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공공성 변화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극복과정에 미친 영향*

The Effect of the Publicness Crisis on the Overcoming Process of Fukushima Nuclear Dis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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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사회에서는 방사능 오염에 대한 불안과 함께 안전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아베노믹스로 대표되는 최근의 일본 경제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 안전문제는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원전 재가동을 위한 정부차원의 움직임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위기를 통해 형성된 안전에 대한 인식이 정치적 이슈로 발전되지 못한 이유를 1990년 경제 버블 붕괴 이후 일본사회가 경험한 사회구조적인 변화, 그중에서도 공공성 수준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공공성 수준의 변화와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발생원인 및 사고 극복 과정의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일본의 경제버블 붕괴가 공공성 논의에 미친 영향을 이론적으로 살펴보고 잃어버린 20년으로 대표되는 장기 경기침체기 동안 공공성의 네 가지 요소인 공익성, 공정성, 공민성, 공개성이 어떤 형태로 변화해 갔는가를 분석하였다. 또한 원전건설과 가동에 관한 문제들과 공공성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공공성 수준의 변화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수습 방향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원인과 사태 수습과정을 공공성의 측면에서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밝혀졌다. 첫째, 경제 버블 붕괴 이후 국가가 공공성을 독점해 온 것에 대한 비판이 공공성 논의로 이어졌으며 장기침체 동안 공익성, 공정성, 공민성의 수준이 큰 폭으로 저하되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의 일본사회가 공공성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 저하가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대재난을 경제우선 프레임으로만 해결해가려는 대응방식을 만들어 낸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분석결과는 공공성을 담보해가는 주체가 국가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재난에 대한 극복 방식이 한 사회에 축적된 공공성 수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nalyze the influence of prolonged economic slump on Japan society in terms of publicness and how publicness crisis affect the way of deal with the problem related to Fukushima Nuclear Disaster.

    Fukushima Nuclear Disaster is not natural disaster but structural disaster took place by the publicness crisis accumulated for lost 20 years. Japan society has suffered from rapid increase in irregular employment and widened the gap between social classes since 1990s bursting of bubble economy and the concern for fairness has been also raised in this period. While most of industry undergo restructuring in 2000s, however, electronic power company still hold onto their vested right through Gensiryoku Mura(Nuclear Power Village) tightly-woven network of local politicians, industry executives, engineers who have become dependent on nuclear power for jobs, income, and prestige. These publicness problems have a significant impact on the economic policy resuming operation of nuclear reactors after Fukushima Nuclear Disaster.

    Through the analysis about the relation between publicness and disaster, this article finds that first, state-led publicness throw fairness, openness into crisis, second, the lengthy publicness crisis made public accept the policy of separating safety issues from economic framework.

  • KEYWORD

    후쿠시마 원전사고 , 공공성 , 공익성 , 공정성 , 공민성 , 공개성

  • 1. 문제제기

    2014년 3월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원자력1) 발전소 재가동에 찬성하는 비율이 28%, 반대하는 비율이 59%로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반대하는 의견이 찬성하는 의견의 두 배를 넘어섰다. 2009년 내각부가 실시한 원자력에 대한 특별 여론조사에서 원자력 에너지 이용을 적극적으로 또는 신중하게 추진해가는 것에 찬성하는 비율이 59.6%였던 것과 비교하면 극적으로 변화된 수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60%에 달했던 원자력 발전 전력에 대한 찬성의견이 절반이하로 줄어든 것은 다름 아닌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발생한 방사능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이다. 원전사고로 인해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고 원자력 에너지 이용에 대한 반감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원전사고 이전에 일본 국민이 가지고 있던 원자력 에너지 사용에 대한 지지율이 60%에 달했다는 것은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1966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는 한 해 평균 2기씩 그 수를 늘려가며 1980년대까지 꾸준히 증가해왔으며, 1970년대에 있었던 두 번의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정세의 급격한 변화나 내수시장의 경기변동에도 불구하고 20년 넘게 ‘직선적’ 증가 추세를 이어왔다(吉岡, 1999: 136-142). 또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하기 일 년 전인 2010년까지만 해도 일본정부는 당시 전력 공급량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던 원자력 발전 전력 공급량을 2030년까지 50%로 늘리겠다는 에너지 기본계획을 발표하여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는 등 원자력 에너지 사용 확대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왔다.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해 원자력 발전소가 필요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위해서 부지로 선정된 지역의 주민동의가 필요하다는 점, 지금까지 일본전역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 17곳과 원자로 54기 역시 지역주민의 적극적 또는 소극적 동의2)를 통해 세워진 것이란 점에서 본다면, 1980년대까지 매년마다 원자력 발전소가 꾸준히 지어질 수 있었던 경위도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의 경우,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제2원자력 발전소가 위치하고 있었고, 두 곳의 발전소에 각각 6개, 4개의 원자로가 집중되어 있는 상징적인 ‘원자력 마을3)’이었다. 뒤에서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일본의 특정 지방에 원자력 발전소가 집중적으로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도심부에서 생산할 수 없는 전력을 지방에서 생산하는 대신에 그 ‘대가’를 지방에 지불하여 도시와 지방 간의 형평성을 맞추어 가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공정성을 전제로 한 정책 덕분이다4). 또한 그 ‘대가’의 액수도 댐이나 도로건설 같은 공공사업비용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등, 일본에서는 정부가 공정성과 공익성을 담보하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담당해 왔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의 상황과 사고 이후의 정치 상황 또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먼저, 사고 직후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위험을 과소평가한 일본정부와 도쿄전력, 그리고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미디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해외 언론이나 소셜 미디어에서 전달된 정보와 일본 국내 미디어가 전달한 정보의 차이는 미디어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고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신화를 뒷받침하고 있던 방사능 영향 예측 네트워크 시스템, ‘스피디’(System for Prediction of Environmental Emergency Dose Information)가 측정한 방사능 확산에 대한 정보가 원전사고 이후 한 달 이상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뒤늦게 밝혀지면서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의 정보 조작과 은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전영상·이진복 2012).

