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시의 융합적 성격과 창의성*

Convergent Characteristics and Creativity of Eco-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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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study aims to reveal convergent characteristics and creativity of Eco-poetry. Existing studies on convergence of science and art understand nature as a subject which has an objective truth understandable through scientific methodology. It has been identified that this point of view is opposed to the world-view of art which focused on aesthetic judgement and figuration of nature. There have been some attempts recently to blur such conflictual distinction and communicate across the borderline, but there was a limit to that convergence as it was based on the existing way of thinking of science. This study is about ecological literature as science being integrative, which believes that ecology is an alternative to an inflexible definition of existing science and accordingly has been influenced by ecology. This study gives an example of the convergence of science and art, in particular, mainly with Eco-poetry. Along with that, it gives shape to meaning of convergent aspect of Eco-poetry by deriving creativity of that characteristics.

  • KEYWORD

    생태시 , 생태학 , 과학 , 예술 , 융합 , 창의성

  • 1. 서론: 과학과 예술의 융합에 대한 논의

    자연은 인간에게 수많은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특히 과학과 예술 영역에서 자연은 주요한 대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들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다. 과학은 피타고라스-플라톤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자연을 ‘거대한 기계’로 인식하고 자연 속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자연과 우주에 대한 수학적 기술은 근대 과학의 특징 중 하나였다.1)

    이에 비해 예술은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미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과학 혁명과 계몽 사조, 산업혁명을 거치며 확립된 ‘과학지상주의’에 반발한 낭만주의자들이 주로 비판한 내용이 수학화되고 기계 화된 과학이 자연으로부터 생명, 조화, 신비, 멋 등을 제거한 데 있다는것2)은 둘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관계 맺기 방식의 차이는 과학과 예술이 동일한 대상을 다루면서도 접점을 찾기 힘든 결과물을 생산하게 만들었다.

    이같은 기존의 흐름은 최근에 들어 통합(integration), 융합(convergence), 통섭(consilience)과 같은 용어의 등장과 함께 변화하고 있다. 이들 용어의 유행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다양한 분야들 사이의 소통’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3) 학문의 세분화는 각자의 영역 안에서 전문화된 지식을 생산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보다 창의적인 지식의 생산과 활용에 대한 폭넓은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학문 분야가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이질적인 것의 상호 소통이 가진 힘에 대한 기대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융합, 복합, 통합과 같은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을 뜻하는 용어들이 사회 전반적인 핵심어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과학과 예술의 소통을 시도한 일련의 노력들이 과연 두 영역 간의 진정한 융합을 이루고 창의적 결과를 낳았는지는 회의적이다. 근대 이후 과학과 과학적 방법론은 보편적 진리의 지위를 누려 왔으며 이는 융합의 장면에서도 과학이 예술에 녹아들지 못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통합이나 융합과 달리 통섭은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의 저서인 『컨실리언스: 지식의 통일』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가 한국어 번역서에서 『통섭』으로 발간되며 등장한 용어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나왔다는 이 용어를 번역한 최재천 교수는 통합•융합과 비교하며 통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통합이 “모두 합쳐져 하나로 모음 또는 둘 이상의 것을 하나로 모아서 다스림”을 뜻하는 통일 또는 응집의 의미를 지닌다면 융합은 “녹아서 또는 녹여서 하나로 합침”이라는 뜻으로 세포나 조직 등이 합쳐지는 것을 뜻한다. 이들과 달리 통섭은 “서로 다른 요소 또는 이론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단위로 거듭남”을 의미하기 때문에 병렬적 수준의 통합이나 융합을 넘어 새로운 이론 체계를 찾기 위한 접근이다.4)

    그러나 이러한 개념 정의는 통합과 융합 개념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 화하여 파악하고 있다는 점과 논의 자체가 다분히 과학적 관점에 치우 쳐져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한다.5) 그는 ‘번역자 서문’에서 ‘통섭’이란 번역어에 ‘분석과 종합을 포괄’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분석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할 수 있지만 통섭은 결국 언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과 글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들도 발견과 분석은 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의 발견을 꿸 실이 없을 뿐이다.”6)라는 말은 인문학의 역할을 과학적 발견을 꿰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규정한다.

