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의 생태비평적 의미

Humanness in the Wilder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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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meaning of humanness in Sigurd F. Olson’s ecological aesthetics. The qualities of aesthetic appreciations of nature among human beings range from a primitive sensitivity to neighboring natural objects to a higher cognitive capacity to analyze the natural phenomena; whereas the same qualities among animals are presumed to converge on the intense primitive sensitivity to their surroundings. The different dimension of aesthetic appreciations between human beings and animals should not be views as the revelation of their dominance relationship in the wild nature. Rather, the commonality of their primitive aesthetic sensitivity serves as evidence for their ecological equality. The disinterested gaze in the wilderness often degrades natural things to the abject ‘other.’ Olson reinterprets disinterestedness in modern aesthetic theory through the lens of acentric environmentalism and aesthetic engagement. The true meaning of humanness starts from indulging oneself to the physical nature. The initial step of aesthetic experience is to mobilize one’s primitive sensitivity to feel the natural beauty; the second, to approximate to the universal order; and the last, to comprehend the right place of my identity in the universe. This change shows from the sharpening of affective ability to the development of cognition for environment. Olson thinks that anthropogenic activity in the uncharted nature is not always anthropocentric. To him, understanding the value of harmony and balance between nature experiences and philosophical meditation is crucial to the perception of human location in the physical nature.

  • KEYWORD

    생태비평 , 생태미학 , 심미주의 , 생태평등주의 , 야생 자연 보전 , 올슨 , 근대미학론 , 미국 자연기

  • 1. 서 론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Minnesota)주의 북쪽에 자리를 잡은 항구도시 덜루스(Duluth)에 들르면 슈피리어호(Lake Superior) 주변으로 지은지 수십 년이 지난 고풍스러운 맨션들을 볼 수 있다. 덜루스는 20세기 초중반에 미네소타의 철광석과 목재를 오대호 연안의 산업지대로 송출하면서 번성한 곳으로, 당시의 부자들은 호숫가에 이들 고택들을 지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여유로운 삶을 누렸지만, 이런 그림같은 풍광은 자연자원 개발로 인한 야생 자연의 상실로 인한 대가일 따름이었다.

    20세기 환경운동가이자 자연기 작가인 올슨(Sigurd F. Olson, 1899~1982)은 이런 현실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산업화 열풍 속에서 우거진 산림과 수많은 호수로 알려진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 북부 일대의 야생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염려하면서 야생 자연 속에서의 심미적 체험을 강조하였다. 올슨은 쏘로우(Henry David Thoreau), 뮤어(John Muir), 버로우즈(John Burroughs), 레오폴드(Aldo Leopold)처럼 야생 자연에 관심을 기울인 생태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사유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는 뮤어처럼 신이 만든 자연을 지키는 신성한 청지기의 사명을 되뇌면서 미국의 변경 체험을 통해 문명인이 잃어버린 활력을 회복하고 야생자연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는 레오폴드처럼 대지의 윤리(land ethic)을 주창하며 자연의 본래적 가치를 내세우기도 했다.1) 올슨은 선대 생태사상가들의 진지한 야생 보전 노력에 자신만의 독창적 사유를 덧붙여 나갔다.

    생태사상가로서 올슨이 지니는 독창성은 생태체험의 심미적 특질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생태사상의 심오한 차원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평이한 문체로 자신의 체험과 기존 문인들의 목소리를 담백하게 진술하는 올슨의 목소리는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신이 빚은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뮤어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나, 유일신을 찬양하는 종교적 수사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범신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또한 20세기 후반의 심층생태학에서 강조하는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몸담은 지역의 자연을 체험하며 생태적 예지(ecosophy)를 얻는 것에 찬성하지만,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인간다움을 긍정하면서 문명의 이기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표명한다(RNC 7).

    위와 같은 생태비평적 성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슨과 벌린트가『자연 환경의 심미성』(The Aesthetics of Natural Environments)에서 지적하듯이, 올슨을 포함하여 자연에 대한 심미적 이해를 도모한 근래의 작가들은 고전적인 자연기 작가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학문적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였다(Carlson & Berleant 24). 본 논문에서는 이런 문제의 식에 공감하면서 심미적 체험의 생태비평적 의미를 중심으로 올슨의 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퀘티코-슈피리어(Quetico-Superior) 지방으로 알려진 북부 미네소타 일대에서 올슨이 야생 자연을 사계절 동안 체험한 기록인『노래하는 야생』(The Singing Wilderness, 1956)과 생태사상문집인『북쪽 지방에서의 사색』 (Reflections from the North Country, 1976)을 중심으로 그의 생태사상을 살펴볼 것이다.

    1)Sigurd F. Olson, Reflections from the North Country (Minneapolis: U of Minnesota, 1998) 7. 이하 괄호 안 RNC와 숫자는 위의 도서 해당 페이지를 의미한다. 또한, 아래 도서의 인용 역시 괄호 안 SW과 숫자로 표기한다. Sigurd F. Olson, The Singing Wilderness (Minneapolis: U of Minnesota, 1998). 또한 에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본 논문에서는 두 책의 화자를 올슨과 동일하다고 간주한다.

    2.『노래하는 야생』: 생태주의자로의 성장

    올슨의 대표적 자연기로 꼽히는『노래하는 야생』은 사계절에 걸쳐 야생 자연을 경험하여 얻게 된 올슨의 인식 성장을 기록한 책이다. 그는 자연 경험이 문명인의 닫힌 귀를 열리게 하여 생명의 연결 고리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파악하도록 이끄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이해한다. 그는 무엇을 듣는지 비록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할지라도, 그 속에서 아픔과 치유의 메시지를 감지하는 경험을 한다고 느낀다(SW 7). 그는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감각기관을 통해 포착 하고 느끼려는 정서적 욕구를 품은 채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의『팅커크릭의 순례자』 (Pilgrim at Tinker Creek, 1974) 속 화자처럼 자연으로 숨어 들어가 관조하며 은밀한 즐거움을 만끽하려 한다.