    또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원자력 발전소의 재가동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지고 방사능 공포가 일상생활까지 침투했던 2012년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정책을 제시하면서 원자력 발전소의 재가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아베정권이 일본 국민의 지지 속에 출범한 것 역시 재난이 정치적 이슈로 부상하는 것의 한계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인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발생한 사고인 것은 분명하지만 후쿠시마 지역에 원자로가 10기나 지어질 수 있었던 이유와 사고 이후에 불거진 정보은폐문제 등을 놓고 볼 때,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자연재해로 인한 우발적 사고라기보다는 일본 사회가 안고 있던 공공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일본사회가 겪고 있던 공공성의 문제란 공공성 실현주체를 국가에 한정시켜온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공공성이 국가의 공공성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공공성을 시민의 공공성까지 확대시키려는 논의는 언제부터 나타나게 되었을까?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은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을까?

    본 논문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앞서 제기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제를 분석해 나갈 것이다. 2장에서는 공공성의 일반적 개념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바탕으로 공공성의 개념적 구성요소를 공익성, 공정성, 공민성, 공개성으로 분류한 구혜란(2015)의 작업에 더하여 공공성의 일본적 문맥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나타난 공공성 작동원리의 특징을 분석하고 버블 붕괴 이후 공공성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재검토되었는지 기존 논의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1990년대 이후 일본사회가 경험한 공공성 변화과정을 공공성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중심으로 검토할 것이다. 먼저, 공공성의 경제적 차원인 공익성과 공정성에 대해서는 이를 담보하기 위해 실시되었던 국가주도의 공공사업이 버블 경제 붕괴와 세계화 과정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상황을 분석할 것이다. 다음으로 공공성의 정치적 차원인 공민성이 1990년대부터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세계 가치관 조사와 유권자 의식조사의 시계열데이터를 바탕으로 검토할 것이다. 4장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운영에서 나타난 비밀주의, 담합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공공성의 정치적 차원인 공개성의 문제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전후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원자력마을’ 후쿠시마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공공성의 측면에서 재배열하고 공공성의 위기 가운데 있던 일본사회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겪은 공개성의 문제를 짚어볼 것이다. 또한 공개성 문제로 시작된 원전반대 시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정부가 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을 1990년대 이후 일본사회가 겪었던 공정성 문제의 측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마지막 5장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전후에 나타난 공공성의 문제 양상과 공공성 수준 변화가 위험 회복 탄력성에 미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정리할 것이다.