    위와 같은 관점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도출된 지식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그것을 실로 꿰어 다른 것과 연결시킬 때 시너지를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의 성취가 융합의 목적임을 알려준다. 이런 관점은 과학과 예술의 융합에 대한 예시들에서 흔히 보이는 ‘과학의 부각’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알려준다.

    여기서 ‘과학의 부각’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융합에 있어 그 주체가 과학인 경우를 뜻한다. 루트 번스타인(Root-Bernstein)은 과학적 천재들의 위대한 발견에 도움을 준 발상법이 예술가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의 책 『생각의 탄생』에 나온 생각 도구 13가지인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 인식, 패턴 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은 과학과 예술에 넘나들며 적용되어 위대한 결과물들이 탄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천재적 과학자들은 예술의 영역에서 주로 활용되는 사고 전략을 통해 더욱 창조적인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그의 발상에서 예술을 활용한다.

    다음으로 융합의 주체가 예술이라도 과학적 특성이 형식과 내용을 주도하는 경우를 뜻한다. 회화를 과학이라 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는 회화를 함에 있어 원근법과 기하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서 과학은 예술의 표현 대상과 표현 방식에 큰 변화를 추동하여 공상과학영화, 판타지, 테크놀로지 아트, 전자 예술, 컴퓨터/디지털 아트 등을 발생시켰다.

    그렇다면 과학과 예술의 융합에서 과학이 부각되는 양상이 아닌, 예술과 과학이 녹아들어가는 융합이 가능할 수 있을까? 과학과 예술의 발상에 있어 중요한 요소인 '상상력'을 근거로 하여 과학에서도 예술에서 쓰이는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하는 입장이나 예술에서도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일정한 형식의 체계성과 질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 하여 과학적 속성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7)들은 온전한 설명이라기엔 부족 함이 있다. 이유는 이들 논의가 이미 자연과학을 "자연의 물리적, 화학 적, 그리고 생명 현상 등에 관한 진리 탐구를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관찰, 법칙, 추상적 이론으로 구성되었다고 규정8)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에 의하면 과학은 정신성이라 할 수 있다.9) 어떠한 정신은 세계관을 형성하여 세상을 인식하는 관점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과학과 예술을 바라보는 기존의 틀을 유지한 채로 논의를 진행한다면 결국 벽에 부딪히게 된다.

    단일한 학제(學制, discipline), 유일한 관점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현대 사회의 복잡성은 필연적으로 융합을 요구하게 된다. 그 자체로는 동일한 대상인 자연을 바라보는 두 가지 입장을 보다 유연하게 합할 수 있다면 이러한 융합의 구체적인 상을 떠올리는 데 하나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이유로 생태학이 지닌, 기존의 과학과 변별되는 대안적 성격에 주목하였다. 오덤(Eugene P. Odum)은 작은 단위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잡한 개체군이나 군집을 연구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논쟁에 대해 비판하며 "그 이하의 수준의 특질을 아는 것만으로는 위의 수준의 특질 전반에 관해서는 추측될 수 없”다고 말한다.10)

    따라서 생태학은 앞서 윌슨이 언급한 컨실리언스 개념에 함의된 환원주의적 세계관을 부인하며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세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생태학이 제공하는 이러한 세계관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 관찰이 결국 우리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자아의 자각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태학에서 파생된 생태문학은 과학과 예술(문학)의 융합을 다룸에 있어 적절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생태시는 과학적 특성이 ‘시’로서 형상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만든다. 또한 생태시의 세계관은 과학과의 연관 없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본고는 생태시의 이러한 융합적 성격과 창의성에 대하여 살피고 이를 실제 작품을 통해 구체화하도록 한다.