    이처럼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는 화자에게서 자연 관찰과 정복을 시도한 백인 개척자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기도 한다. 여름에 카누를 타고 야생을 탐사하며 마치 19세기 초반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Lewis & Clark Expedition)에서 배를 들어 옮기는 고난한 여정 속에서 언제 닥칠지 모를 외부의 위협을 걱정하면서도 전인미답의 고지를 밟는다는 우쭐함에 고독을 즐기는 모습에 이런 점이 잘 묻어난다(SW 82). 야생 자연의 숨은 매력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안락함을 느끼는 가운데 혼자 즐길 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SW 42). 그는 문명을 벗어나 자연 속에 들어가면서도 안락함 역시 포기하지 않는 양가적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야생 자연과 심미적 거리를 유지하는 점은 송어가 팔딱거리는 모습에서 야생 자연의 생명력을 느낄 뿐 생명체로 느끼지 않는 모습에도 나타나있다 (SW 69). 이런 이유로 인해 화자는 누군가 자연 속에 자기 말고도 존재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갑자기 즐거움이 사라졌다”(SW 48)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이 선사하는 즐거움은 나만의 완전한 야생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염탐꾼(voyageur)처럼 나만의 은밀 함을 즐기고자 고정불변의 야생 자연을 갈구한다(SW 102). 그러나 화자는 야생 탐사를 할수록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무언가와 맞닥뜨리며 내면에서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것을 깨닫게 된다(SW 89). 화자는 시간이 흘러 다시 그곳에 가보았을 때 자연이 원래 그대로임을 확인하고 나서도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SW 102). 이런 불안정한 마음상태는 자연의 물리적 변화보다 인간의 흔적이 도처에 널려있는 상황변화로 인해 고적함이 사라진 야생 자연을 홀로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옛 사람들에게도 조용함이 사라진 것이 정령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SW 105)라며 야생체험의 본질이 고적함에 침잠하는 것인지에 관해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런 생각은 문명의 야생 침투와 인간의 흔적이 이내 사라지는 뱃소리와 다르지 않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화자는 물리적 자연이 어떠냐는 것보다는 내적 평온함(tranquility)을 유지하면서 내면의 눈과 귀를 열어 자연이 보내는 신호들을 감지할 때 야생 자연은 비로소 불가해한 모습을 하나씩 벗고 자신을 드러낸다(SW 130-31)고 결론을 내린다.

    화자는 과학적 탐구와 지식의 축적보다 야생 자연을 감성적으로 접근 하는 것을 통해 자연 물상의 상호의존성을 느끼는 것에 방점을 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과학이란 그저 자연의 질서를 짐작하는 것일 뿐 [본질 그 자체를] 결코 알지 못한다”(SW 162)고 말한다. 과학은 문명을 일으켜 세운 원동력일 수 있으나 자연 질서 속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완벽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화자는 야생 체험을 통해 과학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내세우는 문명의 논리와 다른 차원의 자연 이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올슨의 생각은 “자연적 환경 모델”(the natural environmental model)이라 불리는 자연 감상과 구분된다. 자연적 환경 모델은 크게 두 가지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상상의 힘을 과도하게 투사하지 않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자연과학의 지식과의 연관성 하에서 자연을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Carlson, Aesthetics and the Environment 6). 비록 과학 지식과 같은 인지적 자연 이해의 효용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올슨은 물리적 자연의 본질이 물성을 파악하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고 본다.

    화자의 자연 체험은 자연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진다. 그는 덜루스 항구의 지저분한 모습과 깨끗한 입성을 한 숲 속 새들을 대조하면서, 문명이 인간 본성의 발현을 막았을 뿐 아니라 자연보다 지저분하기까지 하다고 토로한다 (SW 62). 이런 화자의 주장 속에는 20세기 중반 미네소타를 비롯한 미대륙 중서부 일대에서 철광석을 캐고 숲을 남벌하여 원시 자연이 사라 지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불도저로 아름다운 원시 자연을 밀어내면 “우리는 물을 가두는 분지, 새들과 야생 생명의 최후 도피처 뿐만 아니라 과거의 박물관들, 시간의 도전을 견뎌온 생태계의 안정성 하에서 인간들이 변화해온 본보기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SW 175). 즉, 생태계 파괴는 생명체의 보금자리와 아름다움의 상실 뿐 아니라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생태계와 조응하여 온 역사의 상실을 뜻하기도 한다.

    올슨의 시각에서 생태계의 보존은 인간성의 보존과 궤를 같이 한다. 화자는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숲의 냄새를 탐지하면서 단순히 자연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상들과의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문명은 인간의 본성을 억눌러 버렸으나, 숲으로 들어와 감각기관이 무장해제되면 나를 둘러싼 시공간과 맺고 있는 유대가 드러나게 된다. 즉, 자연을 알게 되는 것은 곧 나를 아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숲에서 감각기관을 열어놓으면 인간의 오르간 연주와 자연의 노랫소리가 합쳐진 나머지,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인간 속에 자연이 녹아들어 있음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SW 64). “내 주변 아래에 깔린 낙엽송 뾰족한 잎사귀들의 금빛 카펫에는 온갖 기후 변화, 온갖 산불, 여태까지의 온갖 식물 침입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SW 174)는 것에 드러나듯, 야생 자연 속에서 다양한 생명체를 응시하는 공시적 차원의 의식작용은 그 속에 담긴 역사성을 떠올리는 통시적 의식작용과 다르지 않다.

    고요한 야생 속에서 심미적 거리를 갖고 각각의 생명체가 땅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 성장하는 모습을 느끼는 작업은 자연과의 유대의식을 느끼도록 한다. 여기서 자연 속에 몸소 뛰어들면 이런 심미적 거리가 줄어들어 물아일체를 통한 내적 충만함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된다. 화자는 고적한 한밤중에 오로라가 비치는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땅에서 절연되어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는 것”(SW 185)을 느끼는 내적 충만함을 경험한다.

    화자는 얼음판 위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오로라를 광자(proton)의 움직임이라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시대에 귀신의 춤으로 설명하는 치페와사람들(Chippewas)의 설명방식이 여전히 통용되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물리적 진실이 비실재적인 감각을 대체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오로라 불빛들이 북쪽에서 전달하는 감각이 중요한 것”이기에 과학적 진실은 “저 북쪽 불빛들은 나의 일부이고 나는 그것들의 일부”라는 느낌 자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SW 187). 과학의 시대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이를 통해 느끼게 되는 자연과의 유대의식은 여전한 것이다.