    1)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역사를 사회사관점에서 분석한 요시오카(吉岡齊, 1999)에 따르면, 원자력이란 단어는 ‘핵에너지’나 ‘원자핵 에너지’로 표기해야 하며, 핵에너지란 말에 군사적 이용(military use)와 민사이용(civil use) 포함되어 있으나 원자력이란 단어를 사용할 경우, 민사이용의 측면으로만 이해되어 핵에너지 기술의 본질적인 이중성(duality)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요시오카가 언급한 것처럼 원자력 에너지란 말이 일본에서 이미 일상용어로 보급되어 있고 핵에너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본 논문에서도 원자력 에너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2)원자력 발전소 입지 방법은 토지수용(국가가 공공목적을 위해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포함한 강제적 방법, 원전관련 정보를 통제하여 동의를 얻어내는 방법, 광고나 교육을 통해 주민 동의를 얻는 방법, 인센티브를 부여하는방법 등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입지를 위한 토지수용을 원칙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주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건설을 추진해 왔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한 인센티브 제도의 대표적 예로는 전원 삼법 교부금(電源三法交付金)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전원개발 촉진세법, 전원개발 촉진대책 특별회계법, 발전용 시설주변 지역 정비법 등 세 가지 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원삼법 교부금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 논문의 4장 1절을 참조.  3)2014년 현재, 일본에는 17곳의 원자력 발전소와 54기의 원자로가 분포하고 있으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의 최대전력은 4만 8,960MW에 달했다. 일본에서 ‘원자력 마을’이란 표현은 원자력 발전소관련 사업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마을을 뜻하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원자력 발전소를 둘러싼 정계, 학계, 산업분야의 유착관계를 드러내는 ‘원전마피아’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후자의 의미에 대한 분석은 4장 2절을 참조.  4)다나카(田中) 총리는 1974년 원자력 발전소 유치지역에 교부금를 주는 제도를 도입하면서“도쿄에서 만들 수 없는 것을 지방에서 만들어 전기를 보내주고, 그 대신 (지방에는) 돈을 보내주면 된다.”고 하였고,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 쓰레기 매립장이나 미군기지 같은 시설유치와는 달리 손해보상이 아닌 ‘이익유도’라는 측면에서 교섭이 시행되고 교부금이 주어졌다(淸水, 2011a: 25).

    2. 경제버블 붕괴 이후 본격화 된 일본의 공공성 논의

    구혜란(2015)에서 논의된 것처럼 공공성 개념은 포괄적이고 다의적이기 때문에 공공성을 구성하는 요소를 통해 그 성격이 분석되어 왔다. 공공성의 작동 시스템 수준과 그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앞의 논문이 제시한 공익성, 공정성, 공민성, 공개성의 네 가지 개념은 일본의 공공성 논의에서 어떤 형태로 분석되어 왔을까? 공공성이란 단어를 일본의 대표적인 국어사전인 『廣辭苑』과『大辭林』에서 찾으면 각각, ‘넓게 사회 일반에 이익이나 정의를 갖는 성질’, ‘넓게 사회 일반에 이해나 영향을 주는 성질, 특정 단체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전체에 열려 있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사이토(齋藤純一, 2000)는 공공성의 개념을 국가에 관계되는 공적인(official),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모든 사람들과 관계되는 공통의(common),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open)이란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하였고, 야마와키(山脇直司, 2004)도 공공성을 의미하는 public 이란 단어가 일반사람(people)에 관련된, 공개된(not hidden, open), 정부의(governmental, official)라는 세 가지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등 일본에서 공공성 개념은 공익성, 공정성, 공개성, 공민성이라는 일반적 공공성의 네 가지 요소 중에서도 특히 공익성과 공정성을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공공성이란 단어가 가진 개념적 의미와는 별도로 일본사회에서 공공성은 오랫동안 정부가 철도, 도로, 발전소 등의 건설을 추진할 때 공공사업에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어왔으며, 생명과 생활에 관련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공공의 복지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불편을 감수하게 하는 용어로 이용되어왔다. 공공성의 일본적 맥락에 주목했던 사이토(齋藤純一, 2000; 2002)는 공공성이란 개념 자체가 공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거나 국가의 공공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국가가 독점적으로 정의하던 공공성에 대해 비판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이후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1990년대를 또 다른 말로 정리해 본다면 버블경제가 붕괴된 시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 재정파탄의 상황에 직면한 일본에서는 한정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 국가가 공공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주체로 작동해 온 것에 대한 비판과 공공성 확보라는 이름하에 규모를 늘려온 공공사업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오구마·야마우치·키노시타(小熊英二·山內明美·木下ちがや, 2013)는 1985년 프라자합의와 1989년부터 시작된 미일구조협의로 대미수출량이 급감하고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의 쇠퇴가 공공사업의 증가로 이어졌던 점을 지적하면서 당시의 공공사업이 도시 지방간의 격차를 줄이는 대책이면서 동시에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이었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공공사업 규모의 증가가 1998년 절정에 달하여 당시 일본 노동인구의 22퍼센트가 공공사업과 관련된 건설업에 종사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 인한 지방산업의 약화가 오히려 지방 경제의 자생력을 떨어뜨리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小熊·山內·木下, 2013: 62).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1990년대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국가 주도의 공공성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반성이 한편으로는 시민적 공공성을 중요시하는 연구(齋藤, 2000; 佐々木·金編, 2002; 山脇, 2004)로 발전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2000년대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 또는 네셔널리즘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몇 가지 논의로 재편되어 갔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등장한 시민적 공공성 논의에 상반되는 논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국가=공(公)’, ‘관료제=공(公)’의 중앙집권적 권력의 대항 축에 ‘사(私)’, ‘민(民)’을 놓고 이들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흐름을 들 수 있다. 경제 버블 붕괴 이후 일본에서 추진된 초기의 정치개혁노선 안에는 민주화 및 분권화를 중요시하는 민주주의 진영과 민영화 및 규제완화에 중점을 두는 신자유주의 진영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공공성과 관련하여 민주주의 진영은 시민사회로부터 발현되는 공공적 관심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신자유주의 진영의 경우 공공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적 이익 추구 보장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버블 붕괴 이후 기존의 국가 공공성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정책적 시도 역시 혼선을 거듭하게 되었다(小林, 2002: 118).

