덕분이라고 나무는 말한다. 그렇다면 우주의 섭리와 인간 상상력의 물아일체의 경지, 그것이 인간이 꿈꿀 수 있는 현묘한 궁리(窮理)의 심연이 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삶과 이야기, 현실과 문학의 동시성과 동소성을 역동적으로 구현하며 역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작가 이청준은 「노거목과의 대화」에서 나무의 말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4)이청준, 「나무와 새에 관한 꿈」, 『서편제』, 열림원, 1998, 146~147쪽.  35)졸고, 「생태학적 무의식과 생태윤리」, 『동아연구』 59권,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2010, 197쪽.  36)이청준, 「새와 나무」(1980), 『서편제』, 열림원, 1998, 94쪽.  37)앞의 책, 145쪽.  38)앞의 책, 114쪽.  39)앞의 책, 117쪽.  40)앞의 책, 144쪽.  41)“道, 沖而用之, 或不盈,” 『道德經』 4章.  42)“萬物作焉而不始, 生而不有, 爲而不志, 功成而弗居,” 『道德經』2章  43)이청준, 「나무 위에서 잠자기」(1968), 『매잡이』, 문학과지성사, 2010, 106쪽.  44)앞의 책, 107쪽.  45)이청준, 「큰 나무들은 변하지 않는다」(1988), 『이어도』, 열림원, 1998, 140-141쪽  46)이청준, 「노송」(1981), 『이어도』, 열림원, 1998, 137쪽.  47)앞의 책, 138쪽.  48)특히 ‘나무 숭배’장을 참조할 수 있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박규태 옮김, 『황금가지』(1권), 을유문화사, 2005, 291-350쪽 참조.  49)이청준, 「노거목과의 대화」(1984), 『비화빌교』, 문학과지성사, 2013, 257쪽.  50)앞의 책, 258쪽.  51)앞의 책, 260쪽.  52)앞의 책, 261쪽. 장자는 “차별적인 눈으로 볼 때, 만물이 크다라는 일면만으로 그것이 크다라고 여긴다면 크지 않은 것이 없으며, 만물이 작다라는 일면만으로 그것이 작다가고 여긴다면 작지 않은 것이 없다.”(以差觀之因其所大而大之則萬物莫不大. 因其所小而小之則萬物莫不小. 『莊子』 「秋水」)고 논의한 바 있다.  53)앞의 책 282-283쪽.  54)앞의 책, 283쪽.  55)앞의 책, 287쪽.

    4. 맺음말

    나무는 그 자체로 생명의 주체이면서 인간에게 미학적 대상이기도 하다. 의인화하여 위대한 삶의 표상일 수도 있고, 존재의 신비와 우주적 비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신화적 맥락에서 우주목은 하늘과 땅과 인간을 연결하는 비의적 장치였다. 근대 이후 인간중심적 개발이 진행되 면서 나무의 신화적 성격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문학에서는 나무의 상상력을 통해 생태적 에너지를 회복하고, 생태학적 신화성의 비의를 통해 현대 문명의 질곡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청준의 「새와 나무」, 「노송」, 「노거목과의 대화」 등은 나무의 언어와 숲의 상상력을 통해 근대 이후 잃어버린 신화적 기미를 가늠해보려한 서사적 노력의 소산으로 보인다. 「새와 나무 」에서 나무는 이청준 소설의 대표적인 우주목이다. 수직적으로는 땅과 하늘, 물과 흙과 공기를 순환시키고, 수평적으로는 새로 하여금 자신의 잎과 열매와 더불어 춤추게 한다. 그것이 나무의 삶이다. ‘보광’(葆光)같은 열린 마음으로 우주목 과도 같은 나무-사내를 수정(守靜) 관조(觀照)하는 서술자의 태도와 그 풍경과 물아일체를 이루려는 서술자의 열린 마음이 주목된다. 「나무 위에서 잠자기」에서는 나무와의 물아일체에의 동경과 그것을 이루지 못한 불안이 전경화된다. 「노송」에서도 「나무」와의 물아일체의 꿈은 지속되지만 이전의 불안은 줄어든다. 그 대신 큰 나무의 항상성(恒常性)과 인간의 무상(無常)함 사이의 대조적 성찰을 보인다. 「노송」에서는 보통 인간 들이 나무에 대해 생각하는 상식적인 범주와 비슷하다.

    「노거목과의 대화」에서 작가는 그런 상식적 견해를 반성한다. 생명과 구원에 관한 유현(幽玄)한 나무의 말을 전하는 이야기인 「노거목과의 대화 」에서 나무는, 큰 우주의 섭리에서 보자면 나무와 인간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우주목과도 같은 나무와 인간이 섭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무가 강조하는 동시성(同時性)과 동소성(同所性)이 주목된다. “다른 시간대 다른 공간대 속의 다른 차원의 세계 속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너와 같은 시간대 같은 곳에 있음, 동시 존재의 두 공간의 세계”를 나무는 우주의 본질이요, 모든 존재들의 존재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노자와 장자 이래 동양에서 강조되었던 물아 일체의 원리에서 작가 이청준이 특별히 착목한 지점이 바로 동시성(同 時性)과 동소성(同所性)의 원리이다. 이처럼 이청준의 ‘나무’ 제재 소설들에서 우리는 나무의 언어를 통해 ‘물아일체’라는 우주의 섭리를 성찰하려 했던 작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틀지어진 관계적 사고를 넘어서 존재론적 성찰의 깊이를 더하려 했던 작가 이청준의 서사적 수고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며, 『신화를 삼킨 섬』, 『신화의 시대』 등 후기의 신화 지향의 서사 작업을 예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면 관계상 「목수의 집」, 「인문주의자 무소작씨의 종생기」 등 다른 작품들에 형상화된 나무의 언어와 물아일체의 상상력을 함께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 주제와 관련한 이청준 소설의 핵심적 문제의식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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