    자연과 자아의 거리, 소위 심미적 거리가 없어질 수는 없겠지만, 화자는 이를 최대한 좁히고자 자연 속에 뛰어들어 아름다움의 다양한 일면을 목도하고 자연과의 물아일체까지 경험한다. 이처럼 화자와 자연 사이의 거리가 최소화되면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위계도 희석된다. 이런 점은 무생명을 대하는 도덕적 태도를 중시하는 “비중심적 환경주의”(Acentric environmentalism)와 연결된다. “생명과 무생명을 구분짓는 어떤 도덕적 관계도 비중심주의 앞에서는 효용을 상실한다”는 표현에 잘 드러나듯이, 비중심적 환경주의는 “관점없음의 보편성”(non-perspectival universality) 을 내세우며 인간, 생명, 자연물상의 파편화에 반기를 든다(Godlovitch 135). “관점없음의 보편성”은 관점 자체의 부재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 사이의 우열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올슨은 ‘나’와 외부 대상의 상호침투성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관점을 버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것을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비중심적 환경주의는 자연을 규정할 때 ‘불가해한 것’과 ‘인간과 다르다는 것’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자 연이 밑바닥을 측량할 수 없기에 궁극적으로 신비롭다는 생각, 그리고 자연이 ‘분류상으로 우리와 다른 것’인지라 ‘우리와 결코 한 부분이 아닌’ 무엇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빠져 나간다”(Budd 145)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 자체의 불가해성은 자연을 신비화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으며, 자연이 우리와 다르다는 인식 역시 타자화 논리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인간적 관점은 언제라도 자연을 이해할 때 섞일 수 있으며,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비중심적 환경주의는 인간중심적 자연이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중심적 환경주의를 인간중심주의와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야 말로 자연물상에 대한 타자화 논리와 공모한다고 볼 수 있다.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감지하는 자연 체험은 생태계 속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깨닫도록 한다(SW 192). 눈은 “질서, 평화, 그리고 단순함의 세계로 돌아가게 됨”(SW 193)을 의미하기에 안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화자는 오로지 자신만 덧신을 신고 눈 위를 걷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만, 이내 큰어치(blue jay)가 앞에서 날아오르는 광경을 목도한 후 혼자가 아님을 확인한다. 그는 숲에서 다양한 생명체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모두가 생명과 노래로 충만한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SW 194)라고 상찬한다. 그가 야생의 아름다움에 경이를 표한 이유는 자연으로부터 이격되어 고립감을 느끼는 찰나에 “동료 생명체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화자는 눈이 내려 온생명을 덮어버린 것 같은 분위기 하에서 문명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정체성을 일개 생명체로 규정한다. 그는 이런 가운데 생명체들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이들과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고 안도 차원을 뛰어 넘어 즐거움마저 느끼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화자가 자연의 일부로 느끼게 되는 생태적 차원의 자유는 나만의 공간에서 느끼는 근대적 개인의 자유와 구분된다. 이런 의미에서 올슨은 생태적 차원에서 자유를 재해석한 셈이다.

    올슨은 자연물상에서 경이로움을 체험하는 공존의 미학을 내세웠다. 이런 그의 사상이 지니는 의미는 자연 경험의 양태를 두 가지로 구분한 브래디(Emily Brady)의 견해와 관련지으면 명료하게 파악 가능하다. 브래디에 따르면, 숭고미(the sublime)는 심미적 가치에 귀속되는 것으로 우리를 거대 자연 앞에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면서 “크기와 힘”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두 번째 양태인 경이로움은 크기와 상관없이 “두려움이 라기보다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우리를 놀라게 하여 인간적인 것과 구분되는 무언가를 감지토록 하는 것이다(Brady 197-98). 위의 분류와 관련하여, 올슨의 자연 체험은 압도하는 자연 앞에 인간이 왜소해지는 체험이 아니라는 점에서 후자에 가까운 듯 보인다.

    공존의 미학 속에는 생명체들을 마주하는 것 이외에 혹한 속에서 고통을 겪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이해하고 담담하게 수용하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다. “모든 형태의 생명은 이것[혹한의 고통을 견디고 죽음을 이겨내어 강자가 살아남아 봄에 새끼를 키우는 과정]을 준비하여 패닉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엄혹한 환경을 받아들였다”(SW 196)는 말 속에는 가시적 아름다움을 뛰어 넘는 자연 질서의 이해와 수용도 심미적 생태사상의 한 축이라는 사실이 녹아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은 화자가 봄부터 가을까지 일차원적 차원의 야생 자연 체험을 거치며 생태적 사유가 깊어진 것에 기인한 것이다.

    자연이 보내는 신호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 사이의 공존이라는 공시적 차원과 예전부터 항상 그래왔던 것이라는 통시적 차원을 모두 포괄 한다. 그는 이런 점을 오케스트라와 자연의 음악을 비교하는 아래의 언급을 통해 설명한다.

    과거부터 그래왔던 “일종의 야생의 음악”은 화자의 심금을 자극하여 “이상한 느낌들이 내 안에서 고무”되는 체험을 하도록 유도한다(SW 202). 화자는 겉으로 볼 때 다른 목소리로 각자가 소리치는 것 같아도 ‘나, 주변 생명체, 과거’의 삼각관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영향관계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통나무집으로 들어가 구멍을 통해 붉은 다람쥐가 들락거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다람쥐를 막는 요즘의 통나무집 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SW 206)라며 인간과 동물이 야생 자연을 공유하고 있음을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야생 자연 속에서 동물은 단지 화자에게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객체가 아니라 공존하는 동료로 격상된다. 인간은 야생 자연이 위해를 가할 것이라고 의심을 품은 채 문명이라는 담을 쌓고 자연과의 교류를 차단하였으나, 이런 담이라고 해서 야생 자연과의 교류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갇혀 홀로 지내면 몸은 편할 수 있어도 ‘나’라는 존재의 본질적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화자는 야생 체험을 할때 편안한 텐트를 버리고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통나무집을 선택한다. “이런 통나무집들에서는 야생이 언제라도 노래”(SW 208)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더 나아가 공존의 범주 속에 비인간 생명체 이외에 암석과 같은 무생명체까지 포함시킨다. 무생명체의 특징은 문명의 흔적에 쉽게 지워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자는 인류와 지구의 역사를 기록하는 무생명체의 생태적 가치에 주목하는 “지질학적 상상력”(geological imagination)을 발휘하고, 이는 앞에서 언급한 비중심적 환경주의와 연결된다.2)

