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넘어서기”--미국서부사막지대 자연인식과 에드워드 애비의 『사막의 고독』*

“'Getting Over the Color Green': Understanding the Arid Nature of the American West and Edward Abbey's Politics of a Gree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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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Wallace Stegner once argued that appreciation of nature in the arid West requires getting over the color green, dissociating beauty with gardens and lawns. The color green has long been associated with beauty of nature in Western culture, and people favor green color, associating it with positive values and pleasant feelings. In addition, in recent years the color green has come to denote the healthy environment and ecosystem. All these factors have made it very difficult for general people 'get over the color green.' It was a group of nature writers who pioneered appreciating the aesthetics and value of vast sprawls of hot and dry land of American West devoid of color green. They not only questioned the accustomed modes of geography, landscape, environment, and ecology but also overcame the collective imagination of cultural heritage of color green represented in the mythic 'green world' and wilderness ethics in the American myth. An American nature writer Edward Abbey represents not only this post-green color aesthetics on non-green nature of the arid land of American West, but also trans-wilderness ethics in which green nature and red culture are incorporated in balance. Abbey's Desert Solitaire incorporates Abbey's such perception and awareness. An ecocritical approach on Abbey should be made from this aspect, instead of ever branding him an "anarchist," "radical environmentalist," eco-terrorist," or "anti-civilization voice."

  • KEYWORD

    에드워드 애비 , 『사막의 고독』 , 녹색자연 , 미국서부사막지대 , 아치스국립공원

  • 1. 서론

    미국 자연문학 작가중 에드워드 애비(Edward Abbey)만큼 심층생태론적‧녹색환경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작가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생태비평을 비롯한 문학연구에서 소외된 작가도 드물다. 애비에 대한 비평적 무관심은 대부분의 자연작가들과는 달리 애비가 높은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를 누려왔다는 점에 근거하여 애비를 단순히 인기위주의 대중적인 작가라는 통념적인 판단에 기인한다. 이와 더불어 애비에 대한 비평적 무관심의 더욱 중요한 요인은 그동안 그에게 낙인 씌웠던 심층생태주의에 입각한 ‘반문명론적 환경론자,’ 혹은 ‘무정부주의자,’ ‘에코테러리스트’ 라는 ‘뻔한’ 입장을 당연시함으로써 애비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다룰 만큼 깊이 없다거나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출간된 애비에 대한 유일한 논문모음집인 『미로 속의 코요테--언어세계 안에서 에드워드 애비 추적하기』 (Coyote in the Maze: Tracking Edward Abbey in the World of Words)의 편집자 퀴글리(Peter Quigley)는 애비에 대한 비평계의 무관 심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애비에 대한 “진지한 학술연구” 모음집으로 계획된 이 『코요테』에 실린 글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퀴글리가 애비에 대한 비평적 무관심의 원인으로 제시한 애비의 탈문명적 혹은 반문명적 녹색자연 관점들이 여전히 애비의 기본적인 관점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비겔(Werner Bigell)은 「생물중심주의와 녹색 실존주의」 (“Biocentrism and Green Existentialism")에서 심층생태주의 관점에서 애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애비는 자연세계, 달리 말하면 야생자연을 사랑했다.... 평등사상에 대한 그의 정제된 생각은 인간영역을 훨씬 넘어서 모든 동식물 종을 담아낸다.... 그에게는 자연에 존재하는 하나하나는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278). 애비의 개인적인 삶과 작품에서 탈문명적 태도는 흔히 반문명적 태도로 발전하는 만큼, 『코요테』에서도 애비를 반문명주의적 녹색 환경론의 입장에서 다루는 주장 역시 여전히 반복된다.1) 린홀트(Paul Lindholdt)는 “애비는 사고와 행동에서 신러다이트 운동가이다”(116)고 단언하면서,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 환경파괴와 같은 산업화의 폐해를 고발하면서 벌였던 기계파괴운동을 계승하는 운동가로서의 애비를 분석한다.2) 아나키스트로 애비를 접근하는 글도 두 편이나 실려있다.3) 반문명주의적 환경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나키즘으로, 아나키스트들은 댐건설이나 도로 건설과 같은 정부의 개발정책으로 인한 환경파괴에 반기를 들고 정부정책을 비판하면서 에코테러리즘적 행동으로까지 옮기기도 한다. 탈문명주의적 혹은 반문명주의적 입장의 심층생태주의자와 급진녹색환경론자로서의 애비의 이미지는 그가 관여했던 급진환경운동단체와의 관계에서 유래된다. 잘 알려진 대로 애비는 미국의 대표적인 급진환경단체인 ‘어스 퍼스 트!’(Earth First!)의 출범 및 활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1980년에 출범된 이 단체는 운동 목표와 방향을 애비의 1975년 출간된 소설 『멍키 렌치 갱』(The Monkey Wrench Gang)에서 직접적으로 가져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단체 공식 잡지인 『어스 퍼스트! 저널』 (Earth First! Journal)의 편집장은 차량 스티커와 티셔츠에 새길 이름과 문구를 직접 『멍키 렌치 갱』에서 따 왔으며, 애비는 이 운동단체의 집회에 직접 참석하여 연설하기도 하였다.