    1)Richard Westfall, 정명식·김동원·김영식 역, 『근대 과학의 구조』, 민음사, 1992 참조.  2)김영식, 『인문학과 과학: 과학기술 시대 인문학의 반성과 과제』,돌베개, 2009, 105-106쪽.  3)“전문화로 인해 높은 벽이 생긴 학문들 사이에 소통의 중요성이 한창 요구되는 시점이었고, 그래서 학제 간 연구, 학문 간 경계 넘기 등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때”였다는 서술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상헌, 「인문학은 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 이인식 외, 『통섭과 지적사기』, 인물과 사상사, 2014, 209쪽.)  4)최재천, 「바야흐로 통섭의 시대」, 서울대학교 자연대 편, 『자연대 이야기』7, 2008. (이남인,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통섭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삼아」, 『철학연구』 87, 철학연구회, 2009, 299-300쪽에서 재인용)  5)윌슨의 ‘컨실리언스’가 환원주의적인 통일에 불과하다는 비판, 원효의 사상에서 빌어 온 한국 번역어인 ‘통섭’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관한 논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통섭’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그와 관련한 다양한 영역의 논쟁들을 환기시키게 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생태시가 이질적인 두 영역의 ‘소통’으로 발생하였다는 관계적 측면을 부각하고 이에 초점을 맞추기위해 ‘통섭’이 아닌 ‘융합(converge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융합은 한 영역 안의 분과들 사이의 소통을 주로 뜻하는 ‘통합’보다도 큰 개념으로서 이질적인 영역들 간의 소통까지 포섭하는 개념이다.  6)Edward Wilson, 최재천·장대익 역, 『통섭』, 사이언스북스, 2005, 19쪽.  7)김문환,「과학과 예술의 비교: 창조적 과정을 중심으로」, 『과학사상』, 범양사, 1995 여름, 12-18쪽 참조.  8)정광수, 「과학과 예술의 공약가능성과 한계」, 『과학철학』12-2, 한국과학철학회, 2009, 87-109쪽, 90쪽.  9)화이트헤드는 과학의 성장이 우리의 정신을 '새로운 색조'로 채색하여 새로운 사상을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했음을 언급한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사상이 새로운 과학이나 기술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정한 과학적 발견보다 중요한 것은 근대 세계에 있어 근대 과학의 발전으로 나타난 새로운 정신적 태도가 강력함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과 이러한 태도가 동서양을 넘어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이름 등으로 일반화된 정신적 태도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다. "한 시대의 정신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지식층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세계관에서 발생된다.”는 그의 신념(9쪽)은 그의 논의를 잘 압축하고 있다. (Whitehead Alfred, 김준섭 역, 『과학과 근대세계』, 을유문화사, 1993, 18-19쪽 참조)  10)Eugene Odum, 『ODUM 생태학』, 최준길 외 역, 형설출판사, 2014, 16-17쪽.

    2. 창의적 문제 해결을 위한 융합적 산물로서의 생태시

    융합은 문제 해결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개념이다. 현대 사회의 제문제는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에 융합은 문제 지향적(problem-oriented)으로 조직되어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다양한 사회적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길11)이라는 주장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분석하여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아내야 하며 이를 실제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생태학이 우리를 포함한 생태계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면12) 생태주의는 여기서 도출된 자료를 통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문제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생태주의에 담긴 세계관이 다양한 운동들로 나타나는 것13)이 이를 입증한다. 나아가 생태문학은 세계를 바라보는 개인의 관점을 변화시킴으로써 실제적으로 문제를 극복하도록 만든다.

    세부적인 것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생태학으로부터 파생된 생태주의 사상을 언급하는 주장들은 근대적 세계관으로 인해 파괴된 생태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이런 상황을 야기한 요인들에 대한 저항을 논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환경 문제의 해결만을 주로 논하던 환경주의와 달리 이들은 가치 체계,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 다. 생태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현재 체제를 유지한 채 노력하여 해결하는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14) 때문이다.

    생태주의의 이런 성격은 문학에 있어서도 생태문학이 “생태의식을 일깨우고 생태학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문학”15)으로 규정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세계관의 변화는 보는 눈의 변화이다. 가치 체계와 인식의 전환으로 야기된 세계에 대한 낯선 감각은 행위를 유발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생태의식을 일깨운다는 것은 이처럼 자연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반하며 이는 낭만적 자연시와 생태시의 차이를 낳는다.

    중국으로 대변되는 동양에서는 자연은 아름다운 정경을 통해 미를 체험하게 하고, 창작의 원천을 제공하는 원형적 대상이었다. 이러한 자연에서 화자는 자아를 발견과 정신적 해탈을 도모하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언급한다 하더라도 계절의 변화 등에 따라 화자의 심경이 변화하는 것일 뿐, 그 자체로서의 자연은 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구한 자연은 유한한 인간사와 대비되며 화자로 하여금 쓸쓸한 정서를 자아냄과 동시에 그 영원성으로 화자의 비애를 치유하는 회귀적 공간으로서 기능하였다.