    이와 같은 논조로, 화자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리들 아래의 지하 세계, 깨끗한 모래, 하얀 암석, 뱀장어처럼 일렁이는 풀잎의 일부인 듯”(SW 212) 느끼기 시작하였다고 고백한다. 이런 상상력은 야생 체험을 통해 획득한 것이다. 기계에 의지하여 안락하게 야생을 둘러본다면 넓게 관조하면서 시각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야생 속에 들어가 구체적인 물상을 마주하면서 얻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에 지질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틀에 박힌 패턴에 따라 휴일을 보내는 등 개인화된 체험으로 야생을 접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화자는 정형화된 소비적 야생 체험이 아닌 개인마다 다양한 야생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화자는 물리적 자연의 유한함으로 인해 개인화된 야생 체험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야생 공간의 고적한 기운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SW 133). 화자는 물리적 자연의 공유 여부 보다는 사람 들이 그곳에서 자기만의 심미적 체험을 거쳐 보편적 생태 이해를 지향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올슨은 생태주의자로서의 의식 성장을 보여준 것이다.

    올슨이 보여준 지질학적 상상력은 ‘나’의 사적인 관심이 아니라 ‘내 안의 이성’에 입각한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것이 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심미적 사유는 칸트(Immanuel Kant)의 “사심없는 관심”(disinterested interest)으로 대변되는 서양의 근대 미학론과 연결된다. 칸트에 의하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심없이 대하는 것은 “나의 관심이 아니라 내 안의 이성이 가지는 관심”을 뜻한다(Scrunton 24). 즉, 사심없는 즐거움은 안으로부터 솟아나는 즐거움의 일종으로, 특정한 의도를 갖고 “대상에 초점을 두며 사유에 의존”(Scrunton 25)하는 지적 유희의 산물인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은 객관화된 시선을 취하여 관조자의 입장에서 자연물상의 존재를 질서정연하게 구성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심미적 자연 체험은 관조자가 자신의 관점을 잊고 자연 속에 몰입하도록 한다. “자연계의 바로 이와 같은 ‘거기있음’(there-ness)은 내가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게 되어, 이제 하나의 유리한 시점으로부터 바라보고, 이제는 또 다른 시점을 취하고, 이제는 한방식으로 기술하며, 이제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기술하도록 하는 것이다”(Scrunton 60). 결국, 생태적 입장에서의 사심없음이란 관점의 사상 (死狀)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들의 인정・수용・종합인 것이다. 오히려 개체마다 품고 있는 상이한 관점이 다양하게 공존하지 못한다면 심미성의 이론적 기반은 빈약해진다(Carlson, Nature 18). 사심없음에 입각한 고차원적 사고를 통해 다양한 자연 양태와 체험이 심미적 차원으로 고양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올슨은 근대미학론의 사심없음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생태 미학적 차원에서 풀어내고 있다.

    야생 자연 체험은 ‘고상한’ 심미적 담론은 얼음낚시와 사냥처럼 상이한 일차원적 기쁨을 매 순간 느끼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올슨은 마치 포식자라도 된 듯 얼음낚시를 하며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승리감을 만끽한다(SW 213). 그는 작살로 물고기를 내리찍는 행위를 폭력적 살육이 아니라 생태계의 한 부분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 간주한다. 이런 점은 그가 “우리가 잘라낸 구멍에 이내 얼음이 두꺼워 질 것”(SW 215)이라며 야생 자연의 자정능력에 신뢰를 보내는 대목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는 고적한 겨울 숲에서 생명체들의 노랫소리를 경험했듯이 얼음낚시를 통해 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신호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이 야생 자연 속에서 티끌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당당 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행위가 결코 반생태적인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직접적인 야생 자연 체험을 강조하던 화자의 태도는 늑대들(timber wolves)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자 이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점은 마치 수백 년 전 식민지 시절에 청교도들이 “울부짖는 야생”(howling wilderness)이라고 숲을 규정한 것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 다. 화자가 본능적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취한 전략은 두 가지 이다. 하나는 비록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녀석들이 화자를 관찰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인간을 제외한 대륙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문명의 울타리에 숨는 것이다(SW 241). 다른 하나는 겨울에 늑대들이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사실 이외에도, 늙고 병든 녀석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사슴무리가 경계심을 갖고 새끼를 많이 낳아 번식하도록 이끌어 결과적으로 생명 순환에 이바지한다고 정당화시키는 것이다(SW 242).

    화자가 어느 늑대와 근접한 거리에서 쳐다보며 눈싸움을 한 경험을 기술한 대목은 위의 두 가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안락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는 통나무집으로 돌아와 밖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음악이라며 심미적 거리를 두고 감상하기 시작한다. 늑대 여섯 마리가 비행기로 사냥을 당한 뉴스를 떠올리며 인간의 무지함으로 늑대의 씨가 마를 것이라고 걱정을 늘어놓는 것 속에서는 직전에 경험한 위험하면서도 움찔한 체험이 뒷전으로 밀려나있다. 그가 “우리는 오늘날 두려움없이 야생을 즐길 수 있다는 점, 포식자들이 자연 생태계 균형에 역할을 담당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SW 244-45)고 언급한 대목에는 직전에 경험한 움찔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점은 뮤어가 깎아지른 절벽에서 움찔함을 느끼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두려움을 극복하여 인간적 나약함은 저만치 사라졌다고 간주하는 것과 정반대이다.3) 어느 쪽이 올바르다고 확언할 수 없지만, 뮤어는 자연과의 거리를 극도로 좁혀 놓고 정서적 몰입을 체험한 반면에, 올슨은 안전이 담보된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보존가치를 생각한다.

    야생 자연 체험 속에는 즐거움과 위험이 동시에 담겨있다. 화자는『 노래하는 야생』을 아래와 같이 끝내며 자연보호라는 대의를 내세워 후자를 교묘히 덮어버리는 듯하다.

