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르의 현대예술론에 관한 연구

Etude sur la theorie de l’art contemporain de Baudrill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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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Le complot de l’art est une protestation directe contre le monde de l’art, et il se trouve en rapport avec la commercialisation de l’art et son expansion. Selon Baudrillard, l’art aujourd’hui produit des retours sur investissement, des objets de consommation, et il est partout.

    Sous cet angle, Baudrillard se trouvait fustiger l’exploitation cynique de l’art à des fins non artistiques. Pour lui, le complot de l’art est dans cette complicité honteuse où créateurs et consommateurs communient sans mot dire. C’est là l’artifice calculé.

    Il a dénoncé cette complicité. Il a refusé l’exceptionnalité de l’art en disant que l’art n’est pas un domaine spécifique. L’art n’est pas différent de tous les autres. C’est-à-dire il a indiqué que l’art esthétise la vie quotidienne et la banalité.

    Quand tout devient esthétique, que devient l’esthétique? Il disparaît en perdant la spécificité esthétique. C’est là le phénomène de ‘transesthétique’ que Baudrillard dit. La fonction aujourd’hui de l’art est au-delà ou infra-esthétique.

    Rien ne distingue l’art de l'opération technique, publicitaire,médiatique, numérique. Plus de transcendance, plus de divergence, plus rien d’une autre scène : un jeu spéculaire avec le monde contemporain tel qu’il a lieu. C’est en cela que l’art contemporain estnul.

    Selon l’expression de Baudrillard, l’art s’est toujours nié lui-même. Mais il le faisait par excès, s’exaltant du jeu de sa disparition.

    Et le paradoxe de l’art, c’est que plus il s’approche de cette nullité en tant qu’art, plus il est crédité et survalorisé. “Il est donc absurde de dire que l’art contemporain est nul et tout cela ne rime à rien, car c’est là sa fonction vitale.”

    Aujourd’hui, l’art flotte dans une sorte d’euphorie fade et délétère, traversée de douloureux éclairs de lucidité, somnambule en son sommeil, pas tout à fait mort mais guère vivant, à tout jamais avançant.

    Finalement, la seule légitimité que l’art pourrait donner à son existence serait de se réinventer en tant qu’art.

  • KEYWORD

    현대예술 , 시뮬라시옹 회화 , 예술의 음모 , 공모 , 초미학 , 예술의 사라짐

  • 1. 서론

    보드리야르는 문화와 예술에 관한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사유세계를 구축한 탁월한 사상가이다. 그는 현대 예술과 미학, 문화 생산의 영역에서 다양한 지적 모험을 시도하면서 현대성을 새롭게 해석했다. 예술이 매우 중요한 변화의 움직임에 걸려들 때, 그는 아이러니컬 한 사유로 앤디 워홀처럼 변화에 앞서 정면으로 헤쳐 나갈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사유와 이론은 문화예술계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때로는 신랄한 논쟁을 일으키고 때로는 놀랄 만한 충격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로써 보드리야르는 현대 예술과 문화에 관련된 자신의 저술활동 이외에도 대담, 심포지움, 세미나, 강연, 논쟁,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출연 등의 활동으로 세계 예술계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뉴욕의 MOMA에서 ‘디자인과 환경’에 관한 강연(1972)을 했으며, 이탈리아 우르비노의 국제 기호학과 언어학 센터에서 ‘코드와 시뮬라크르’ 라는 글(1975)을 발표했다. 세계적 예술 잡지 「아트포럼 Artforum」(1983) 과 「현대예술 잡지 A Contemporary Art Magazine」(1985)에도 자신의 글을 기고했다. 무엇보다 뉴욕의 휘트니(Whitney) 미술관에 의해 기획된 ‘20세기 미국의 예술과 문화’에 관한 강연은 보드리야르가 미국 예술계의 총아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해 퐁피두 센터에서 ‘스타일, 예술과 일상의 변화’라는 제목 아래 개최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와의 대담은 현대세계의 ‘새로운 경향들’을 진단하는 자리가 되었다.

    현대예술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사유는 팝아트의 선구자인 앤디 워홀의 사유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앤디 워홀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기도 했다. 퐁피두 센터에서의 강연(‘앤디 워홀, 기계적 스노비 즘’)(1990),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 A2에서의 대담(‘나의 이름은 앤디 워홀’)(1990),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 카날(Canal)에서의 인터뷰(‘앤디 워홀로 부터’)(1990) 등이 그러하다.

    보드리야르의 예술 비평 활동은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1990) 스위스 관의 협력자로 활동하다가 「리베라시옹 Libération」지에 평론 「예술의 음모 Le complot de l’art」(1996)를 발표하면서 세계 예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예술과 관련된 그의 책들 『악의 투명성 La Transparence du Mal』(1990), 『완전 범죄 Le crime parfait』(1994), 『불가능한 교환 L’Échange impossible』 (1999), 『투명한 계약 혹은 악의 공모 Le Pacte de lucidité ou l’intelligence du Mal』(2004), 『왜 모든 것이 이미 사라지지 않았는가? Pourquoi tout n'a-t-il pas déjà disparu?』(2007)에는 현대예술과 초미학, 사진에 관한 중요한 글들이 실려 있다.

    보드리야르는 확실히 바타이유처럼 전복적인 사유와 글쓰기를 통해 현 대예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강한 의혹을 품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예술이 처한 상황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면서 예술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예술의 특성을 부정하려고 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이런 사유는 ‘예술의 음모 혹은 공모’, ‘초미학(transesthétique)’, ‘예술의 사라짐’이라는 반예술로, 혹은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표명으로 나타난다.