    사실 애비에게 꼬리표처럼 붙은 ‘반문명주의자,’ ‘아나키스트,’ ‘급진환 경운동가’와 같은 낙인은 그의 널리 읽힌 소설 『멍키 렌치 갱』이나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던 환경파괴 주제에 대한 글, 어스 퍼스트!와 같은 환경운동 단체와의 연관성 등에서 유래하며 일정부분 애비의 삶과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애비의 서부건조사막지대에 대한 심미 적이고 생태학적, 환경론적 태도가 가장 잘 반영된 그의 자연문학에서도 작가의 이와 같은 측면이 일정 부분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애비의 자연문학에 대한 접근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애비의 서부건조지대의 자연형상과 환경, 생태에 대한 심미적이거나 생태학적, 환경론적 기술과 관점은 흔히 애비에게 꼬리표처럼 붙은 심층생태론적인 ‘반문명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 혹은 ‘에코테러리스’의 녹색환경주의만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의 자연관에는 일관성 보다는 다층적인 관점들이 나타나며 심지어는 서로 대조되는 관점들이 제시되기도 한다.

    녹색자연과 문명세계에 대한 애비의 상호모순적이고 다면적인 관점은 그의 개인적인 신념 부재나 변절, 부주의한 글쓰기로 해석하는 일부 생태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로 인해 애비에 대한 생태비평적 관심 소홀이란 결과가 초래된 것도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애비를 진지한 작가로 해석하고자 하는 또 다른 비평가들은 작품에 드러나는 상호모순적인 관점과 태도를 애비의 현실 속의 실재 삶의 세계와 작품 속 허구세계에 반영된 각기 다른 세계로 해석하면서, 애비를 여전히 녹색세계에만 천착하는 작가로 내세운다. 작품 속의 자연은 실재 장소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신념을 반영하는 창조된 녹색세계로서, 작가는 자신의 실재 삶의 현장인 문명세계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작품 안에 창조한 녹색세계를 추구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로날드(Ann Ronald)는 자연문학에서 다루는 장소를 독자들은 실재세계로만 받아들이지만, 애비가 『사막의 고독』(Desert Solitaire)에서 다루는 유타의 아치스 공원의 자연세계는 실재세계이자 동시에 애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요소가 가미된 세계라는 점을 강조한다. 로날드는 애비가 실재자연에서 구현하기 힘든 야생자연에 대한 그의 이상주의적 신념을 담아내기 위해 작가로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냈고, 애비가 창조한 내레이터 “에드 애비"(Ed Abbey)로 하여금 그 상상의 세계를 탐사하도록 했다고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로날드는 작가와 내레이터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실질 인물인 작가와 상상속의 인물인 내레이터를 구분해야만 실재의 자연경관과 상상속의 세계의 구분이 가능하다”(66). 로날드는 이 작품에서 녹색세계에 대해 상호모순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를 문명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작가의 현실적인 처지와 내레이 터에 투영된 작가의 녹색세계에 대한 신화적 믿음으로 정리한다. 로날드는 실재인물로서의 작가에드워드 애비는 현실적으로 문명을 거부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생각과 이념은 여전히 내레이터 에드 애비를 통해 녹색 세계를 추구하고 지향한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로서의 ‘에드워드 애비’와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의 내레이터 ‘에드 애비’의 구분은 애비를 훌륭한 작가로서의 재평가하기 위한 로날드의 노력으로 보인다. 로날드는 실재 사막의 자연을 신화의 세계로 승화시킨 “로맨스 작가”로서의 애비의 이와 같은 글쓰기 기법이 바로 이 작품의 성공요인으로 까지 본다. 애비에 대한 최초의 의미있는 비평서를 쓰면서 당시 학계에서 별로 논의되지 않던 애비를 문학적 기교와 미국적 야생 자연 윤리를 견지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로날드의 이와 같은 판단은 애비의 글을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게 보이는데 기여할 수는 있지만, 애비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시키고 있지는 않다.4) 녹색세계에 대한 애비 자신의 상호모순적인 태도를 통해 작가로서 그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로날드의 주장처럼 내레이터 에드를 통한 작가 자신의 녹색세계에 대한 무조건적 지향이라기 보다는 녹색세계를 이상향으로 삼는 기존의 신화적 믿음에 대한 재고이 다. 즉, 녹색세계에 대한 신화적 믿음과 야생자연에 대한 미국적인 환상을 드러내고 지적하기 위한 애비의 의도적인 도전적 행위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애비가 <녹색자연 대 적색문명>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녹색세계와 야생자연만을 추구하는 인식과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비는 미국서부사막과 같은 녹색이 아닌 비녹색 자연세계에서도 자연의 심미성과 숭고함, 생태의식을 발견하며, 인간 삶에서 도시와 같은 갈색문명의 필요성 역시도 인정하면서 자연세계와 문명사회 사이의 조화와 균형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 연구는 이 점을 애비의 대표작인 『사막의 고독』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1)애비의 『사막의 고독』의 발췌문이 실린 야생자연에 대한 글 선집인 The Wilderness Reader(1994)에서 편집자인 버곤(Frank Bergon)은 애비를 “자칭 농경 아나키스트이자 생태학적 테러리스트”(a self-styled agrarian anarchist and ecological terrorist)(334)라고 소개하는데서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2)Paul Lindholdt, “Rage against Machine: Edward Abbey and Neo-Luddite Thought," Quigley 106-118.  3)Harold Alderman, "Abbey as Anarchist"; Peter Quigley, "The Politics and Aesthetics of a Hopeful Anarchism: Edward Abbey's Postmodern 'Angelic Demonology.'”Quigley 137-49.  4)애비는 작가의 글쓰기에 대해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비평적 기준을 들이대며 평가하려드는 태도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작가의 글쓰기는 문학연구자가 ‘좋은’ 작품으로서 갖추어야 할 비평적 기준과는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작금의 문학비평가들은 고위 성직자의 예복으로 무장하고는 작가들에게 문학방법만이 아니라, 무엇을 쓰고 무엇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까지도 가르치려 든다. 더 나아가 작가가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까지도 가르치려 든다.”(Confessions of Barbarian, 109).