    이에 반해 생태시에 등장하는 자연의 변화란 말 그대로 처참하게 훼손된 자연의 모습을 뜻한다. 환경파괴의 문제를 다루거나 이를 야기한 문명을 비판하는 시, 자연이 지닌 가치에 대한 존중을 촉구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생명권을 강조하는 시 등이 해당된다. 다음의 인용문은 자연시와 생태시를 비교한 내용이다. 중국의 예를 들고 있으나 이는 자연에 대해 자연시가 지닌 전반적 시관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동양의 자연시에 나타난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 생태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자연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인간 중심주의를 배격하는 면17)은 분명 생태주의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면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읊는 시, 다양한 생물종이 더불어 사는 자연을 묘사하는 시 전반이 모두 생태시의 영역에 속하는 듯비춰질 수 있다. 생태계와 인간 공동체의 건강한 미래를 모색하는 의의를 지닌 생태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문학을 생태문학으로 명명하자는 주장18)에서도 보이듯 생태문학을 규정함에 있어 중요한 준거는 자연 자체에서 만족감을 얻는 것이라기보다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기 위한 인식 전환이다.19)

    생태시의 시작은 ‘새로운 자연시’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 생태계의 파괴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로 인해 인간의 생존 역시 위험에 처했다는 판단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했다. 기존의 자연시와 달리 “점점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시”20)로서 시작한 것이 생태시라면 이러한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시가 생태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시로 인해 독자가 자연의 실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자연의 영구함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기존의 자연 친화 관점과 분명 다른 것이다. 이를 ‘교화’함으로써 시인은 독자가 스스로 전통적 자연관을 부정하도록 이끈다21)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생태시에서 비판적 인식으로의 전환은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인식 전환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바꾸고 저항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참여문학의 논리와도 맞닿는 부분이 있다. “바람직한 생태시는 인간의 생태 지향적 행동을 현실 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자각과 추동력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22)는 말에 나타난 ‘진정한 자각과 추동력’은 생태시에 형상화된 세계가 우리에게 실제적 체험의 대상으로 작용할 때 가능해진다.

    이 시는 환경오염이나 죽음과 관련되는 파괴적 이미지의 시어와 표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방사능, 구멍 뚫린 오존층, 공해와 같은 문제들은 근원적 생명 작용인 광합성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가장 충격적인 점은 환경 파괴의 요인들이 ‘나’로부터 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를 공해 유출 업체로 명명함으로써 이 시는 환경 파괴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각인시킨다. 이러한 시를 읽으며 드는 정서는 신문에 실린 환경 문제 기사를 읽을 때의 정서와 같을 수 없다. 나와 거리를 둔 객관적 사실이 아닌, ‘나’ 자체로의 체험이 주는 충격의 파장은 인식의 전환과 행동의 촉구를 동시에 유발한다.

    위의 시는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유기체들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생태학적 지식과 조응하며 심각한 문제 상황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익숙한 가을 들판의 장면이 제시되고 난 뒤 이어지는 ‘메뚜기가 없다!’는 외침은 생명의 고리가 끊어졌다는 불길한 고요가 우리의 생명까지 위협하게 될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들판이 적막한 것이 왜 불길한 것인지는 생태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이 불길함의 해소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눈부신 것 천지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존재인(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사소하지 않은) 메뚜기 하나가 없음으로써 빚어진 고요의 무게감을 체험할 때 추동된다.

    생태시에 융합된 생태학 지식과 문학적 형상화의 융합은 어느 한 쪽에의 수렴이나 단순히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녹아드는’ 양상을 보여준 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융합의 주요한 목표가 문제 해결이라 할 때, 과학이나 문학 한 쪽만의 산물로서는 해결이 어려운 문제를 융합적 산물인 생태시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생태 문제는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극복이 어려운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융합적 산물로서 생태시가 지니는 특성은 새롭고 적절한 문제 해결의 산물23)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창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생태시가 생태학적 자각의 계기를 제공하고 생태학적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생태계 내의 모든 생명들이 동등한 생명권을 지니며 인간은 그 생태계 내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이다. 둘째는 현대의 자연이 그동안 당연시되어 왔던 자연과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충격과 그것이 생명체에게 얼마나 끔찍한 결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자각이다. 이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기존의 지평에서는 얻기 어렵다. 생태시에서는 생태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에서 얻은 지식이 시라는 장르에서 나타나며 성취된다.