    화자가 안락한 침낭에서 “선을 넘지 말고 뛰노는 자연을 바라보라”는 쏘로우를 읽은 모습은 야생 자연 체험의 중요성에 관한 지금까지의 언급이 퇴보하는 것이라는 느낌마저 준다. 그가 침낭 속에 웅크린 이유는 겉으로 야생 보호를 외치고 있지만 늑대와 신경전을 벌이며 경험한 움찔했던 느낌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쏘로우를 인용하며 인간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에는 이런 그의 생각이 담겨있다.

    이렇듯 저자가 야생에 직접 뛰어드는 것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것 같은 인상을 풍기며 글을 마무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전 벨트가 사라진 놀이기구가 더 이상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하듯, 올슨은 인간이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심미적 감수성을 발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쉬(Roderick Frazier Nash) 또한 이를 두고 “올슨은 도시와 자동차와 내연기관의 경적소리 한 가운데에서 산 경험이 없었더라면 평온하게 지탱해주는 존재로서 야생의 매우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깨달았다”(Nash 245)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올슨은 섬세한 자연 관찰이라는 미덕을 보여주었음에도 철학적 묵상이 라는 ‘큰 깨달음’에 경도된 쏘로우의 엘리트적 자연감상이 범인들의 자연 체험과 괴리된 것임을 에둘러 비판하였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올슨은『노래하는 야생』을 통해 심미적 차원에서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인간다움의 의미를 부단히 재인식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그의 생태사상은 인간 우월적 사고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비중심적 환경주의에 가깝다. 인간다움을 포함하여 올슨의 생태사상에서 심미적 체험이 지니는 의미는『북쪽 지방에서의 사색』에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지질학적 상상력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아래의 논문에 제시되어 있다. 이동환. 「생명과 무생명의 경계: 미국 서부 자연기와 무생명의 생태학」. 『문학과 환경』 12.1 (2013): 105-32.  3)뮤어가 낭떠러지에서 아찔한 경험을 하는 대목은 아래의 두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나의 첫 여름』(My First Summer in the Sierra, 1911)에서 “나는 바위가 쪼개져 나를 밑으로 내던질 것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니, 3천 피트가 넘게 떨어진다고!”(Muir 220)라며 두려워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발걸음을 옮기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캘리포니아 산맥』(The Mountains of California, 1894)에서 “내가 곧 떨어질게 틀림없다!”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이내 경탄하면서 “내가 감자기 새로운 느낌에 도취된 것 같았다”고 고백하는 대목이다(Muir 355). 뮤어는 위의 두 군데에서 자연의 아름다움 덕분에 두려움마저 극복하는 용기가 생겨 마침내 육신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고백한다.

    3. 『북쪽 지방에서의 사색』: 심미적 생태주의의 형성

    올슨의 후기작 중 하나인 이 글은 자연물상을 대하는 태도를 기술하는 것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는 점에서 그의 생태사상논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란 생존을 위해 주변 사물을 수집하려는 욕망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크기와 방향성이다. 문명인의 수집 욕망은 음식을 얻는 것부터 문명의 이기와 예술품까지 다양하게 뻗쳐있다. 올슨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수집욕망의 핵심은 자연 속에 몰입하여 “영원한 자연 신호 수집가”가 되어 “항상 찾으려 하면서” 매 순간에 서로 다른 느낌을 받아 깨달음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다(RNC 10). 동일한 야생자연을 접하더 라도 개인마다 상이한 체험을 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야생자연은 미국적 개인성이 구성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수집 욕구는 배타적 물질 소유가 아니라 매 순간 다른 감각적 즐거움을 기억 속에 쌓아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생태중심적 사유와 대치되지 않는다(RNC 12). 그는 오히려 작금의 자본주의 체제가 불어넣는 욕망이야말로 삶의 터전 속에서 우러난 진짜 욕망이 아닌 허위관념이라고 본다. 따라서 올슨에게는 문명인의 욕구가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어떤 방향으로 욕구를 발산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올슨이 생각하는 문명인의 문제점은 욕망의 획일화이다. 문명인은 재화를 소유하는 것에 매몰된 나머지, 자연의 다양한 신호를 감지하는 심미적 체험을 통해 자연의 보편성을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상이 어떠한지 깨닫지 못한다. 대량생산된 재화에 파묻혀 감각의 단련이 이루 어지지 않았기에, 야생자연을 접하더라도 자연의 신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처지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올슨의 생태사상은 환경교육적 측면에서 시사점을 준다.

    자연의 소리를 듣기 위한 첫 단계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정신과 육체의 복잡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속에 몰입하며 자연의 작은 소리까지 들으며 문명인의 기계적이면서도 분주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느린 움직임의 일부”(RNC 30)가 되는 심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 올슨은 이를 두고 “창조적 침묵”(RNC 33)의 순간이라 명명한다. 창조적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분주한 것들이 느려지면서 어느덧 영원함(timelessness)에 이르게 되어 자연 본연의 리듬감 속에 침잠하여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처럼 “창조적 침묵” 이후 “완벽한 망각”(RNC 116)까지 이르게 되면 선(禪)의 화두라 할 수 있는 아집에 사로잡힌 자기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른 다(RNC 143). 관조는 개인적 실천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통하여 개인의 내면과 외부세계의 상응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자연 물상과 교류하며 매순간 감지하는 서로 다른 정서적 체험을 대상에 대한 보편적 이해로 승화시켜 특이한(idiosyncratic) 자아상으로부터 벗어나 보편적인 차원으로 나간다(RNC 132). 이렇듯 자연물상의 이미 지와 움직임을 감지할 준비를 갖추면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우주적 관점 역시 얻게 되는 것이다(RNC 38). 올슨의 자연 체험은 보이지 않는 큰 질서를 깨닫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19세기 중엽 미국의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를 환기시킨다.