    2. ‘애비의 고장’ 서부사막지대--에드워드 애비의 탈녹색 인식

    애비의 『사막의 고독』의 배경이 되는 유타 캐년랜드는 그레이트 베이신과 소노란 사막과 더불어 미국서부사막지대를 형성하는 지대로 고원평지에 빙하해빙과 침식에 의한 협곡과 사암으로 이루어진 붉은 땅으로 녹색자연과 전혀 다른 자연 지형과 경관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유타 캐년랜드에 대한 애비의 탈녹색 인식은 두 방향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아치스와 같은 유타 캐년랜드의 비녹색 건조사막지대에 대한 심미적 및 생태학적‧환경론적 재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녹색세계를 문명사 회와 대척점에 두고 원시적 낙원이란 이상향으로 삼는 서구의 신화적 믿음과 원시적 야생자연을 개인의 자유가 마음껏 펼쳐지고 권리가 최대 한 보장된다는 미국적 신화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1) 비녹색 자연에 대한 심미적 및 생태학적?환경론적 재인식

    『사막의 고독』에서 드러나는 애비의 비녹색의 사막자연에 대한 심미적이고 생태학적‧환경론적 인식은 자연을 기술하고 대하는 태도에서 대체로 미국적인 자연문학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기존의 자연문학에서 다루는 자연이 녹색자연이었다면, 애비의 자연은 녹색이 아닌 비녹색의 서부사막지대라는 차이다. 미국의 자연문학에서는 인간 삶이 아닌 자연세계가 주된 관심대상이고 또한 흔히 이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특정 장소나 지역에 특별한 관계를 맺고 일정기간 방문 하거나 거주한 자연작가들에 의해 쓰여지기 때문에, 그 장소나 지역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한 심미적 관점 및 생태학적, 환경론적 관심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묘사가 많이 등장한다. 작품의 주요무대이자 자칭 ‘애비의 고장’(Abbey's Country)으로 이름 붙은 유타의 아치스와 인근 캐년랜즈 국립공원, 배후타운인 모압의 자연과 삶이 주로 다뤄지는『사막의 고독』에도 자연을 기술하는데 사막지대의 비녹색 자연형상을 심미적으로 바라보고, 이곳의 생태계와 환경문제를 탈녹색 관점에서 인식 한다.