    보드리야르의 현대예술론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아직 그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보드리야르의 현대예술론’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할 수 있는 ‘보드리야르와 시뮬라시옹 회화’를 면밀히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고자 한다. 왜냐하면 미국의 예술계에서 보드리야르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며, 그의 이론이 미국 예술가들에게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뮬라시옹 회화’에 대한 미국 예술가들의 관심이 매우 컸으며, 이들은 보드리야르의 이론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핵심적인 논의, 즉 예술의 공모는 예술에 대한 기존의 사유 방식을 갖고 있지 않는 보드리야르가 어떻게 예술계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지를 고찰하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 면서 보드리야르가 예술의 영역에서 생겨나는 초미학 현상을 다루면서 어떻게 예술의 기능을 파악하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세계를 미학화하는 것이 왜 예술의 사라짐을 초래하는지, 왜 현대예술은 무가치한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해 볼 것이다.

    2. 보드리야르와 시뮬라시옹 회화

    시뮬라시옹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사유가 많은 반향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1980년대에 뉴욕에서는 새로운 기하학적 예술이 출현했다.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이 예술에는 시뮬라시옹주의(simulationism)와 네오-지오(Neo-Geo)라는 두 이름이 붙여졌다. 기하학적 예술의 추상기법 을 해독하기 위해 피터 핼리(Peter Hally), 애쉴리 비커튼(Ashley Bickerton) 같은 예술가들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수용하면서 추상예술가들의 새로운 시뮬라시옹주의를 이끌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프 쿤스(Jeff Koons), 로스 블랙너(Ross Bleckner), 하임 스타 인바흐(Haim Steinbach), 피터 나기(Peter Nagy) 같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예술가들은 시뮬라시옹주의의 다른 이름 네오-지오를 만들어 내었다.1)

    시뮬라시옹주의를 지향한 이들 예술가들의 작업은 대체로 추상회화의 전통에 대해 아이러니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들의 작업은 추상회화의 전통을 차용 가능한 레디메이드들의 저장고로 다루었고, 네오-지오는 추상회화보다 차용미술에 더 가까웠던 것처럼 보였다.2) 사실 네오-지오는 추상회화와 개념적 관계를 구축하지 않고 추상과 거리를 두었다. 네오-지오는 추상과 재현을 모두 차용했지만 그것들을 상호대립 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에는 추상과 재현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핼 포스터(Hal Foster)에 따르면 “모더니즘의 전성기에는 추상은 재현을 억압했거나 (더 정확히 말해서) 지양했으며, 이렇게 지양됨으로써 재현은 폐기되었을 때조차도 보존되었다.”3)

    그러나 네오-지오가 추구했던 방식인 시뮬라시옹에서는 재현은 보존되지 않는다. 추상이 재현을 지양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시뮬라시옹은 재현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다. 보드리야르의 견해는 이를 뒷받침해 준다. “시뮬라시옹은 재현과는 정반대이다.(…) 시뮬라시옹은 재현의 체계 자체를 송두리째 시뮬라크르로서 감싸버린다.”4) 이로써 시뮬라시옹은 재현을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시뮬라시옹 방식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반복되는 복제 이미지의 생산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드리야르와는 달리, 들뢰즈는 재현과 관련하여 이 시뮬라시옹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들뢰즈는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5)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를 ‘허상, 즉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보았다. 들뢰즈에게 시뮬라크르는 유사성을 가장할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비유사성으로 구성된 것이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현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재검토하게 한다. 가령 팝아트는 추상표현주의 이후 재현으로의 귀환이라기보다는 시뮬라시옹―원본과의 유사성이 없는 이미지들의 생산―으로의 전환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면 팝아트 이후 네오-지오의 시뮬라시옹 회화에서 시뮬라시옹의 지위는 어떤 것인가? 이 경우 시뮬라시옹은 재현의 개념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셰리 레빈(Sherrie Levine)의 회화들이 어떻게 원본도 사본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지, 어떻게 그것들이 재현의 범주들을 뒤흔들어 놓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시뮬라시옹과 재현의 관계를 잘 파악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은 기호(이미지)에 의한 현실의 단락(courtcircuit) 과 현실의 이중화(redoublement)에 상응한다”6) 라고 기술한 바 있다. 그런데 많은 네오-지오 예술가들은 기호(이미지)에 의한 이 이중화를 재현하고자 했다. 핼리의 독방과 도관(Cell and Conduit) 회화들에서 처럼 포스트모던 공간 모델들의 추상에 대한 재현, 잭 골드스타인(Jack Goldstein)의 스펙터클 회화들에서처럼 시각의 기술적 양상들의 추상에 대한 재현 등이 그러하다. 시뮬라시옹 회화는 이렇게 추상과 재현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합체시킨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추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포스터의 견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컴퓨터 같은 표징들은 분리된 개별적 대상들이기보다 는 확산된 네트워크들인 까닭에 재현에 저항하는데, 이는 모든 곳에 있는 동시에 아무데도 없는 질서가 재현에 저항하는 것과 같다.7) 이런 연유로 해서 시뮬라시옹 회화는 곤경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핼리 같은 예술가들은 추상적 과정들을 재현하려고 시도하지만, 단지 그 과정들을 단순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골드스타인 같은 예술가들은 추상적 효과들을 재현하려고 시도하지만, 단지 그 효과들을 신비화할 뿐이기 때문이다.8)