    과학적 발견이 이뤄지기 전에도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인식이 더 발전하여 자신이 생태계 내의 다른 생명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른 생명체가 생태계 속에서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또한 자연의 파괴가 곧 나와 생태계 전반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생태학에서 입증된 사실이라는 것은, 그러한 인식이 시 안에 들어오면서 그 순환을 깨트리는 이기적인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촉구하는 정서적 소구로 기능할 수 있다. 과학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의 조합은 이처럼 단독적으로는 일어나기 어려운 기능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

    11)박상욱, 「융합은 얼마나: 이론상의 가능성과 실천상의 장벽에 관하여」, 홍성욱 편, 『융합이란 무엇인가』, 사이언스북스, 2012, 39쪽.  12)생태학은 생물이 사는 생활의 터전을 중심으로 생물이나 그 환경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생물, 공학, 화학과 같은 다양한 분과들의 접근 방식을 수용하며 발전해 왔다. 생태학자들은 이처럼 생태학이 하나의 통합적이고 종합적 성격을 지닌 학문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으며 생태학은 "몇몇 명확한 개념에 기초한 세부분야로 구성되고 각 분야는 나름대로의 개념 혹은 철학을 가진다”고 본다. 특이한 점은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생태학을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서로 다른 질문이 서로 다른 결론으로 제시되는 것까지 생태학이 포괄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이의 상호관계와 연계에 대한 설명이다. 때문에 과학으로서의 생태학은 개념(세계관, 관점), 생물체의 종류, 서식지(지역), 적용성 등을 다룬다. (Stanley Dodson 외, 노태호 외 역, 『생태학: 인간과 자연』, 아카데미서적, 2000, 2-4쪽)  13)생태학이 이처럼 생명체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맺는 전체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때 그 연구 대상과 주제는 생명 체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한 고민, 그 체계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인간의 인식이나 제도에 대한 비판 등까지 확장된다. 이러한 철학적, 사회적 접근들은 심층 생태학(Deep Ecology),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와 같은 운동들로 나타났다.  14)심층 생태학은 “환경주의가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사회 생태학자들은 환경주의가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시키고 이로부터 자연사와 사회사를 별개의 것으로 하는 발상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이들의 이론과 자신들을 분리하였다. (문순홍, 「생태패러다임, 생태 담론 그리고 생태 비평의 언어 전략」, 문순홍 편저, 『생태학의 담론』, 솔, 1999, 28쪽.)  15)김욱동, 『문학 생태학을 위하여』, 민음사, 1998, 32쪽.  16)배 다니엘, 「중국 자연시와 서구 생태시의 비교적 고찰」, 『中國硏究』40,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2007, 197쪽.  17)생태주의의 핵심 명제를 (1) 자연은 하나의 전체로서 유기체이다. (2) 인간은 유기체로서 자연의 일부분이다. (3) 자연의 구성원들은 평등하다. (4) 인간은 자연 속에서 공전을 도모해야 한다. 로 규정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김옥성, 「한용운의 생태주의와 시학」, 『東洋學』4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7, 54쪽.)  18)임도한, 「생태문학론의 전개와 한국 현대 생태시」, 신덕룡 편, 『초록 생명의 길 2』, 시와사람, 2001, 203쪽.  19)“생태학적 인식의 유무에 집착하지 말고, 비록 생태학적 인식이 옅은 수준이거나 그다지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것이 생태계 문제를 다루거나 생태학적 의식을 일깨우는 작품이라면 생태문학으로 봐야 한다”는 언급도 같은 맥락이다. (김용민, 『생태문학』, 책세상, 2003, 98-99쪽.)  20)김용민, 위의 책, 304쪽.  21)송용구, 『현대시와 생태주의: 한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새미, 2002, 37-38쪽.  21)22) 임도한, 「생태시의 과제와 자각의 계기」, 『한국현대문학연구』16, 한국현대문학회, 2004, 26쪽.  23)창의성을 정의하기 위한 여러 접근 방식 중에서 보편적인 것으로는 창의적 산물이 지니는 특성을 추출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새롭고(즉,독창적이고 기대되지 않은) 질적으로 수준이 높으며, 적절한(즉, 유용하고 과제에서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산물을 생산해 내는 능력(Sternberg, Kaufman & Pretz, 2002: 1)”으로 창의성을 정의할 수 있다. (R. J. Sternberg et al., 임웅 역, 『창의성: 그 잠재력의 실현을 위하여』, 학지사, 2009, 15쪽.)