    올슨은 작금의 백인과 달리 보이지 않는 원주민의 삶을 자연질서에더 가까이 다가선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상적인 미래를 원시적인 (primitive) 가치와 연관짓는다(RNC 43). 자연에 깃든 이상적 질서에 대한 신뢰는 오스틴(Mary Austin)이『갈수의 땅』(The Land of Little Rain)에서 주장한 자연경제론, 즉 자연질서 속에는 잉여나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연결된다.4) 올슨은 여기서 더 나아가 끊임없이 자연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미지의 영역에 깃든 질서를 감지하게 되는 인간의 역동성에 주목한다(RNC 46). 이처럼 올슨의 사상은 “생태계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있는”(RNC 48) 인간의 성찰적 지식에 기반하여 인간다움(humanities)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생태적 깨달음과 별개가 아님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심층생태학의 강령과 (본질이 다르다기보다) 그 강조점이 다르다.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다움을 제대로 갖추어 자신이 자연의 부분임을 이해하는 가운데 드러난다. 그렇기에 인간은 문명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태도, 즉 미지의 자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자기 내면의 신의 왕국을 깨닫기”(RNC 48)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올슨은 생명 사랑을 통해 자연의 신호를 읽어내고 인간이 그 속에서 부분으로 움직 이고 있음을 지각하고 실천하여 자연 질서 이해에 한 발 다가서도록 요청한다. 이런 한 번의 깨달음은 다른 도전으로 연결되며, 이런 연쇄 과정을 통해 만물의 다양한 상호연계망(intersubjectivity)을 알게 된다 (RNC 55, 56).

    올슨은 개별적 차원의 자연 체험을 통한 생태적 인식의 변화를 아래의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심미적 만족을 느끼는 단계이다. 이단계는 자연 물상의 다양함을 매 순간 경험하며 정의적 영역의 내적 변화를 체험하는 과정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자연의 숨은 질서를 발견하여 인지적인 확장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특별한 개인의 심미적 경험이 쌓여 보편적 자연 이해로 확장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자신이 대자연 속에 독야청청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는 단계이다(RNC 57). 이런 깨달음은 제머슨(Fredric Jameson)이 말하는 “인식의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과 유사하다.5) 그렇지만 시야를 넓혀 거대 시스템 속의 개인의 위상을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둔 제머슨의 강조점과 달리, 올슨은 개인이 주변과 교류하며 조화를 이루기 위해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야생자연 속에서 전체의 부분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개인마다 상이하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 속의 일부라는 나름의 깨닫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체험을 머리에 저장한다. 올슨은 각각의 기억이 자연 속에서 나만 경험하는 내밀한 즐거움을 수반할 때라야 쓸모있게 활용가능하다고 이해 한다.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자연기인『노래하는 야생』(The Singing Wilderness, 1956)의 다양한 자연 체험을 통해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가 생각하는 기억의 본질은 아름다운 순간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맹목적인 심미적 비전에 매몰되는 유미주의와 구분된다.

    올슨은 자연의 균형과 조화란 약육강식으로 드러나는 먹이사슬의 특정 국면이 아니라 생명 순환을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자신도 그 속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신성한 불꽃은 온전히 우리 안에 있다”(RNC 117) 는 말에 녹아있듯이, 생명의 순환고리는 작은 개별 생명체 속에 깃든 우주 질서를 읽으면서 각각의 존재 이유를 찾는 가운데 드러난다(RNC 69). 여기에서 말하는 개체들은 차가운 시스템 속에서 특정 지점에 고정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오래된 이 땅이 우리의 집”(RNC 64)임을 깨닫고 애정어린 눈으로 주변과 교류하는 동적인 존재이다. 개체의 약동하는 생명력(aliveness)은 외부 자극에 대한 두려움이나 배고픔과 같은 내적 결핍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개체 차원에서는 고통과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심미적 자연 체험으로 얻은 통찰력에 근간하여 이것을 바라보자면, 전체의 부분이라는 생태계 내의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가 되는 것 (oneness)으로, 자연의 균형과 조화를 인지적으로 깨닫고 정의적으로 공감이 모두 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RNC 81). 생명 순환의 우주 질서가 개별 생명의 안락함과 무관하다는 올슨의 입장을 감안할 때,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개들이 발에 피를 흘리며 돌아다니는 것도 존재의 이유와 관련된 생명력의 발산에 해당된다. 개체들은 반복 체험의 각인효과로 인해 고통을 참고 좋은 시절을 기다리지만, 우주적으로 보면 개체의 흥망 성쇠는 먹이사슬에서 포식자에게 희생되는 생명 순환의 일부일 뿐이다 (RNC 99).

    인간의 인식은 위와 같은 우주질서를 이해하면서 고차원적 심미성에 입각한 자연 감상을 지향한다. 인간은 자연 물상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모종의 규칙성(조화)을 감지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개체들의 관계망으로 확장하여 조화로운 비전을 이해하고, 종국에는 우주의 본질적 가치를 포착하는 단계를 지향하면서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RNC 92). 매 순간 변화하는 자연물상의 상호주관적인 망 속에서 순간의 조화에 집중하 다보면 “아름다움은 홀로 서는 것이 아니”(RNC 83)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실제로 “많은 야생지역들에서, 자연스럽다고 간주된 경우는 생태적 가치에 관한 객관적이고 양적인 지표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기에, 이들 지역들에서 “자연스럽다고 인지된 경우에 때때로 풍광이 아름답고 결과적으로 풍광이 아름다우면 때때로 생태적 가치가 높기도 하다”(Gobster, et al. 967).

    올슨이 생각하는 고차원적 심미성은 근대 미학론에서 전제하는 인간의 주관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는 동물에게도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간중심적 심미주의가 아닌 생태적 심미주의를 내세운다.