    추상을 재현하듯이, 시뮬라시옹을 재현하는 것은 시뮬라시옹을 신비화 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 시뮬라시옹 회화에서 시뮬라시옹 이론을 사용하는 것은 회화 자체의 개념과 본질에 반대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시뮬라시옹이 회화에서 예시될 수 있다면, 과연 시뮬라시옹은 재현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시뮬라시옹 회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에,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 회화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뮬라시옹은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9) 라고 말했다. 보드리야르의 이런 견해에 비추어 보면, 포스터의 지적처럼 시뮬라시옹 회화에서 “시뮬라시옹은 단지 시뮬라시옹주의가 될 뿐이다.”10) 시뮬라시옹 회화를 추구한 예술가들은 어떻게 보면 시뮬라시옹 회화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입장 표명과는 무관하게 작업의 실패를 무릅쓰고 예술의 종말게임을 즐겼던 것처럼 보인다.

    1)이들 예술가들은 상호간의 토론이나 논쟁이 없었는 데도 보드리야르를 선조로 다시 분류하려고 했다. 이는 완전한 오해 속에서 사회적으로 매우 소외된 네오-지오를 만들어냈다고 보드리야르는 지적한다(Jean Baudrillard, ‘À partird’Andy Warhol’, Entrevues à propos du“complot de l’art”, Sens & Tonka, 1997, p.16).  2)Hal Foster, The Return of the Real, MIT Press, 1996, p.166(약호 RR).  3)같은 책, p.103.  4)Jean Baudrillard, Simulacres et Simulation, Galilée, 1981, p.16(약호 SS).  5)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p.17.  6)SS. p.48.  7)RR, p.105.  8)같은 책, 같은 쪽.  9)Jean Baudrillard et le Centre Pompidou : Une biographie intellectuelle, dirigée par Valérie Guillaume, Le Bord de l'Eau/ Centre Pompidou, 2013, p.217.  10)RR, p.108.

    3. 예술의 공모

    보드리야르에게 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는 예술의 폐기나 무효화와 관련이 있는 듯한 전시회로 여겨졌다. 분명히 무가치하고 평범한 모든 것이 전반적으로 무관심 같은 것 속에서 다른 것들의 측면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들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실제로 더 말할 것도 없고 별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달리 말하면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예술이 지나치면 해가 된다(Trop d’art, c’est trop)”11)는 느낌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회를 보기 전에는,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에 관해 의혹을 품고 있었지만 그 때까지 모든 참여에서 벗어나서 신중함을 유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술의 이런 상황을 목격한 후, 자신의 글 「예술의 음모」를 통해 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공모가 존재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공모를 훨씬 더 진짜로 만들어 놓았다.

    「예술의 음모」는 예술계에 많은 충격과 논란을 초래했다. 이로써 보드리야르는 예술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분명히 예술에 대한 기존의 사유 방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예술은 더 이상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나 특수한 것이 아니다. 글쓰기를 통해 예술의 내부로부터 비판하고 진정으로 비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도 심지어 상호적 찬양의 공모 때문에 예술계에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보드리야르가 폭로하고자 했던 것, 즉 “공모의 형태로서의 수동성과 비굴 한 복종(passivity and servility as a form of conspiracy)”12) 이다.

    예술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사유는 그 출발점부터 급진적이고 아이러니 컬하면서도 매우 분명했다. 『소비의 사회 La Société de consommation』에서 그는 팝아트의 유머가 예술을 전복시키는 것을 전혀 지니지 않으며, 팝아트의 차가운 미소가 상업적 공모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미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our une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du signe』에서 그는 예술이 테러적인 비평과 사실상의 문화적 통합 사이에서 모호한 지위를 지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현대예술은 ‘공모의 예술’에 지나지 않으며 자체의 질서에 속하는 어떤 질서를 전복시키는 체할 뿐이라고 명백하게 말했다. 그리하여 「예술의 음모」에서 그는 예술계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모를 초래하는 현대사회의 불가피한 현상을 ‘예술의 공모 혹은 음모’라 규정했다. 어떻게 보면 보드리야르의 이런 판단은 시의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예술의 팽창이 실제로 절정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이제 “예술은 자체의 전문적인 전시와 네트워크와 예술시장을 통해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는”13) 듯하다. 예술은 여전히 경외와 숭배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는 오늘날 예술이 자체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또한 예술적 기교나 예술의 술책이 어디에서나 지나치게 발전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보들레르(Baudelaire)는 근대성의 탄생과 더불어 예술이 자연스런 충동이 아닌 계산된 술책(artifice calculé)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이미 이해했다.14) 보들레르의 이런 인식은 예술의 지위와 존재조차도 문제 삼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외심을 갖고 예술을 사유하는데 매우 익숙해져 있어서 예술을 더 이상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으며 분명하게 예술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예술에 대한 이런 일반적 사유를, 보드리야르는 주목했다.

    사실 예술이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선 예술을 무효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은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이 자기 방식대로 시도했던 방식이다. 물론 예술이 문제 제기의 이런 방식을 초월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예술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예술을 사유한다. 실제로 일반적인 ‘암묵적 동의’에 의해, 예술은 똑같은 방식을 추구하거나 그 자체가 전념했던 형태들을 지속할 어떤 이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예술의 공모 혹은 음모, 즉 계산된 술책에 연결된다.