    3. 생태시에 나타난 융합과 창의성

    생태시는 손상된 자연에 대한 진술을 한다. 그러나 그의 기능은 객관 적인 보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생태시는 예술 지상주의에만 묶여 있던 언어의 미학을 ‘손상된 세계’로 끌어내려 새롭게 ‘미학의 저항’을 요구한 현대시의 대표적 유형”24)이라 할 때, 그 저항의 메시지는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뚜렷해진다. 본고는 이 융합의 유형을 ‘과학적 지식을 매개로 한 생명 중심주의’와 ‘이론의 맥락화를 통한 저항의 촉구’로 제시하였다.

       1) 과학적 지식을 매개로 한 생명 중심주의

    근대 과학의 발전은 지금까지 인간이 파악하기 어려웠던 세계를 발견하게 해 주었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미시와 거시의 범주를 넓혀 주었으며 이에 따라 자연이나 생명의 신비함 역시 많은 부분 해명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간 역시 이런 유기적 체제 안에 속한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며 순환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힘을 얻게 된다. 에몬즈(A. R. Ammons)는 이러한 과학의 발견들에 민감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과학의 분야는 식물학, 생물학, 천문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과를 아우르는 경향을 보인다.

    그의 시 「기작」 (Mechanism)에 나타난 생물학의 정보는 생식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끝나지 않는다. 생식의 과정을 미시적인 유전자 차원에서 밝힘으로써 이것이 생명의 본능에 따라 일어나는 생명체 전체의 사건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생명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위상이 조정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과 다르지 않은 과정을 통해 동물이 생태계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 생명을 마음대로 휘두를 특권이 인간에게만 부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미시의 세계뿐 아니라 거시의 세계에서도 인간은 그가 생태계의 순환 속에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임이 밝혀진다.

    생태시인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조사하고 생태적 원칙에 입각하여 시를 쓴다는 공통점을 지닌다.26) 이러한 관찰과 조사에 따라 구현되기에 이들의 상상력은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시 속에 나타난 상황이 일상에서 관찰 가능한 현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현실과 완벽히 동떨어진 판타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학적 지식을 매개로 한 생태시의 상상력은 생명 중심주의로의 인식 전환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2) 이론의 맥락화를 통한 저항의 촉구

    기술의 발전은 기존에 없었던 물질을 발명했고 이들은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연을 파괴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언론에 보도되지만 그 고발은 인과 관계만을 말할 수 있다. 시적 담론으로 이를 형상화하는 것은 보고서, 논문, 책, 기사와 같은 객관적 글에 비해 파토스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호소력이 훨씬 크다. 특히 시적 담론은 형상화에 있어 극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통해 구체화한다는 점27)에서 논리로 서술하는 글에 비해 훨씬 감정을 북돋을 수 있다.

    이 시는 실제 대구에서 1991년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쓰였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으며 당시 해당 기업은 불매운동, 그룹 이미지 실추, 회장 사퇴 등의 일을 겪어야 했다. 낙동강에 이 기업이 페놀을 방류했다는 것, 수돗물을 마신 대구 시민들이 건강 이상을 발견하고 심지어 임산부들은 유산을 했다는 것은 어떤 기사에서든 동일하게 다루어 진다. 유독 물질에 의해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은 인과 관계가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시간을 넘어서까지 우리의 문제의식을 건드리고 행동을 추동할 동력을 지니지 못한다. 그 당시에는 사회 전체가 해당 기업을 뜨겁게 비판하였으나 현재 그 기업은 여전히 대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경제신문에서는 그 기업의 역사를 논하며 당시의 사건을 ‘위 기’로만 칭하고 있다. 그 위기를 겪고 해당 기업이 사업 영역을 달리한 것이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논리이다.

    위 시는 해당 사건을 그저 한 번 발생한 뉴스로만 여길 수 없게 만든 다. 시민들이 겪는 구토, 피부병, 그리고 끔찍한 유산은 다른 생명체의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빚어낸 비극을 생생히 그려낸다. 인종과 경제적 상황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는 태도, 경제 논리 앞에서 다른 생명 들의 권리는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태도는 모든 생명체가 동등한 생명권을 지닌다는 생태학의 논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자신이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시는 이런 삶의 양태가 어떠한 비극을 낳는지 삶의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사건을 고발하는 기사들과는 다른 정서적 충격을 안긴다.