    올슨은 동물이 인간과 같은 인지 분석적 사유를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유전적 소질은 인간보다 오히려 뛰어날지도 모른다고 본다. 이런 그의 생각은 생태비평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심미적 향유능력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면, 야생자연 속에서의 심미적 감지능력을 기준으로 하여 인간과 다른 생명체가 동일 선상에 놓이는 생태평등주의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일차원적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야생자연의 다양한 물상을 인지적으로 분석하면서 우주 질서를 이해하는 고차원적 심미적 능력을 발휘한다. 반면에, 동물은 자연 물상을 인지적으로 처리하지는 못할지라도 인간보다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차원적 심미적 감지능력을 매순간 강렬하게 느끼며 삶을 영위한다. 올슨은 위와 같은 인간과 동물이 지닌 심미성의 차이를 우열관계로 파악하지 않는다. 동물과 인간이 대자연 속에서 심미적 체험을 하는 순간만큼은 적어도 우열관계로부터 벗어나 생명체 사이의 평등관계(ecological equality)가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은 문명의 안락함 속에서 동물과 구분되는 고차원적 사유를 극대 화시켜왔다. 그러다 보니 야생자연에서 물리적 고통을 이겨내는 능력이 약해져 비대해진 인지능력과의 불균형이 심화되어 왔다. 올슨은 야생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지를 억지로 참고 버티는 것으로 보지 않고 생명 순환 논리를 따르는 것이자 인간 본연의 일차원적 차원의 심미성을 체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핀란드인들이 불굴의 의지로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가려는 정신을 지칭하는 용어인 ‘시투’(situ)를 언급하 면서, 두려움없이 자연에 도전하며 사는 모습이야말로 인위적인 자연변형이 아니라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본다(RNC 100). ‘시투’의 정신은 자연 사랑에 기반한 심미적 체험을 가능토록 하는 용기이다. 이런 용기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풍경화된 자연을 안락하게 즐기지 않고 그 속에 뛰어 들어 자연물상과 주체의 거리를 최대한 소멸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심미성에 입각한 올슨의 생태주의는 심미성의 핵심을 주체와 객체의 거리로 이해하는 근대 미학론과 달리 이른바 “참여적인 심미성”(aesthetics of engagement)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참여적인 심미성이란 “자연계에 지속적으로 간여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대상 혹은 광경을 관조하며 감상하는 것[기존 미학론]을 대체하려는, 특별히 환경 미학과 제대로 통하도록 수정을 가한 미학 이론의 재구성”(Berleant 12) 을 의미한다. 물론 올슨의 심미적 생태주의도 인간다움의 개입을 인정하 다는 점에서 사심없음에 기반한 근대 미학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생각한 사심없음이 물리적 자연과 절연된 독야청청한 주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올슨은 인간이 자연물상과의 부단한 관계맺음 속에서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다양한 감각적 체험을 거친 끝에 인지적 차원에서 자연 질서를 감지하고 종국에 가서 생태적 차원에서 인간다움의 참의미를 깨닫는 것에 초점을 둔다. 진정한 인간다움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주체를 통해 구현된다기보다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심미적 체험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연 질서 속에서 자신이 지니는 위상을 파악할 때 달성 가능하 다. 이런 의미에서, 올슨은 근대 미학론에서 내세운 사심없음을 주체의 독립이 아니라 주체와 자연의 공존이라는 생태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생태적 심미주의에서 바라본 사심없음은 과학적 시선으로 물리적 자연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사심없음은 사리사욕이 아니며, 자아는 육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는 육화되어 장소에 뿌리박고 있다. 이것이 생태적 심미주의이고, 생태계는 필수적인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이니, 자아의 고향은 세계 속에 있으며, 나는 내가 머무는, 즉 나의 고향 터전 풍경과 더불어 규정된다. 이런 ‘관심’이 진정 나를 그곳의 통합성, 안정성, 아름다움을 보호하도록 이끄는 것이다”(Rolston 139). 생태적으로 유의미한 사심없음의 의미는 문명의 안락함에 매몰되지 않고 자연물 상과 관계를 맺으며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올슨이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란 각 생명체가 자연의 리듬에 몰입하여 각자의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의 신호를 감지하고 받아들여 자연의 일부가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인은 자연 속에서 방종하게 행동할 수 없다(RNC 105). 문명인의 배타적 자연 소유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RNC 101)은 자연 환경을 더럽히지 않고 소중하게 관리하는 태도로 연결된다. 여기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과 같이 청결한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는 올슨의 주장은 세균결벽증 환자(germaphobe)와도 같은 문명의 유난스러운 위생관념에 따라 야생자연을 정돈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개별 생명체가 취하는 생존전략, 그리고 생명 순환을 방해하는 인위적인 개입물을 치워야 된다는 의미로 청결함을 사용했던 것이다(RNC 104). “동물들은 오점없이 깨끗하게 자신을 관리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털과 깃털을 다듬는데 쓰는데, 이는 개인적 허영 때문이 아니라 건강과 생존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RNC 104)는 주장 속에서 올슨이 생각하는 청결함이 어떠한지 엿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가 생각하는 청결함이란 억지문명의 구속으로부터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서 사고와 물질의 거추장스러움을 제거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올슨은 자연 체험을 통해 인간다움을 깨닫는 것에서 이상적 삶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야생자연 체험을 통해 “너 자신을 아는 것”(RNC 143) 은 미국적 정신을 논할 때 빈번히 제기되는 개인성 중시와 연결되는 것이다(RNC 147). 이런 그의 생각은 포터(David M. Potter)가 미국적 정체성의 핵심으로 상정한 물질적 풍요로움과 구분되는 대안적 성격의 미국적 정체성을 제안했다는 의미를 지닌다.6) 이런 입장에서,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은 물질로 휘감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고유한 심미적 체험과 인지적 깨달음을 획득하는 것으로 달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심미적 차원 이외에 자아 계발의 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최근에 논의되는 “자연의 심미성에 대한 포스트모던 접근법”(Postmodern Approach to the Aesthetics of Nature)과 연결된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어떤 자연 물상을 감상하며 심미적 차원에 간여하게 되면, 우리가 그저그 물상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골라내면서 우리 자신의 태도, 가치, 그리고 신념을 표현하고 계발하는 것이기도 하다”(Parsons 26). 이처럼 자연을 심미적으로 대함에 있어서 “무엇이라도 된다”(anything goes)는 열린 태도는 한정된 물적 토대로 미국적 정체성을 풀어내지 않고 정신적 차원에서 풍부한 삶을 영위토록 한다. 이렇듯 개인적 차원에서 심미적 능력을 키우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올슨의 생태사상은 물리적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한 발 비켜난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해답은 올슨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의 생태적 의미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인간다움에 입각한 그의 생태사상은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적인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자연의 다양성과 마주하면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슨의 생태사상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자연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문명의 문제 역시 구체적 물상에 대한 관심결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환경에 대한 책임을 사치스럽게 방기”(RNC 121)해버린 이유는 구체적인 대상물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종합적 사고를 지향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실용적인 듯 보이는 재화들로 사고의 괴로움을 대체한 것에 기인한다. 사고의 과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눈에 보이는 쓸모에만 집착하다보면 인지적 계발 뿐 아니라 정서적 고양 또한 이룰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체적 물상에 대한 관심은 자연물상의 객관적 속성을 파악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 자연과 인간의 관계맺음에 신경을 쓰라는 의미이다. 왜냐 하면 실제로 “누군가가 감상하고 보존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맺음”(Rolston, 131)이기 때문이다.