    달리 말하면 창작자와 소비자가 오로지 예술의 개념만을 나타내는 기이하고 설명할 수 없는 대상과 그 자체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수치스런 공모가 존재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진짜 음모는 예술이 그 자체와 맺는 공모, 예술이 현실과 맺는 공모에 있다”15)고 말한다. 여기서 오늘날 예술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예술은 예술계 속에서, 예술 그 자체를 응시하는 예술공동체 속에서 문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공모의 두 가지 측면과 관련이 있다. 가령 “창 조적 행위 자체는 자기 조작의 기호일 뿐이다. 예를 들어 화가의 진정한 주제는 더 이상 그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리는 행위 그 자체이다. 그는 그가 그리는 행위를 그린다.”16) 어쨌든 이런 방식으로 예술의 개념이 보전된다면, 이는 오로지 공모의 한 측면이 될 수 있다.

    공모의 다른 측면은 대체로 무엇이든 이해하지 못하여 곧바로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예술과 문화를 소비하는 관람객의 공모일 것이다. 말하자면 관람객은 예술과 문화의 회로(circuit)에 접속하라는 명령 이외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아무런 필요성도 갖지 못하는 행위를 글자 그대로 소비할 뿐이다. 이때 예술과 문화 자체는 순환의 부대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오늘날 “예술은 의사소통, 네트워크, 상호 작용이라는 유동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궁극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17)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예술 분야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관람객의 두뇌에 침투하는 것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오늘날 수수께끼는 관람객의 두뇌에, 말하자면 관람객이 예술 작품 앞에서 비굴해지는 이 약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수수께끼의 비밀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는 “창작자가 대상과 대상 그 자체에 가하는 모욕과, 소비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신력에 가하는 모욕 사이의 공모”18)를 파악한다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이런 공모가 초래하는 결과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결국 “예술의 이 공범적인 편집증 때문에 더 이상 비판적 판단은 있을 수 없으며, (…) 타협에 의한 공유만이 있을 뿐이다.”19) 이로써 “우리는 예술의 희극을 계속 상연하고 있을 뿐이다.”20) 보드리야르의 ‘예술의 공모’ 개념은 시뮬라시옹의 개념이나 하이퍼리얼리티의 전략이라는 그의 이론이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예술의 공모’ 테제는 너무 극단적이고 아이러니컬해서 일반적인 예술론의 측면에서 수용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것이 현대 예술의 평가에 대한 충분한 미학적 논의와 성찰을 거쳐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1)같은 책, p.218.  12)Jean Baudrillard, The Conspiracy of Art, edited by Sylvère Lotringer, Semiotext(e), 2005, p.75(약호 CA).  13)BCP, p.218.  14)Jean Baudrillard, le complot de l’art, illusion et désillusion esthétiques,2005, Sens & Tonka, p.27(약호 CAIDE).  15)Jean Baudrillard, Le Pacte de lucidité ou l’intelligence du Mal, Galilée, 2004, p.89(약호 PLIM).  16)같은 책, p.90.  17)같은 책, pp.92-93.  18)같은 책, p.93 : “la complicité entre la mortification que les créateurs infligent, aux objets et à eux-mêmes, et celle que les consommateurs infligent à eux-mêmes et à leurs facultés mentales.”  19)CAIDE, p.91.  20)같은 책, p.81.

    4. 초미학

    오늘날 예술의 영역에서 예술 그 자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판 단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만약 예술의 개념이 여전히 어떤 의미를 지닌다면, 예술의 이런 상황을 진단하기 위해 정치·경제·성·철학·미학 등과 관련된 모든 것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이는 예술의 상태가 그 자체를 지나치게 일반화시키면서 어떤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성의 탁월한 분석가인 보드리야르는 현대세계가 얼마만큼 하이퍼 리얼하고 가상적인지, 초정치적이고 성전환적이고 초미적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오늘날 정치적인 것·성적인 것·미적인 것의 각 범주는 자체의 특성을 상실하고 일반화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한다.21) 그는 “모든 것이 미적인 것이 될 때,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아름답거나 추하지 않다. 예술 그 자체는 사라진다”22)라고 말한다. 이 역설적인 사태는 예술 자체의 한계를 넘어선 과잉과 확산으로 인해 예술 자체를 부정하고 사라지게 한다. 말하자면 미적인 것이 한계점에 이르면, 그것은 더 이상 미적 특성을 지니지 못하고 사라진다. 보드리야르는 이 역설적인 사태가 일어나는 현상을 ‘초미학(transesthétique)’이라 부른다.

    그러면 왜 초미학 현상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오늘날 예술은 도처에서 증식하며, 예술에 관한 담론은 점점 더 빨리 순환하고 확산되고 있다. 현재의 예술은 미적 가치의 생산과는 구별되며, “다소 유희적으로 혹은 아이러니컬하게 모든 형태들, 즉 과거의 형태들, 유사한 혹은 차이나는 형태들, 심지어 현대적인 형태들”23)을 순환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형태들(새로운 기하학, 새로운 표현주의, 새로운 추상, 새로운 구상)의 혼합은 기이하게도 무관심 속에서 공존한다. 이 모든 경향들이 동일한 문화 공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모든 형태들은 미적 차원을 지니며, 모든 공간들은 재현적 혹은 반재현적인 가능성이라는 미적 대향연에 둘러싸여 있”24)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사라졌다…. 더 이상 근본적인 규칙도, 판단의 기준도, 쾌락의 기준도 없다”25)고 보드리야르는 역설한다. 보드리야르의 이런 역설은 현재의 예술의 세계가 기이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마치 예술의 세계가 예술의 정지(stase)에 의해 파악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현대예술의 모든 움직임 이면에는 일종의 무기력, 즉 그 자체를 초월하지 못하고 점점 더 빠른 순환 속에서 그 자체로 되돌아 가는 것이 있다.”26)