    이와 같은 혼선은 고이즈미(小泉) 내각이 출범한 2001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정책이 중점적으로 시행되는 가운데 민영화와 규제완화의 방향으로 정리되어 갔는데 고이즈미 내각이 실시한 우정(郵政)민영화를 축으로 하는 ‘관에서 민으로’의 정책흐름과 ‘중앙에서 지방으로’란 슬로건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개혁노선’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이후 일본에서는 공기업과 지방뿐만 아니라 근로자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도 노동자파견법을 개정하여 비정규직인 파견 노동의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등 효율성과 사적이윤추구를 보장하는 정책이 다수 시행되었고, 이와 같은 정책은 이제까지 기업이 정규고용자에 대한 복지혜택과 연금혜택을 제공하면서 국가의 복지제도를 보완해 온 일본식 고용체계와 복지체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공공성의 중요한 요소인 공정성의 수준 또한 이 시기를 거치면서 크게 낮아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공공성을 네셔널리즘의 틀에 맞춰 재정의하려는 시도, 즉 공공성을 ‘국민공동체’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등장하였다(小林, 2002; 齋藤, 2002). 고바야시(小林正彌, 2002)는 신(新)네셔널리즘으로 분리되는 이와 같은 조류가 전후에 만들어진 일본 헌법을 미국에 의해 강제된 것으로 보거나 1990년대 후반에 일어난 경제위기를 미국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 보는 세력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신 네셔널리즘이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미화하고 ‘국가≒공(公)’에 대한 헌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小林, 2002: 118-119). 이처럼 국민공동체와 공공성을 동일시하는 공공성 논의에 대해 사이토(齋藤純一, 2002)는 공적인 것을 오로지 국민국가로 해석한다는 점, 과거 식민지주의에 대한 반성에 입각한 일본의 역사의식이 부정되는 점 등 논의의 초점이 ‘국가의 자부심’을 해치지 않는 것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의 공공성의 중시하는 논의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국가가 담당해야 할 공공성을 적극적으로 재(再)정의하려는 입장으로부터도 명확히 구별된다고 분석하였다(齋藤, 2002: 104-106).

    공공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주도의 공공성 확보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일본의 공공성 논의는 버블 경제 붕괴라는 국내적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나타난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국가가 담당해야 할 최소한의 공공성에 대한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한 공공성 논의와 네셔널리즘에 입각한 공공성 논의가 뒤섞여 있었다. 또한 이와 같은 혼재가 결과적으로 규제완화를 통한 기업 이윤 추구의 흐름을 가속화 시킨 한편, 근로자 고용상태의 불안을 초래하여 사회의 안전망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생활 안전망을 확보해 줄 강한 국가에 대한 갈망을 생산해 냈다. 그렇다면, 경제 버블 붕괴 이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일본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을까? 이어지는 3장에서는 ‘잃어버린 20년’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이후의 일본상황을 사례와 지표로 나누어 각 부문의 공공성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검토해 나갈 것이다.

    3.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공공성

    경제 버블 붕괴와 경기침체의 장기화 같은 경제적 변화는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구혜란(2015)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공공성은 국가와 시민사회 같은 공공성 실현 주체들 간의 관계와 조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고, 이를 재생산하거나 변화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개인 행위자들의 집합적 행위들의 원천으로서 미시적 행위 의지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일본의 경우 경제 버블이 붕괴되고 장기침체가 시작된 시기가 신자유주의 흐름의 가속화 시기와 맞물려 있고, 이 시기에 경제성장률과 산업구조 변화와 같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저출산 고령화 문제와 같은 인구구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변화를 경험해왔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1990년대 이후의 일본사회가 겪은 구조적 변화의 흐름은 일본인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으며 개개인의 의식변화는 일본사회의 공공성 지표에도 영향을 주었다.