    오염된 토양에서 자란 배를 먹은 여자의 신체는 아랫배, 두 팔, 두 다리가 부풀어 오르고 세포들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어져 기형화된 신체, 세포 수준가지 뿔뿔히 흩어지는 존재의 무화는 환경 파괴가 생명체에 어떤 위해를 끼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환경 문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태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오염된 토양이 생명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이 시가 노래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토양은 생명의 근원과도 같다. 생명체가 섭취하는 음식은 결국 그들의 세포를 이루고 이 세포가 다리가 되고 팔이 된다. 더 나아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배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다시 세포부터 자라나게 된다. 이러한 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게 되는 것을 이 시는 그 고리의 해체를 통해 적실하게 나타낸다.

    위의 시에 등장하는 무뇌아는 정상적인 자연의 체제 안에서는 나올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환경 파괴로 인해 태어난 존재이며 그를 잉태한 산모의 몸 역시 자연의 질서와 부합하지 않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녀의 몸에는 자궁 대신 공장지대가 들어서 있으며 그녀의 젖은 허연 폐수 이다. 이런 몸 안에서‘생명’이 자라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아이의 배꼽에 매달린 것은 썩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오랜 기간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는 비닐끈이다. 태아가 자라야 할 자궁, 그가 뱃속에서 유일하게 영양을 공급받고 세상과 소통하는 탯줄, 이 모든 것이 생명을 키우고 돌보는 데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비닐끈과 마찬가지로 오염의 주범인 고무인형에 비유 된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고무인형과 같은 그 아이를 낳은 산모는 ‘그의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을 하루종일 뽑아댄다.’이런 괴기스러운 행위는 이 모든 사건들이 비정상의 범주에 속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발생한 기형아의 출산은 근대에 들어 산업화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이 생태계에 끼친 비극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훼손된 자연이 야기한 생명의 파탄은 태어난 아이와 엄마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단순히‘환경 문제 때문에 기형아 출산이 늘고 있다.’는 진술만으로는 와닿지 않은 끔찍함이 시 안에서 형상화될 때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게 생태계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시는 생태학의 이론들을 구체적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이를 접했을 때 읽는 이로 하여금 현 사태에 대한 문제의식의 절박함을 환기 하도록 하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저항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어준다. 시안에서 생태학의 이론과 세계관은 이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상황들로 초점화되며 훼손된 자연과 생태계의 참혹함을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 대상과 상태에 비유된다. 환경오염과 파괴된 자연을 묘사하는 일련의 시들은 생태계와 생명체 간의 관계성과 순환성에 대한 생태학 이론을 이해했을 때 더욱 풍부하게 이를 손상시키는 요인들의 부정성을 파악할 수 있다. 동시에 생태학의 이론은 시적 형상화를 통해 비판과 저항, 참여의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24)송용구, 「에코토피아와 생태시」, 『통합연구』15-2, 통합연구학회, 2002, 117-118쪽.  25)A.R. Ammons, Colleceted Poems 1951-1971, New York: W. W. Norton&Company, 1972, p.78. (양재용, 「A. R. 에몬즈 시의 과학적 비전」, 『현대영미시연구』10-2, 한국현대영미시학회, 2004, 5. 84-85쪽에서 재인용)  26)신양숙, 「생태시란 무엇인가?」, 『문학과 환경』4, 문학과 환경학회, 2005, 189쪽.  27)김욱동, 『생태학적 상상력』, 나무심는사람, 2003, 20-21쪽.  28)Heinz Schneeweiß, 송용구 역주, 「무제·Ⅰ」,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시문학사, 65-66쪽.