    이는 바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현대예술의 ‘패러독스’이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예술의 생생한 형태의 정지(stase), 그리고 동시에 증식, 한술 더 뜨기(surenchère), 예전의 모든 형태를 따른 다양한 변화”27)이다. 여기서 보드리야르는 예술의 정지가 있는 곳에 또한 암의 전이처럼 예술의 전이(métastase)가 있다고 말한다. 마치 세포들이 무한 한 무질서 속에서 증식하듯이, 현재의 예술의 무질서 속에서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미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미적 개념의 해방을 통해, 현대사회는 일반적 미학화를 초래했다. 일반적 미학화를 지향하는 반예술운동은 뒤샹이 변기나 병걸이를 들여오고, 워홀이 캠벨수프 깡통이나 브릴로 박스를 들여온 후 실현되었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세계를 완전히 산업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세계는 미학화 되었으며, 세계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세계는 미학에 의해 변화하게 되었다.”28) 이런 현상은 바로 보드리야르의 ‘초미학’에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초미학과 관련하여, 보드리야르는 뒤샹을 초미학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미적 규칙을 거부하면서 뒤샹의 예술이 초미학 혹은 이미지의 평범함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퀼튀르(France Culture) 라디오 방송의 인터뷰에서 보드리야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뒤샹의 행위 자체는 극히 적지만, 그로부터 세상의 평범한 것이 모두 미학으로 되고, 반대로 미학은 모두 평범한 것으로 됩니다. 다시 말하면 평범한 것과 미학의 이 두 영역 사이에서, 전통적 의미에서의 미학을 실제로 끝장내는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29)

    보드리야르는 워홀 역시 초미학을 실천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한계 밖에 머물면서 워홀이 미학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워홀은 미학을 그 자체가 더 이상 미적 특성을 갖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뒤집히는 곳으로 밀고 나가, 우리를 예술과 미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는 것이다.30) 워홀의 작업은 예술과 미학의 개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워홀은 이미지를 통한 실재의 사라짐과 이미지가 모든 미적 가치를 끝내는 이미지의 한술 더 뜨기”31) 전략을 추구한다. 사실 워홀에게는 이미지와 시뮬라크르의 잠재적 상승과 동시에 ‘가치의 잠재적 상승’ 이 문제이다.

    보드리야르는 이 ‘가치의 잠재적 상승’에 주목한다. 여기서 가치가 상승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가치의 법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가치의 잠재적 상승의 가장 좋은 예는 예술 시장 일 것이다. 과거의 예술은 미적 가치가 상승하기 이전의 대상, 그리고 미적 가치를 추구했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오늘날 예술은 그 자체에서 벗어나고 그 자체를 부정하려고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예술이 미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미적인 것 자체를 벗어나 거나 초월하여 나아가면서 미적 가치를 파괴하고 미적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극도로 증식하고 확장되는 다른 가치들처럼 미적 가치도 곤경에 처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논의하는 초미학은 바로 미적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초미학 개념을 둘러싸고 예술의 영역에서 미적 가치의 모든 논리와의 단절과, 예술 시장에서 상업적 가치의 모든 논리와의 단절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예술에서 똑같은 열광과 광기, 과잉은 미적 판단을 할 수 없음과 관련이 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가치는 가치 판단의 부재 속에서 급등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의미에서 가치의 황홀경(extase de la valeur)이다.”32)

    이 가치의 황홀경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가치의 자연적 단계·상업적 단계·구조적 단계33) 이후에 오는 가치의 프랙털적(fractal) 단계, 즉 가치의 바이러스적 단계에 연결되는 것이다. 이 최종 단계에는 오로지 가치의 전이와 증식만이 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와 같은 전염과 연쇄 반응이 모든 판단과 평가를 무효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가치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가치의 판단과 평가는 불가능해질 수 있다.34)

    이런 논리에 비추어 보면 우리에게 미적 망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보드리야르의 초미학적 비전인 듯하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과 미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극단적인 미학이나 초미학 속에 있다. 우리의 예술에서 미적 일관성이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35) 게다가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예술의 기능은 미학을 넘어서거나 미학을 위반하는 것이다”36)라고 말한다. 사실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미학은 광고와 미디어 속에, 일상과 사물 속에, 신체와 패션 속에 있기 때문이며, 미적인 것은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제 ‘초미학’이라 불리는 이 세계에서, 예술은 더 이상 유보된 지위를 갖지 못하는 듯하다. 초미학화된 세계는 미디어와 정보와 일상 적인 것을 미학화하는 세계이며, “사회 전체에 가치를 퍼뜨리기 위해 오히려 가치를 탈취한 세계”37)이다. 따라서 현대예술에서 이런 세계가 형성되는 것은 보드리야르가 앞서 말한 역설적인 사태가 일어나는 현상, 곧 초미학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21)Jean Baudrillard, La Transparence du Mal, Galilée, 1990, p.17(약호 TM).  22)같은 책, 같은 쪽.  23)Jean Baudrillard, Le Nouvel Ordre Esthétique. Illusions et désillusions de l’art contemporain, Prétentaine, décembre 1996, p.37(약호 NOE).  24)TM, p.22.  25)같은 책, 같은 쪽.  26)같은 책, p.23.  27)같은 책, 같은 쪽.  28)Jean Baudrillard, ‘Transpolitics, Transsexuality, Transaesthetics’, in The Disappearance of Art and Politics, edited by William Stearns & William Chaloupka, St. Martin’s Press, 1992, p.12(약호 TPSA).  29)Jean Baudrillard, ‘L’art entre utopie et anticipation’, Entrevues à propos du “complot de l’art”, Sens & Tonka, 1997, p.44.  30)Jean Baudrillard, ‘À partir d’Andy Warhol’, Entrevues à propos du “complot de l’art”, Sens & Tonka, 1997, p.11-13.  31)Jean Baudrillard, Le crime parfait, Galilée, 1995, p.117.  32)TPSA, pp.14-15.  33)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가치의 자연적 단계는 사용가치에 해당하고, 상업적 단계는 교환가치에 해당하며, 구조적 단계는 기호가치에 해당한다.(같은 책,p.15.)  34)같은 책, pp.15-16.  35)TM, pp.25-26.  36)Ludovic Leonelli, La Séduction Baudrullard,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2007, p.83(약호 SB).  37)같은 책, 같은 쪽 : “un monde qui a arraché cette valeur pour la distiller dans l'ensemble du corps social.”