    본 장에서는 공공성의 구성 요소로 사용하고 있는 네 가지 개념 중 공익성, 공정성, 공민성을 사례와 지표로 나누어 일본사회의 공공성의 변화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례 부문에서는 국가주도의 공익성, 공정성의 담보방식이 버블 경제 붕괴와 세계화과정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과정을 공공사업을 통해 살펴보고 지표부문에서는 노동력조사, 유권자 의식조사의 시계열 데이터를 바탕으로 1990년대부터 2000년 이후까지 공민성과 관련된 지표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검토할 것이다.

       1) 공공사업을 통한 공익성·공정성 확보의 한계

    일본의 공공사업은 패전 이후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 구제하기 위해 연합군총사령부가 60억 원의 공공사업비를 들여 100만 명에서 125만 명 규모의 일자리를 제공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대까지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도로, 항만시설 확충과 같은 산업기반 시설 건설 분야에 집중되던 공공사업은 급속한 공업화로 공해문제가 대두되면서 환경위생, 상하수도, 후생복지 등 도시와 생활기반 마련을 위한 사업으로 그 분야가 확장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산업기반시설과 생활기반시설을 위한 공공사업의 비율이 비슷한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山田, 2008: 26-29).

    1980년대까지 일본의 산업은 제조업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항만을 통해 수출하는 중공업이 수출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각지에 항만과 도로를 건설하는 공공사업은 국가 전체의 산업 경쟁력을 높임과 동시에 균형발전을 이루는 ‘공공적’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버블시기에 제조업의 주력분야가 중공업에서 자동차, 전기, 조립 산업으로 옮겨지면서 이와 같은 산업이 집중되어 있던 도쿄, 오사카, 나고야 같은 몇몇의 도심을 제외한 지방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도심지역의 부동산 버블을 주축으로 한 버블경제가 지속되는 동안 도시 지방간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버블경제가 붕괴되기 전까지 규모가 축소되어온 일본의 공공사업은 몇 가지의 사건을 통해 그 규모가 증가하게 된다. 첫째로, 1989년부터 1990년까지 5 차례에 걸쳐 실시된 미일구조협의를 들 수 있다. 이 협의에서 미국은 최종보고에서 일본이 수출산업에 재원을 투자하는 것보다 공공분야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 놓았고 이에 대해 일본은 향후 10년간 430억 엔을 공공사업에 투자하겠다는 ‘공공투자기본계획’을 책정하여 그 내용이 1991년 예산부터 반영되게 되었다.

    둘째로, 버블 경제가 붕괴된 이후 악화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1992년부터 2000년까지 8차례의 공공사업관련 경제대책이 실시되면서 공공사업의 규모가 증가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시행된 대책은 1992년 공공사업과 중소기업대책을 골자로 하는 10조 엔 규모의 ‘종합경제대책’을 시작으로 적게는 6조 엔 많게는 16조 엔 이상의 재원이 공공사업에 투자되었다5).

    이와 같은 공공사업 규모의 증가는 [그림 1]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980년대를 거쳐 감소하던 공공사업 규모는 버블이 붕괴된 1992년, 9조 9천억 엔으로 증가하였고 아시아 금융위기가 있었던 1998년에는 14조 9천억 엔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같은 시기의 보정예산 또한 적게는 1조 엔에서 많게는 5조 엔 이상으로 1990년대에 당초예산보다 많은 예산이 공공사업에 투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와 지방 간의 격차를 줄이고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한 자극책으로 시행된 공공사업은 지방 인구 고령화 문제가 심화되고 경제 성장률이 제로에 가까워진 1990년대 이후, 본래 공공사업이 추구하던 공공성을 충분히 달성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지방 산업이 활기를 띠었던 고도 성장기에는 공공사업으로 건설한 항만이나, 교통인프라가 지역 산업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지만 중공업을 비롯한 지방 산업이 쇠퇴하는 시기에 건설된 산업기반 시설은 건축업을 중심으로 한 단기적 일자리를 제공할 뿐, 지역의 자립적 역량을 되살리는 역할은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에 실시된 공공사업 투자액을 부문별로 정리한 [표 1]을 보면, 전체의 25%이상이 유료도로, 주차장, 가로 등을 포함한 도로 관련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1960년대의 고도 성장기와 비슷하고 경제성장이 안정되었던 1970년대보다 훨씬 많은 액수다. 이 액수만 비교해 보더라도 1990년대의 공공사업은 사업시행 당시에 내걸었던 도시와 지방간 격차완화나 지방의 경기자극과 같은 목적보다는 대규모 건축 사업을 통한 단기적 일자리 마련 등 가시적인 효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지역 상공회의 합의가 없을 경우 대형점포의 출점이 어려웠던 ‘대규모소매점포법’(1973년 제정)이 미일구조협의의 영향으로 1991년에 개정되면서 공공사업으로 만들어진 지방 곳곳의 대형도로 주변에는 대규모 종합 쇼핑몰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의 일반 상점가는 급속도로 위축일로에 접어들었고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지방의 소매점 수는 이전의 약 3분의 2 수준으로 줄어들었다(小熊, 2014: 31-32).