    애비는 당시 독자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유타 자연의 외형적인 모습과 인상을 이 작품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애비 이전에 유타의 독특한 자연형상과 생태를 본격적으로 다룬 문학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유타 캐년랜드에 대한 애비의 자세하고 인상적인 기술에서 탈녹색 자연인식을 위한 애비의 세 가지 의도를 읽어 낼 수 있다. 첫째는 유타의 사막지형에 대한 심미적인 인식의 도모이다. 이곳 자연지형의 심미적 인식은 녹색이 아닌 적색과 빛이 중요한 매개역할을 한다.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이러한 특질은 두드러진다.

    이곳의 사암 기둥과 아치, 캐년은 그 자체로 적색계열의 색상을 지니고 있으며 아침과 저녁 햇살을 받게 되면 그 색상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애비에게 그 광경은 녹색자연에서 느끼는 심미적 인상을 넘어서는 그 자체로 황홀경이다. 녹색 자연경관에 익숙한 자연애호가의 경우 “이 낯선 지역에 들어서면서 충격을 받을 것이고 거주하면서도 당분간은 심리적 압박감, 심할 경우에는 공포감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자연에 익숙해지는 것은 시간만이 해결해줄 것이며 그것도 서서히 진행될 것이다”(Stegner 53-54; 재인용)는 듀톤(Clarence Dutton)5)의 언급처럼, 녹색자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미국서부건조지대의 비녹색 경관은 형태와 색상에서 전혀 낯설고 기이하게 보이며, 이 비녹색 자연경관에 대한 인식의 서부화 과정은 지난하다. 이러한 비녹색의 유타 캐년랜드 사막지대에 대해 애비는 심미적 인식을 갖게 되며, 그의 심미적 인식은 단순히 자연경관의 독특한 형상과 색채와 같은 자연의 외형적인 특성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의 자연 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한계를 넘어선 존재 이기 때문이다. 애비가 이곳의 자연물을 메타포로 삼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연의 형상과 속성을 메타포를 통해 살아있는 자연 피조물이나 인간사회와 문화, 인간의 속성과 연결시킴으로서 자연의 일차적 자연의 의미를 다른 차원으로 연결시키는 이 방법은 오랜 동안 문학의 중요한 특성이 되어 왔으며, 특히,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재인식하는 것을 중시하는 자연문학에서도 생명체로서의 자연을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메타포로 자연 현상 및 속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애비는 자연형상이나 실체를 메타포로 보는 것은 인간중심적인 사고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자연을 메타포로 보는데서 수반되는 자연의 의인화를 경계한다. ‘델리킷 아치’와 더불어 아치스의 대표적인 단일 형상인 ‘밸런스드 락’(Balanced Rock)을 보고 애비는 그 형상에서 석신(stone god)과 도깨비(ogre)를 연상하고는 즉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연의 의인화는 다름 아닌 내 자신이 자제하고 아예 제거하기를 원하는 습성이다.... 이곳에선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존재의 적나라한 뼈대, 우리를 지탱해주는 기반암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고자 한다.... 인간이 부여한 모든 의미가 제거된 상태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원한다”(7). 자연을 메타포로 삼는 것에 대한 경계는 자연의 외형에서 보다 깊은 실체로서의 철학적 혹은 도덕적 의미를 찾던 자연에 대한 기존의 문학적 접근과의 거리두기이다. 이러한 거리두기 태도는 자연이 형이상학적 의미에 이르는 단순한 매개체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관심과 존중을 받아야 할 주체로 인식하는 애비의 자연에 대한 태도이며, 애비가 작품 곳곳에 “외형이 실체이다”라는 관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61, 311, 420). 애비가 이처럼 자연을 실체로서의 외형과 형이상학적 의미체로 구분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의 작품의 무대이자 당시 자신의 활동터전이었던 미국서부의 사막지대는 "인간이 부여하는 모든 의미를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신성하다“(311)라는 그의 표현대로, 우리의 습관화된 인간중심적인 통념을 넘어서는 자연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막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완전히 수동적이며 작용을 받을 뿐, 작용은 하지 않는 사막은 존재의 앙상한 유골처럼 놓여 있을 뿐이다.... 사막은 인간을 넘어선 영역이다”(300-301).