    5. 예술의 사라짐

    ‘스타일, 예술과 일상의 변화’라는 제목 아래, 보드리야르는 움베르토 에코와의 대담에서 유토피아로서의 예술의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그는 19세기 산업사회의 출현이 예술을 유토피아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에 투영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유토피아를 어떻게 실현하느냐의 문제는 세계를 미학화하는 것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세계를 미학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유토피아적인 방식으로 실현된 유토피아이다. 게다가 그것은 예술로서 사라지면서 세계를 실현하는 어떤 방식이다. 예술이 이 유토피아적인 영역에 투영되는 순간부터, 예술은 사라지는 운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은 그 자체가 그 속으로 사라지게 될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38)

    헤겔은 예술의 사라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근대예술은 더 이상 자체의 사라짐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라지는 운명 이외의 다른 운명을 갖지 못한다. 근대예술은 그저 길을 선택해야 할 뿐이다. 따라서 길 들 중의 한 길은 자체의 형상을 본따서 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인 초월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미학화하는 길인데, 거기에 다른 길, 즉 사라지는 길이 있을 것이다.”39)

    헤겔의 관점에서 근대예술 자체는 그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한다. 예술은 실재를 사라지게 하고 그것을 다른 무대로 대체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천해 나가면서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바로 그 점에서 예술은 사건을 만들었고,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헤겔과는 달리, 보드리야르는 어떻게 예술의 사라짐을 이해하는가? 그는 “오늘날 예술은 사라졌지만 그 자체가 사라진 줄 모르고 있으며, 더 황당하게도 혼수상태에 빠진 채 자체의 길을 계속 나아가고 있다”40)고 지적한다.

    그러면 헤겔이 예술의 종말을 전망했듯이, 보드리야르는 예술의 종말을 예상하는가? 그는 ‘예술은 끝났고,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를 낙담케하는 것은 너무도 많은 예술과 미적 포화상태이다.

    보드리야르가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사라졌다(dans ce sens-là, l’art a disparu)’고 기술할 때, 우리는 이 문장의 두 번째 부분(‘예술은 사라졌다’) 만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이 명제를 왜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여전히 있고, 심지어 너무도 많은 예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라져버린 것은 예술의 개념이다. 하지만 어떤 개념일까? 우리는 예술의 현존에 매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예술의 존재와 의미에 문제 제기하는 것은 놀랄 만한 도발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이 도발 행위와 관련하여 보드리야르의 급진적 사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급진적인 기본원칙과 역사성의 기준으로 항상 어떤 행위나 사건을 분석하는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예술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을까?

    흔히 알려져 있듯이 고전 시대 이후,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의 탄생에서 입체파를 통한 원근법의 사라짐에 이르는 회화 예술은 그것을 구성했던 모든 원칙들을 서서히 해체하기를 시도했다. 이로써 치밀하게 완성된 고전 규칙들은 19세기 말부터 진행되어온 해방의 과정들을 통해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 해방의 과정들은 유추해 보면 (신화적·종교적인) 위대한 주제로부터의 해방(인상주의), 균형과 규범으로부터의 해방(표현주의), 원근법으로부터의 해방(입체파), 예술의 개념으로부터의 해방(레디메이드), 재현으로부터의 해방(추상), 독창성과 아우라로부터의 해방(워홀 의 시리즈들), 기교로부터의 해방(개념 예술), 추상으로부터의 해방(하이퍼리얼리즘)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41)

    이 해방의 운동을 비난하기는커녕, 보드리야르는 이 해방의 운동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추상이 표현주의적이든 기하학적이든 간에, 추상을 통해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의 위대한 모험”, “재현을 파괴하고 대상을 해체하는”42) 것을 본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해체하는 것으로 입체파·추 상·표현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역설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즉 현재의 단절 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단절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 해방의 이러한 모험은 끝났으며, 해방된 예술은 과거 형태들의 가속화된 반복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기하학, 새로운 표현주의, 새로운 추상, 새로운 구상 등이 그러하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형태들의 반복과 순환 사용을 통해 가능해진다. 보드리야르에게 이 반복과 순환 사용은 해방 이전의 과정과는 정반대이다. 말하자면 현대적 운동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복과 순환 사용은 해방 이전의 과정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그리하여 보드리야르는 “그때까지 방기된 것(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추한 것, 기괴한 것, 포르노적인 것)에 의해 혹은 아이러니컬한 거리두기(키치, 유치한 것,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예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형태들의 연결 앞에서 서글픔이 생겨났다”43)고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현대 예술은 무가치하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낸다.