    올슨의 생태사상을 설명하는 명제 중 하나는 인지 정서적 요소의 균형감이다. 그는 레오폴드가 주창한 대지의 윤리에 필적할 “대지 사랑”(love of the land)을 제안한다(RNC 125).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사랑으로 대지에 거하는 만물을 경험하는 것 또한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염려와 관심을 갖고 대지의 훼손을 막는 것이 인지적 측면을 언급한 것이라면, 각각의 자연 물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의적 측면에 호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특정 장소와 얽힌 기억을 쌓아나가는 작업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질서를 감지하는 단계로 나가게 된다. 그 결과 자연 질서의 안정성을 깨달아 가면서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실감하게 된다. 올슨은 이를 두고 “떠오르는 신”(an emergent god)라 명명한다. 이 말은 우상숭배 차원이 아니라 매순간 감지하는 자연의 조화로운 비전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올슨이 볼 때, 인간이 자연의 조화를 탐색하는 이유는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갈망”(RNC 167)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갈망은 인간이 “창조적 침묵” 속에서 애정을 갖고 자연물상을 관조하고 끊임없이 의미를 탐색하도록 이끈다. 이런 맥락에서, 생태적 사유는 인간의 본원에 대한 갈망, 즉 세상과 자신의 일체성에 대한 갈망과 불가분 얽혀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 지식만으로 생태 질서의 한 부분으로 살아 가는 인간 자신의 위상이 온전히 해명되지 않기 때문이다(RNC 49). 결과적으로, 올슨의 생태사상은 생태적 사유를 존재론적 물음에 답하는 과정으로 해명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존재론적 물음에 확정적 답변이 존재 하지 않더라도 물음 자체는 자연물상과의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 다는 점에서,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오랜 리듬들”과 장단을 맞추면서 “영적인 충만함과 성장”을 계속해 나가게 될 것이다(RNC 55).

    4)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의 논의를 참고한다. 이동환, 「실용적인 수자원 활용과 지역생태의 지속성: 매리 오스틴의 『갈수(渴水)의 땅』과 물의 순환」, 『문학과 환경』 9.1 (2010) 14-15.  5)“인식의 지도그리기”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저술을 참고한다.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NC: Duke UP, 1991); Fredric Jameson, Signatures of the Visible (NY: Routlede, 1992): 54.  6)포터는 다음 저서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이 미국적 성격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언급한다. David M. Potter, People of Plenty (Chicago: The U of Chicago P, 1954).

    4. 결론: 인간다움과 심미적 가치의 생태적 의미

    자연의 심미성에 대한 논의는, 어쩌면 모튼(Timothy Morton)의 주장처럼, 근대 낭만주의 시기 지식인들의 언어 유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상정하여 이를 상상적 비전으로 통합시키는 이른바 ‘병주고 약주기’ 전략을 구사하여 “생태비평적 호들갑”(ecocritical fuss)을 떨면서 정작 물리적 자연으로부터는 멀어졌다는 것이다(Morton 22-23). 모튼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연다운”(natural)이라는 표현에 얽힌 관념들을 제거 하고 일종의 “심미성에 반(反)하는 전략”(anti-aesthetic strategy)을 구사해야 된다고 본다(Morton 24-25). 그는 심미성이야말로 “바로 이 장소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방식들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하면서 낭만주의로부터 작금의 심층생태학까지 이어졌다고 이해한다(Morton 2). 그러나 모튼의 주장을 받아들일지라도, 심미적 가치와 분리된 자연이 물리적 실체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이 물리적 자연을 경험함에 있어서, “신체의 역사성”(the historicity of the body)을 감안한다면 심미적 프레임의 개입없이 자연 물상을 오롯이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마음과 몸의 이분법이 인간의 주체 성을 ‘전체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과 관련하여 더 이상 축출할 수 있는 환상이 아님”(Rigby 142)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자연에 몰입하여 아름다움을 느끼고 읽어내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가운데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다움의 발양은 생태적인 것과 대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흔적이 제거된 자연이야 말로 추상화된 자연과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올슨의 생태사상이 지니는 의미는 비중심적 생태주의에 입각한 심미적 감수성 논의 속에서 인간다움이 지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조망한다는 점에 있다.

    올슨은『노래하는 야생』에서 홀로 야생 자연에서 호젓하게 머물려는 태도로부터 벗어나 몸소 자연의 질서를 체득하고자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그의 생태적 사유는 심미적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연을 편안하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자연 속에 뛰어들어 아름다움의 다양한 일면을 목도하면서 종국에 가서 자연과의 물아일체적 경험까지 지향한다. 이런 가운데 그는 물리적 자연 속에 인간 이외에 비인간 생명체, 더 나아가 암석과 같은 무생명체의 흔적까지도 담겨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북쪽 지방에서의 사색』에서는 올슨이 생각하는 야생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생물학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욕망 자체와 같은 인간다움이 생태문제를 일으키는 핵심이라 여기지 않는다. 심미적 가치는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생겨난 것(anthropogenic)이지만 이것이 모두 인간중심적인 것(anthropocentric)은 아니다. 올슨은 인간이 문명 속에서 길들여져 가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건강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면 야생 자연을 체험하면서 자연의 질서와 이에 입각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며, 이와 같은 감수성 계발은 생태적인 사유와 대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올슨의 생태사상은 학술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퀘티코-슈피리어 일대의 야생 자연 보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노래하는 야생』이 1950년대에 상당한 인기를 얻자 농림부 장관인 프리먼(Orville L. Freeman)이 훈령을 내려 유례없는 야생 자연 보호가 가능토록 했을 정도였다(Nash 209). 이처럼 그의 생태사상은 심미성에 천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환경보호 실천이라는 윤리적 차원까지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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