    이처럼 전후부터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던 ‘공공성’의 확보는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경제 성장률이 제로에 가까워진 1990년대에 들어 도시 지방간의 격차 완화라는 공정성도, 국가 전체의 이익 추구라는 공익성도 달성하지 못한 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공사업을 통한 공공성 확보가 한계에 직면한 1990년대 이후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은 어떤 형태로 변화되어 갔을까? 다음 절에서는 경기 장기침체가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에 미친 영향을 세계가치관조사, 유권자 의식조사 등의 시계열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해보고자 한다.

       2) 1990년대 이후의 공민성 관련지표 변화

    일본 시민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서구의 자원봉사 활동이나 종교를 기반으로 한 시민단체 활동과 달리 초나이카이(町內會)처럼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조직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Pekkanen, 2006). 일본 시민사회의 역량을 주요 지표로 하는 공민성의 수준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 시민사회의 조직참가율의 추이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그림 2]와 같다.

    일본인의 단체 및 조직 가입률은 1990년대 후반 이후 급속하게 저하되고 있는데 일본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시민 활동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자치회의 가입률은 1980년대까지 65%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2000년에는 50%, 2007년에는 40.4%까지 떨어졌다. 지연 조직의 참가율이 떨어졌다는 것은 조직 활동에 참여하는 새로운 구성원이 줄어들었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기존의 조직 구성원 활동이 저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사회의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가 진행된 것은 밖으로부터의 유입과 내부의 활동역량을 동시에 저하시키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직 참가율은 단순히 일본사회의 인구구조 변화로 인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부인회나 청년회 같은 특정 인구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단체의 가입율도 1990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07년에는 6.6%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까지 20%미만이었던 비가입자의 비율이 2000년에 31.9%에서 2007년 36.4%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약 20% 가까이 증가하여 일본 시민사회의 활동기반이 전체적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카모토(坂本治也, 2010)는 이와 같은 일본인의 단체 및 조직에 대한 참가율의 추이를 통해 단체와 조직 가입률 저하가 일본 시민사회의 활동 역량을 떨어뜨리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시민 활동 조직의 참가율 변화는 시민의 의식수준이 반영된 세계 가치관 조사의 데이터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의 참여와 연대에 기반이 되는 일반적 신뢰의 정도를 시계열로 살펴본 [그림 3]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믿을 만하다”는 제시문에 대해 1981년에는 전체 응답자의 41.5%가, 1995년에는 46%가 그렇다고 응답하여 1990년대 중반까지 일본 사회의 일반적 신뢰도가 증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증가추세는 1995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여, 2000년 43.1%, 2005년 39.1%, 2010년에는 38.8%를 나타내고 있다.

    일본 사회 전체적으로 일반적 신뢰가 급격히 감소한 것의 의미를 각 대상에 대한 신뢰의 정도를 측정한 2010년도 세계 가치관 조사 데이터를 통해 살펴보면 일본의 경우 가족에 대한 신뢰도가 99%로 매우 높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84.5%, 이웃에 대한 신뢰도가 61.7%를 나타낸다. 그 반면 국적이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22.8%,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16.5%,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10.9%로 일반적인 타자와 특수한 타자에 대한 신뢰도 사이에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상에 따른 신뢰도의 현격한 차이는 사회 구성원 간의 협력과 소통에 영향을 주고 무엇이 공익과 관련된 것인가를 결정해 가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일본사회 전체로 봤을 때 경기침체의 장기화는 국가의 공공성 수준뿐만 아니라 시민의 공공성 수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공공성 문제는 1990년대 이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본 장에서 다루지 않은 공공성의 또 다른 구성요소인 공개성의 경우 원자력 에너지와 같은 전력산업 부문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비밀주의에 싸여 있는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신화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지켜온 ‘폐쇄적 정치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사례를 통해 한 사회의 공공성 수준이 위험에 대한 대처와 장기적 극복방향 설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5)1992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에서 공공사업과 관련하여 1992년 종합 경제대책(10.7조 엔), 1993년 4월 신종합경제대책(13.2조 엔), 1993년 9월 긴급경제대책(6.15조 엔), 1994년 종합경제대책(15.25조 엔), 1995년 대형경제대책14.22조 엔), 1998년 종합경제대책(16.65조 엔), 1999년 경제신생대책(약 18조 엔), 2000년 신발전정책(약 11억엔)등 총 8번의 경제대책이 시행되었다.