    사실 예술은 미적 차원에서 무가치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예술이 그 자체를 평범한 것과 더욱 더 뒤섞음으로 해서, 평범한 삶과 다른 것이 아닌 것이 되고, 결국 불필요하게 되기”44) 때문이다. 따라서 ‘현 대 예술은 무가치하다’라는 표현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이 무 가치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예술로서의 그 자체를 가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예술과 현실이 서로 가치 없게 만든다. 예전에는 예술과 현실은 서로를 잠재력화했지만, 지금은 서로 상쇄되고 있다”45)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예술과 현실은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혼동된다. 이 혼동으로 인한 ‘미적 중독’이 생겨난다.46) 그것들은 서로에게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예술이 현실에 대한 일종의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미디어를 통해, 예술 그 자체를 통해 일상적 삶을 미학화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예술과 미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 한다. “오늘날 미학, 예술은 어디에나 있다. 미술관과 갤러리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폐물 속에, 벽 위에, 거리 속에도 있다. 오늘날 모든 행위들이 미학화된다.”47)

    보드리야르의 이런 시각에서 보면, 문화는 문화의 황홀경이라는 형태를 띨 뿐만 아니라 예술의 완전 부재에도 상응한다. 여기서 예술의 완전 부재 같은 문화의 복제 단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드리야르는 ‘예술은 사라졌고, 예술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예술의 사라짐을 다른 논리로 말하자면, 예술은 사라졌지만 예술의 사라짐이라는 중요한 순간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예술의 사라짐과 관련하여 보드리야르의 사유를 정리해 보면, 예술은 일종의 실현된 유토피아이다. 왜냐하면 예술이 유토피아의 영역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며, 예술이 불행히도 동시에 일상적 삶과 모든 행위들을 전적으로 미학화하는 것을 통해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런 사유에 비추어보면, 예술과 일상적 삶 (혹은 현실)의 융합을 완벽하게 실현한 워홀은 예술의 사라짐이라는 이 논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보드리야르가 폭로하는 것은 다음의 워홀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모든 백화점들이 미술관들이 될 것이고, 모든 미술관들이 백화점들이 될 것이다.”48)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예술 전체는 죽기 전에, 그리고 죽는 대신에 사라질 줄 아는 것”49)이 중요하다. 과연 예술은 사라질 줄 알게 되는가?

    비릴리오처럼 보드리야르는 이 ‘사라짐의 미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사라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한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변모의 형태, 즉 출현-사라짐이다. 그것은 결국 형태들이 연관되는 것이다(이 때 각 형태는 사라져야 하고, 모든 것은 자체의 사라짐을 내포한다).50) 보드리야르는 “모든 것은 사라지는 예술 속에 있다. 슬프게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51)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예술과 관련하여 보드리야르의 이런 주장은 한편으로 역설적인 것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소 설득력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38)BCP, p.122.  39)같은 책, p.123.  40)Jean Baudrillard, Pourquoi tout n’a-t-il pas déjà disparu?, L’Herne, 2007, p.17(약호 PTD) : “aujourd'hui l'art, tout en ayant disparu ne sait pas qu'il a disparu, et ça c'est le pire, il poursuit sa trajectoire en coma dépassé.”  41)SB, p.80.  42)NOE, p.26.  43)SB, p.81. 물론 회화 예술은 현대 예술 전체를 포함할 수 없다. 조각, 설치미술, 비디오 아트, 생명기술 아트, 보디 아트, 퍼포먼스 등은 회화 예술에서 벗어난다. 그래도 회화의 영역에서 주의나 학설에 의한 단절과 혁신이 가장 강력하였다. 현재의 조형 예술가들은 입체파와 단색화에 의해 유발된 절차와 전복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예술의 영역들을 구성하는 통일성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44)PTD, pp.20-21.  45)CA, p.78.  46)Thomas Florian, Bonjour… Jean Baudrillard, Editions Cavatines, 2004, p.20.  47)BCP, p.124.  48)SB, p.84.  49)PTD, pp.17-18.  50)Jean Baudrillard/ Jean Nouvel, Les objets siguliers : Architecture et philosophie, Calmann-Lévy, 2000, p.51.  51)같은 책, p.53.

    6. 결론

    1987년은 실제로 뉴욕 예술계의 전환점이었다. 젊은 예술가들이 ‘지도적 사상가’, ‘정신적 지도자’를 찾아나서면서 예술계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들 예술가들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미학적 선 언으로 간주하고 이 책을 비형상 예술의 모델로 삼으려고 했다. 이 갑작 스런 찬사에, 당황한 보드리야르는 곧 사태를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시뮬라크르의 출현이 현대 문화에는 더 이상 원본이 없고 복제의 복제만 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그는 시뮬라시옹은 재현될 수 없고 예술 작품의 모델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보드리야르의 이런 입장 표명은 어떤 의미에서 예술에 대한 도전일 수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종종 서구의 문화 비평을 자극하는 행동을 통해 예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더욱이 그는 예술에서 벗어나는 방법, 예술에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을 깊이 사유한 것처럼 보인다. 「예 술의 음모」는 예술계에 직접 항의를 제기한 것으로 예술의 상업화와 예술의 팽창과 관련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 예술은 어떤 다른 상업적 거래처럼 투자나 소비상품을 산출하며, 예술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 아래, 그는 비예술적 목적을 위해 예술을 파렴치하게 이용 하는 것을 공격했다. 그에게 ‘예술의 공모 혹은 음모’는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암묵적 동의에 의한 계산된 술책으로 여겨졌다.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예술이 처한 이런 상황을 폭로하고자 했다. 그는 예술은 더 이상 특수한 영역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예술이 예외성을 갖는 것을 거부했다. 예술은 다른 모든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예술이 일상적 삶과 평범함을 미학화한다고 지적한다.52)