    유타 캐년랜드 기술을 통한 애비의 두 번째 의도는 유타지역의 사막 생태계에 대한 탈녹색 생태학적 인식의 고취이다. 이곳의 자연생태계는 외형적인 모습만큼이나 녹색생태계와는 전혀 다른 생태학적 특질을 보인다. 미국서부사막지대에서는 탈녹색 심미학적 인식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독특한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접근을 위해서는 기존의 녹색생태학‧녹색환경론의 극복 역시 요구된다. 생태비평 가인 린치(Tom Lynch)는 자연세계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녹색을 선호하고 물이 풍부한 환경을 일반적인 경관으로 상정”하며, 녹색은 “환경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로서 그리고 생태학적인 책임을 지녀야 한다는 메타포로서 우리들 마음 깊숙이 코드화 되어 새겨져 있다”(10)고 지적한다. 건조사막지대로서 이곳의 생태학적 특질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물이다. 애비는 사막지대가 물이 부족한 곳이란 일반의 인식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식이 얼마만큼 ‘녹색 자연’ 개념에 기초한 것인지를 오히려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 비녹색 사막생태 계의 생태학적 특성에 맞는 환경의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유타 캐년랜드 기술을 통한 애비의 세 번째 의도는 인간의 간섭이 초래할 수 있는 사막생태계의 취약성에 대한 탈녹색 환경론적 인식이다. 흔히 녹색자연에서는 인간의 간섭이 과도하지 않은 경우 자연은 쉽게 파괴되지 않으며, 일정 부분 파괴되더라도 자생적 복원력을 갖게 되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도 복구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애비는 갈수의 땅인 사막생태계에서 인간의 간섭이 발생하게 되면, 자연생태계는 특히나 쉽게 파괴되며, 일단 손상된 자연생태계는 그 스스로든,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든 회복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복원에 시간이 대단히 오래 걸린다는 점을 직시시키고 있다. 파크 레인저로서 순찰도중 애비는 도로 위에 찍힌 사슴발자국을 목격하고, 이 지역의 사슴들의 종국적인 운명에 대해 숙고한다. 사막에는 동물이 종과 개체 수에서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규모의 사냥과 같은 인간의 작은 간섭에 의해서도 이지역의 먹이사슬은 쉽게 훼손되고, 이미 멸종된 호저와 마찬가지로 “사슴들도 인간에 의한 간섭에 의해 희생될” 운명에 처해 있다(37). 즉, 포식자인 코요테와 산사자가 거의 멸종되어 사슴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나고 먹이란 먹이는 모조리 먹어치우게 되어, 결국 사슴들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논설: 관광산업과 국립공원」장에서 아치스에 도로가 들어서려는 계획에 애비가 에코테러리즘적 행동으로 맞대응하는 이유는 이곳에 도로가 건설되면 오지의 땅에 관광객이 몰려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취약한 이곳 사막생태계는 영향을 받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강 따라 아래로」장에서는 애비는 콜로라도 강에 예정된 댐이 들어서게 되면 범람과 수몰로 인해 초래될 콜로라도 강 및 유역, 주변 협곡의 수생 및 자연생태계의 파괴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살펴본바와 같이 애비는 유타 자연경관 및 환경에 대해 심미적 및 생태학적, 환경적 차원에서 탈녹색적 인식을 보이며, 그러한 인식에는 기존의 녹색자연에 대한 습성화된 지각인식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이 담 겨있다.

       2) 신화적 녹색세계에 대한 탈녹색 인식

    인간의 역사는 자연과의 관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간 문명과 문화는 자연과의 밀접한 관계 내에서 발전해 왔다. 문명의 발달로 인간이 자연에서 점차 유리되면서 인간 삶에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연을 생명을 가진 대상으로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던 원시적 믿음(신화)의 회복이 자연문학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야생자연으로 남아있던 서부지대와 프런티어 정신, 때때로 전통적인 북미인디언의 제의와 삶의 양식이 신화의 형태로 제시된다.