    4. 결론

    융합의 시대에 생태시는 시적 발상의 기원이 자연과학의 한 분과인 생물학이라는 점에서 다른 시들과 차별성을 지닌다. 낭만적 자연시와 달리 생태시는 생태학이 주창하는 바와 같이 생태계에 속한 생명체들과 상호 연관을 맺으며 사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자연을 노래하는 시이다. 그는 자연을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는 단순한 객체로 보지 않으며 낙관적 유토피아로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에게 자연은 상호 주체적으로 동등하게 위치한 존재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 역시 자연의 일부로 인식함으로써 발생하는 비판적 인식들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 안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각각에게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동등한 생명권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자연 파괴가 생태계의 유기적 질서 안에 속한 ‘나’의 일이며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인식을 추동한다. 자연이 손상된다는 것은 나의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것이자 나 자신이 절멸하게 되는 일이기에 이를 막아야겠다는 인식과 저항이 최우선의 과제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인간 중심적 사상을 배격하고 생명 중심의 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자연을 파괴하는 요인들에 대한 현실비판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생태시는 자연 친화적인 입장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자연을 감상하는 낭만적 자연시와 달리 현실 비판을 위한 새로운 세계관의 전환까지 요구하는 특수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인식 전환은 생태계 내의 모든 생명들이 동등한 생명권을 지니며 인간은 그 생태계 내의 한 요소일 뿐이라는 깨달음과 인간의 이기심과 문명에 의해 자행된 자연 파괴가 생태계 전반에 얼마나 큰 충격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자각을 필요로 한다. 본고는 이러한 자각은 세계 관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기에 기존의 지평에서는 얻기 힘들다고 보았다. 즉, 융합적 성격을 지닌 생태시에 녹아 있는, 생태학이라는 과학과 시장르가 속한 문학의 예술성의 조합의 도움을 받아 자각과 전환이 일어날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보았다.

    우선 생태시는 과학적 지식을 매개로 하여 인간 중심주의에서 생명 중심주의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근대 이전에도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을 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이‘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이 단지 우리의 감각적 판단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인간이 생태계 내의 다른 생명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라는 점에서 타당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인간 외의 생명체들 역시 동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생태시는 생태학 이론을 시에 형상화함으로써 시에 나타난 환경 파괴와 오염에 대한 적극적 비판과 저항의 동력이 되어 준다. 병든 자연의 이미지는 자연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생태계 전반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임은 생태학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이를 무시하고 깨트려서 공멸을 자초하는 세력들에 대한 비판을 촉구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촉구는 논문이나 보고문에서 인과에 의해 진술하는 것보다 구체적 장면을 초점화하고 참혹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비유를 들어 시로 형상화할 때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생태시는 과학과 예술의 요소들을 융합함으로써 하나의 영역 안에 머물렀을 때는 도모하기 어려웠던 메시지 전달의 효과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생태학에서 파생된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여러 철학적․ 사회학적 담론들 역시 생태학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들은 그 세계 관을 적용하여 정치, 경제, 자연에서의 인간의 위치 등을 새로이 파악하는 데 보다 집중한다. 이에 비해 생태문학에 속하는 생태시는 예술에 속한다는 점에서 다른 파생 논의들보다 이질적인 조합의 성격을 띤다.

    생태시는 생태학이 꾀한 세계관의 변화를 문학적 장르 안에 잘 녹여 내면서 궁극적으로 기존의 세계관이 지닌 병폐를 지적하고 적극적으로 개선해가고자 하는 의지를 고취시킨다. 과학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은 기존에 존재하는 것이었지만 이을 조합하여 새롭고도 적절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창의성이라 한다면 생태시의 융합적 성격이 이에 해당한다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본고는 생태시를 과학과 예술의 융합적 성격이 깃든 장르로 보고 논의를 진행함에 있어 시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다룬 논의들에서의 과학이 근대적 의미의 자연과학을 의미하였다면 본고에서는 그러한 분과들이 한계에 부딪혀 나오게 된 생태학이라는 과학에 보다 중점을 두어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이 과학에 대한 개념이 다소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과학적 지식과 이론으로 명명한 것은 자연에 대한 생태시의 인식과 세계관이 기존의 자연관과 차이를 지닌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볼 때, 이 차이는 현대성 혹은 근대성의 출현과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과 연결한 설명이 있어야 완전해진다. 또한 생태학적 지식 역시 이것이 하필이면 왜 문학에, 그것도 시라는 장르로 형상화되었는지를 이해해야만 생태시에 대한 풍부한 해석이 가능해지기에 예술적 장르로서 시의 측면을 살피며 융합에 대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갔다. 후속 연구를 통해 이러한 융합적 요소와 창의 성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보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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