    그러면 모든 것이 미적인 것이 될 때, 미적인 것은 어떻게 되는가? 미적인 것은 일반화의 절정에 이르게 되면서 미적 특성을 상실한 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초미학’ 현상인데, 초미학은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미적 가치를 파괴하는 가치의 황홀경에 연결된다. 따라서 예술은 가치가 소멸되는 운명에 의해, 초월성의 상실에 의해 타격 받게 된다.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은 더 이상 근본적인 기능을 갖지 못하는 듯하다. “오늘날 예술의 기능이 미학을 넘어서거나 미학을 위반하”53)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술이 이런 상황에 처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술에는 예술 그 자체와 예술로 간주되지 않는 것을 구별해 주는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무엇보다 예술이 극도로 증대하고 확산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예술의 지나친 증식과 문화적 과잉 생산이 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은 더 이상 특수한 것이 아니며 예술이 예술로서의 그 자체를 가치없게 만든다. 예술의 모든 특성을 부정하는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이 무가치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대예술을 기술·광고·미디어·디지털의 조작과 구별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이상 초월성도 대립도 없고, 현대세계와의 반영의 유희인 다른 무대도 없다.”54)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의 이런 상황을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사람들이 이미 무가치한데도 무가치를 지향한다”55)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가치는 20세기 예술의 엄청난 쇄도를 유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예술로서의 자체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서둘러 길에 내 던져버리면서 말이다. 보드리야르에게 무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창조적 환상의 모든 가능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술의 사라짐이라는 끝없는 순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예술의 사라짐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이런 시각은 보들레르, 뒤샹, 워홀의 견해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예술의 사라짐과 관련하여 이제 예술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예술은 자체의 사라짐을 연출하면서 지나치게 그렇게 하고 있는 듯하다. 더욱 황당하게도 예술이 자체의 사라짐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부정하는 현대예술의 패러독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술로서의 이 무가치에 가까울수록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 패러독스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현대예술이 무가치하고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중요한 기능이기 때문이다.”56) 실제로 예술이 지닌 인류학적 지위의 가면이 벗겨진다면, 보드리 야르는 어떻게 예술을 이해할까? 자신이 흔히 즐겨 사용하는 ‘예술은 쓸모없는 기능이다’, ‘예술은 항상 스스로를 부정한다’, ‘예술의 기능은 예술 보다 삶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는 그의 이런 표현들은 자율적 영역으로 구성된 예술의 개념을 가리키는 것들이다. 물론 그의 이런 이해는 해체와 추상의 과정 이후에만 가능해질 수 있다.

    하지만 현대예술의 환경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브 미쇼(Yves Michaux)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안 베로니카 얀센(Ann Veronica Jassens)의 빛의 설치미술은 이비자(Ibiza)의 나이트클럽과 똑같은 감동을 일으킬 수 있다.”57) 이러한 것을 열망하는 것이 예술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것인가? 현재의 예술에서 세상을 다시 매혹하려는 욕망을 찬양해서는 안 되는가?

    제프 쿤스도 “(내가 만들어내는) 모든 이미지들은 우리를 둘러싸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은유들이다”58)라고 밝힌 바 있다. 보드리야르는 얀센과 쿤스의 이런 세상과의 화해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새로운 것과 스펙터클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설치미술과 퍼포먼스에는 예술사에 나타난 과거의 모든 형태들과 동시에 현재의 사태들과의 타협의 유희만이 있다”59)고 비판 한다.

    예술을 급진적이고 극단적으로 사유하는 보드리야르는 예술의 기능이 예술보다 삶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라면, 예술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대부분의 현대예술은 미적 환상을 잃어버리면서 미적 환멸을 향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예술 영역에 대한 전반적인 서글픔을 불러일으킨다. 실베르 로트렝제(Sylvère Lotringer)의 말대로, 오늘날 예술은 몽유병에 걸린 채 고통스럽게 잠시 제 정신을 차리긴 하지만 일종의 활기를 잃은 도취 속에 떠돌고 있는 듯하다. 예술은 아직 죽지는 않고 거의 살아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60)

    결국 오늘날 예술이 존재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는 예술로서 그 자체를 재발견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예술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술이 항상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 존재와 기능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한 보드리야르는 진정으로 예술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유한 사상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52)이와 관련하여,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모든 것이 미학화 되었다. 어느 정도 모든 것, 심지어 평범한 현실조차도 예술의 입장에서 파악될 수 있다. 우리는 초미학 속에 살고 있고 거대한 미술관 속에 있다.”(CA, p.80.)  53)SB, p.83.  54)PLIM, p.89.  55)Jean Baudrillard, Le complot de l’art, Sens & Tonka, 1997, p.19.  56)PLIM, p.96.  57)SB, p.87.  58)같은 책, p.83.  59)Jean Baudrillard, Le complot de l’art, Sens & Tonka, 1997, p.17.  60)‘Introduction : The Piracy of Art by Sylvère Lotringer' in CA,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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