    애비는 온갖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로 가득찬 인간문명으로부터 벗어나 귀의해야할 낙원으로서의 원시적 녹색세계와 야생자연에 대한 신화적 믿음을 따르는 듯하다. 하지만 동시에 녹색신화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애비의 이중적인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애비는 이 작품에서 사막자연을 신화적 차원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즉, 인류사를 훨씬 뛰어넘는 지질학적 시간대에 걸쳐 진행 되어온 원시적 자연모습과 거대한 규모 및 인간의 통제를 허락하지 않는 원시적 자연환경조건에서 자연의 신성을 발견하고 경외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애비는 유타 사막지대의 특이한 자연형상과 자연생물에 대해 경이로움을 갖고 대한다. 아치스 공원의 상징물인 델리킷 아치(Delicate Arch)를 처음 마주하고 애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애비에게 델리킷 아치는 대자연이 억겁의 유구한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감탄과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원시자연의 실체로, 오랫동안 서구에서 신화로 자리잡아온 신비하고 경건한 존재이자 경이로움의 대상이 된다. 델리킷 아치와 같이 이곳 자연이 애비에게 경외의 대상이 된 이유는, 이곳의 현재의 모습이 대부분 인간의 간섭없이 인류역사보다 훨씬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되어온 원시적 자연역사의 현장이며, 더불어 인간의 존재와 의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자연의 거대한 규모와 자연환경의 원시성에 있다. “인간은 왔다가 가고, 도시는 세워졌다 사라지며, 문명도 나타났다 사라진다. 다만, 지구만이 남는다.... 사막의 태양아래선 종교의 우화나 고전철학의 신화는 녹아버린다. 안개처럼.... 사막은 인간이 부여하는 어떤 가치든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숭고하다”(243-44). 이러한 광활한 태고의 자연 안에 서게 되면, 인간은 자신을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여길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장소로의 여행은 원시적, 혹은 원초적 상태로의 회귀인 셈이다. 「강따라 내려가기」에서 애비가 뗏목에 의존 하여 글렌캐년 댐이 건설되기 전 콜로라도 강의 긴 여정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여정이 “원초적인 자유”를 찾아 “때 묻지 않은 천국”인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여행으로 삼고 있다. 상징적으로 보면, 콜로라도 강을 따라 원시적인 협곡으로 들어가는 것은 애비에게는 어머니 자궁으로 회귀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자연의 외형적 차원에서 녹색이 아닌 적색이 유타사막지형의 대표적인 색깔로 작가의 심미적 인식을 드러내는 색이었다면, 신화적 차원에서 애비는 <적색의 문명세계 대 녹색의 자연세계>라는 문화적 코드에서 녹색의 원시세계를 추구하는 듯 보인다. 즉, 서구문화에서 자연은 그 형상과 속성에서 녹색으로 코드화된 반면, 적색은 자연과 대비되는 그리고 자연세계를 점령하고 대치하는 파괴적인 문명의 모습과 속성을 상징한다. 원시적 야생자연으로 회귀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콜로라도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애비는 콜로라도 강을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진 녹색의 자연으로 기술함으로써 신화적 차원에서의 녹색세계 따르는 듯 보인다.

    사막의 열기로 인해 온통 회색과 붉은색, 적갈색뿐인 이 지역에 “에덴”과 같은 낙원의 모습을 지닌 것은 녹색의 콜로라도 강이다. 여기서 애비의 녹색의 강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은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낙원으로서의 녹색세계로 회귀하는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애비의 신화적 믿음으로서의 녹색세계에 대한 태도에는 긍정적인 면만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애비는 사막자연에서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탈인간중심적이자 심층생태론적인 인식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연으로 돌아가자’ 식의 무조건적인 녹색에 대한 근원적인 선호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다. 지금까지 애비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그가 문명을 비판하고 거부하면서 오직 원시적 자연과 야생자연만을 선호하고 옹호해 온 “반문명주의자”였다.6) 하지만,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다른 한편으로는, 애비는 탈인간중심적인 신화적 녹색자연 세상과 원시적 삶이 현대에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 역시도 시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애비는 수만년 동안 아치스를 비롯한 유타 캐년랜드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원시적인 삶을 살아온 인디언들의 자연관과 인디언들이 남긴 암각화와 암벽화, 흔적이 일부 남은 주거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자연파괴 적인 서구문명과 대척점으로서의 인디언들의 원시적인 삶과 자연친화적 태도에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애비에게 카우보이들 역시도, 인디언들의 원시적인 자연친화적인 삶과는 성격이 다를 지라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문명이 아닌 자연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영위하던 삶을 살았던 자연의 동반자였다. 하지만 이들의 현재의 모습과 처지에서 애비는 변질된 모습만을 목격할 뿐이다.