    4. 공공성 관점으로 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1) ‘원자력 마을’ 후쿠시마가 탄생하기까지

    일본은 도쿄전력을 포함한 10개의 전력회사가 일본 각 지역에서 발전, 송전, 배전, 판매등 전력 생산부터 최종 수요자에 대한 공급까지 모든 단계의 사업을 독점하고 있다. 원자력 에너지의 경우도 10개의 수직 종합형 기업에 의해 지역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전력공급이 이루어져왔으며, 원자력 에너지 이용 또한 국책으로 추진되어 몇 곳의 지역에 대규모발전소가 집중적으로 건설되어 왔다. 2011년 일어났던 원전사고 피해지역인 후쿠시마도 수력발전소가 9곳, 화력발전소가 5곳, 풍력발전소와 바이오매스 발전소가 각각 2곳, 지열발전소와 태양열 발전소가 각각 1곳,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가 2곳 위치하고 있다.

    이 중 원자력 발전소만 놓고 보더라도 후쿠시마는 도쿄전력회사의 15%를 차지하는 2개의 발전소와 10기의 원자로가 집중되어 있는 ‘원자력 마을’이다. 후쿠시마에 여러 개의 원자로가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인구변화와 산업구조 변화 측면, 일본정부의 원자력 발전소 입지 혜택의 구조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후쿠시마 지역이 위치한 일본의 동북지방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자원 의존형 개발이 주를 이루어 왔고, 1970년대부터 도심에 본사를 둔 중화학 공장이나 전기, 기계 부품 공장이 집적하기 시작한 곳으로 1990년대 이후 제조업 관련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지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은 것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받아들이게 된 중요한원인이 되었다.

    이 외에 후쿠시마에 기자력발전소가 집중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일본 정부의 ‘이익유도형’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알드리치(Aldrich, 2008)는 일본 정부가 원자력 발전소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기보다는 지역 대학의 과학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원전의 안전성을 교육하고 홍보하는 커리큘럼을 만들거나 원자력 발전소가 일으킬수 있는 환경오염 문제에 민감한 농업, 어업 관련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생산품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지역 주민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안전신화6)’에 힘을 더한 것은 전원3법교부금과 같은 경제적 이익 보장 시스템의 존재였다.

    전원3법은 크게 전기 소비자 개개인이 납부하는 전기료에서 부담하게 하는 전원개발촉진세법, 전원개발촉진세법으로 얻은 수입을 특별회계로 관리하기 위한 전원개발촉진대책특별회계법, 특별회계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입지한 곳에 재원을 교부하는 법적 근거가 되는 발전용 시설 주변 지역 정비법 이렇게 세 가지 법으로 구성되어 있다7). 전원3법으로 교부되는 금액은 원자로의 출오량에 따라 달라지는데 135만kW의 전력을 생산하는 원자로 1기가 건설시기와 운전기간을 포함하여 45년 가동될 경우 입지 지자체와 주변 지자체, 지자체가 속한 현(縣)에는 약 1240억 엔이 교부된다. 이와 같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담보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에는 1971년부터 1979년까지 6기의 원자로가 세워졌으며, 제2원자력 발전소에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4기의 원자로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림 4]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원자력 발전소 건설관련 교부금 액수가 가장 많은 시기는 원전 건설공사가 시작되어 원전 가동이 시작되기까지의 7년간이며 원전이 가동되기 시작하면 현저히 줄어드는 교부금 대신에 고정자산세를 통해 재정적 이익을 얻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고정 자산세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수입이 감소하고 원자로의 추가건설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 이익의 지속성 수준이 낮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전 유치와 관련된 교부금의 경우, 사용용도가 도로, 학교, 스포츠 및 문화센터등 공공시설의 설비에 한정되어 있어 지역 산업이나 지역 재생을 위해 사용되기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외에도 전원3법교부금가운데 원자로 가동이 개시된 지 30년부터 5년간 매년 교부되는 원전입지지역공생교부금의 경우 원자로가 오래될수록, 핵폐기물 저장량이 많을수록, 플루토늄이 포함된 MOX연료(Mixed OXide fuel)를 사용할수록 금액이 증가하는 고위험 부담형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淸水, 2011b: 98-101).