    녹색세계에 대한 애비의 신화적 믿음의 거부는 『사막의 고독』의 「월맹증에 걸린 말」(“The Moon-Eyed Horse")에서 은유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제시된다. 이 이야기는 아치스 인근 목장 에서 도망친 뒤 몇 년째 흔적만을 남기고 한 번도 목격되지는 않고 있는 거대한 말 ‘문아이’를 애비가 추적하는 이야기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목장을 찾는 관광객을 등에 태워주는 신세로 전락한 문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목장을 뛰쳐나가 사라진다. 애비는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한 번 도 본적이 없는 문아이에 대한 궁금증으로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문아이를 찾아 나선다. 애비는 이 말을 애초부터 실체로서 보다는 녹색자 연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으로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즉, 문아이는 문명과 대척점에 선 야생자연과 원시자연, 혹은 녹색세계를 이상향으로 상정 하는 신화적 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문아이가 자신이 길들여 지고 보호받던 목장을 탈출하여 사막의 원시적 야생자연으로 도망친 뒤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것이나, 무리지어 사는 동물임에도 야생지대에서 홀로 지내는 것은 문명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연으로의 귀의 습성을 상징한다. 사막의 여름열기 속에서 힘들게 며칠을 찾아 헤맨 애비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도 주변에서 유일하게 녹색 자연물인 “푸른색의 열매가 달려있는” 늙은 향나무 틈을 통해서이며, 말의 모습 역시도 푸른색과 연결된다. “말의 두개골 눈구멍을 통해 그리고 말의 늑골 사이로 하늘의 푸른색이 보였다”(186). 하지만 애비의 시야에 들어온 문아이의 모습은 원시적인 야생자연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을 맘껏 누린 모습이 아니다. 한쪽 눈은 월맹증으로 심하게 충혈되 있고, 갈비뼈는 “유골처럼 툭 튀어나와” 있으며, 목은 낙타 목처럼 아주 여위어 있는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마치 석상처럼 꼼짝 않는 문아이와 한 참을 긴장 속에 대면하면서 애비는 문아이를 “말이나 어떤 실체가 아닌 하나의 개념처럼 느낀다”(187). 문아이를 두고 “뼈만 앙상한 늑골 위에 꿈의 무게를 지고 가도록 하기 위해 애비는 신화적인 말을 만들어 냈다”(83)는 로날드(Ann Ronald)의 지적대로, 문아 이의 모습과 처지는 신화적인 믿음 속의 녹색세계 혹은 야생자연이 이제는 더 이상 이상향이라거나 무조건 추구해야할 세계가 아님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눈앞에 드러난 문아이의 처지가 가여워 목장으로 데려가고자 로프를 던졌지만 말이 한사코 거부하자, 애비는 “그래, 됐어”라고 선언하고, “그 유령같은 말에서 등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한 두어 발자국 뒤 따라 오는 말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187).

    이 에피소드를 통해 애비는 야생자연이 그 실체로서 중요하지만, 루소의 자연철학과 낭만주의 문학, 심층생태학, 초월주의 사상과 문학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야생자연과 원시적 녹색세계에 대한 신화적 믿음은 현실세계에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며 실천 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신화적 차원에서는 원시적 자연세계가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으로서 제시되고 인식되지만, 애비가 아치스에서 경험한 원시적 야생자연은 통념적인 낙원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의 혹독한 기후와 건조함, 안전을 위협하는 지형조건 등은 이곳을 찾는 인간에게 매우 위험하고 지내기에 혹독한 환경이라는 점 역시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애비가 목장주와 문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은 소나 사람과 같이 함께 모여 사는 동물입니다. 말이 혼자 지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죠”(175). 애비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인간문명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야생자연의 녹색세계 속에 함몰되어 지내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에 함몰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자연에 온전히 의탁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애비는 인간으로서의 개별적인 ‘자아’를 굳건히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애비는 작품 처음부터 이러한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애비가 꿈꾸는 신비주의는 자아를 자연에 온전히 의탁하는 심층생태론적인 생태중심주의 이상이 아닌,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면서도 자연과는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자연 과의 합일을 꿈꾸면서도 현실이라는 ‘기반암’(bedrock)에 단단히 서는 모순적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패러독스,’ 그래서 실천하기 쉽지 않은 신비주의의 추구이다.

    『사막의 고독』 마지막 장 제목, 「기반암과 패러독스」(“Bedrock and Paradox")에서 애비는 자연세계와의 합일과 현실세계의 수용이라는 주제를 다룸으로써 이 작품 곳곳에서 스스로 상반된 견해를 보여 온 녹색세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아치스에서 공원개방기간인 6개 월간의 파크레인저로서의 일을 마칠 때 쯤 되자, 애비는 “아무도 내 곁에 함께 지낼 사람이 없다는 점에 지치게” 되고(331), 인간세계의 온갖 소음과 시끌벅적함, 싸움판의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목소리와 대화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가 돌아가기로 선택한 곳은 다름 아닌 문명의 한복판 뉴욕이다. 애비는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애비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자연세계와 문명세계는 상대 없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현대의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 세계 사이의 균형과 조화, 즉, 한 세계를 배제하고 다른 세계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를 자신의 삶 속에 균형있게 조화시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로날드는 작가 에드 워드 애비가 문명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인 제약을 작품 속에 서나마 내레이터 에드 애비를 통해 현실과는 무관한 신화적 녹색세계를 추구한다고 주장하지만, 위에 언급한 인용문들에서는 내레이터 에드 애비 역시 문명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녹색세계와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사막의 고독』에서 애비는 아치스와 같은 유타의 야생사막지 대인 비녹색자연의 경관을 심미적으로 제시하고 이 지역의 생태계를 탈녹색의 관점에서 생태학적이고 환경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이와 더불어, 애비는 서구문명과 서구인의 인식에 깊이 자리잡아온 이상향으로서의 원시적 녹색세계에 현대의 문명인이 잠시 몸담을 수는 있지만, 문명세계를 버리고 자연에 귀의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그리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애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인 신화적 믿음 속의 이상향인 녹색세계와 원시적 야생자연만을 추구하는 ‘반문명주의자’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5)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서부사막건조지대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의 자연경관과 인디언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온 화가  6)Desert Solitaire: A Season in the Wilderness의 한글판 제목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한 반문명주의자의 자연예찬』에서도 애비를 ‘반문명주의자’로 상정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3. 결론

    미국 서부의 자연과 삶을 배경으로 많은 글을 남기고 서부 문학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 스테그너(Wallace Stegner)는 서부의 자연과 자연경관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각 속에 자리 잡은 자연을 녹색으로 간주하는 인식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미국 서부의 자연(경관)은 우리의 습관화된 지각의 수정을 요구하지만, 특히 색상에 대한 습관화된 지각의 극복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스테그너가 지적하는 점은 미국서부의 자연 및 자연경관의 색상은 녹색이 아니며, 자연을 녹색으로만 인식하는 습관화된 지각인식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녹색이 아닌 자연에 대해서는 낯설고 기이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다. 자연을 녹색으로 여기는 지각인식은 우리의 믿음 체계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녹색자연은 흔히 우리 주변의 나무가 우거진 산이나 초지, 강뿐만 아니라, 갈색의 도시나 환경오염 및 파괴와 대비되는 이상향이나 심미적 세계, 혹은 오염되지 않은 원시적 야생자연을 떠올리게 된다. 스테그너의 주장처럼, 미국서부의 비녹색의 자연과 자연경관이라는 외형적인 실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녹색에 대한 습관적인 지각인식의 극복을 필요로 한다. “녹색은 극복되어야 한다”라는 스테그너의 주장은 자연을 녹색으로 간주하는 습관적인 인식의 극복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7)

    에드워드 애비는 스테그너가 제기한 물리적 및 인식적 측면에서의 색상과 관련된 지각인식을 살펴보는데 가장 적합한 작가이다. 애비는 그동안 단순한 ‘반문명주의자’나 에코테러리스트로서의 ‘급진환경운동가’로서만 혹은 작품 내에서 상호모순적인 관점을 펼치는 정치하지 못한 작가로 치부됨으로써 비평적 관심에서 소외되어 왔다. 하지만, 『사막의 고독』을 통해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애비는 사막의 비녹색 야생자연에서 심미적이고 생태학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발견하며, 그럼으로써 미국의 문화와 가치관에 내재된 녹색자연에 기초한 기존의 심미적이고 친생태론적, 친환경론적 인식에 도전한다. 애비는 더 나아가 자연/문화 이분법을 거부하고 현대의 삶에서 자연과 문명사회 둘 다 필요하며, 삶에서 두 세계의 조화와 균형을 주장함으로써 심상의 ‘녹색세계’에 대한 일반화된 인식에 도전한다.

    애비에 대한 생태비평적 평가와 의의는 사막자연에 대한 심미적이고 생태학적, 환경론적 태도에 드러나는 애비의 탈녹색자연 인식 및 녹색자연과 적색문명의 조화와 균형을 통한 녹색자연에 대한 탈신화적 인식의 극복에서 찾아져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문명사회에 발을 딛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식의 반문명주의적 태도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퀴글리가 말하는 우리 생태비평가들이 애비에게 “진 빚”은 다름 아닌 녹색자연과 녹색세계, 야생자연에 주로 천착해온 기존의 생태비평적 인식과 태도, 즉, 생태비평 자체의 ‘녹색 극복하기’이어야 한다.

    7)에드워드 윌슨(E. O. Wilson)의 ‘바이오필리아’(Biopohilia)이나 사회심리학에서 언급되는 ‘사바나 신드롬’(Savannah Syndrome), 색채심리학은 녹색자연의 심미적 인식 및 심리적 수용의 보편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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