    실제로 후쿠시마 지역의 원전과 관련된 고정자산세 수입이 가장 많았던 1983년에는 약 18억 엔에 달하였으며 이는 당시 지역 총 세수입의 54%를 차지하는 수준으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의 원전에 대한 지역의존도는 심각한 수준에 달하고 있었다8). 원전에 대한 지역 의존도는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일례로 총무성의 시정촌별 결산 상황조(市町村別決算狀況調)9)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인 2010년의 전원3법교부금의 액수는 후쿠시마 제1원전이 위치한 후타바초(双葉町), 오오쿠마초(大熊町)가 각각 19억8천 엔, 16억9천 엔으로 지역세입의 32%와 22%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원전을 통해 두 지역에 유입된 고정자산세 또한 각각 16억6천 엔, 27억1천 엔으로 전체 세입의 27%, 36%에 달하고 있었다.

    교부금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공공성의 문제는 일본 공공사업의 최대 목적이라고 할수 있는 고용창출이란 측면에서 볼 때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2001년 도쿄전력이 공개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고용현황을 보면, 제1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619개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7108명, 제2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499개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4552명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유지를 통해 약 12000명 규모의 고용이 창출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원삼법을 통한 교부금 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고용은 원자로 건설시기에 집중되는 일시적인 것일 경우가 많으며, 고용 창출이 붐을 이루는 건설 시기가 지나고 나면 농촌지역의 산업구조와 취업구조가 심각하게 변형되는 문제를 낳았다. 지역 내에서 전력관련 서비스업이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건축업 종사자가 급증하는 것은 곧 본래의 지역 경제 구조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발전소가 지어지고 설비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지역 경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원자로 추가건설이라는 국가 주도의 공공사업 의존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淸水, 2011a: 28).

    이처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나기 이전까지 후쿠시마 지역은 세계화 흐름의 가속화로 인한 공장의 해외 이전과 산업구조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채 1980년대까지 10기의 원자로를 건설을 유치하면서 공공사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 시스템을정착시켜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공사업의 혜택으로 선전되었던 전원3법에 의한 교부금은 단기적인 것 일 뿐만 아니라 노후한 원자로를 가동시키거나 핵연료를 많이 저장하면 할수록 지역 교부금이 증가하는 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공공사업이 만들어 낸 고용효과도 원자로 건설 시기에 집중되어 지역 경제유지를 위해 원자로 건설을 추가적으로 유치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어떤 형태로 가시화 되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다음 절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나타난 공개성의 문제부터 짚어보도록 하겠다.

       2) 정보은폐를 가능하게 한 일본의 ‘마지막 기득권층’

    동일본 대지진은 자연재해였지만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분명한 인재(人災)였으며,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느끼는 불만(frustration)의 근원은 사고 당사자인 도쿄전력과 정부의 설명책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일본 매스미디어가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사고에 의해 어느 정도의 피해가 발생한 것인지,누가 책임을 지고 사고에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던 것에서 찾을수 있다(마쓰오카, 2013: 51-52).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정보자체가 갖는 중요성과 정보의 공개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이유는 원전관련 재해가 피해자 스스로 피해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미즈(淸水修二, 2011a)는 이번 사고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로 부상한 방사능 문제 역시 방사능이 보이지 않는 물질이고 피해의 정도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보’가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정보의 신빙성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었던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 정부와 매스미디어는 왜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던/못했던 것일까?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경제 산업성 원자력 안전·보안원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국제 원자력 사고 평가척도(International Nuclear Event Scale, INES)10)의 레벨 4에 해당한다고 잠정 평가했으나, 3월18일에는 미국 스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 수준에 해당하는 레벨 5로 조정,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4월12일에는 원자력 사고 사상 가장 심각했던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동일한 레벨 7로 그 단위를 상향조정하였다. 그러나 사고 레벨이 4에서 7로 조정되는 동안에도 메스미디어에서는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들이 사고를 과소평가하고 안전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나 사고로 인해 발생한 방사능 피해에 대한 전문적 지식=정보가 부족했던 일본 국민들은 미디어에서 전달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사무라(正村俊之, 2013)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레벨이 7로 상향조정되기 약 3주 전인 3월24일에 이미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성 요오드 131과 세슘137의 방출량이 각각 체르노빌의 73%, 60%라는 조사결과가 영국의 과학 잡지 『new scientist』에 실리는 등 국내에서는 보도되지 않는 내용이 해외 언론에서 다수 소개되었으며, 국내 미디어와 해외 미디어 간의 정보량과 내용차이가 명백히 드러나면서 매스미디어와 일본 국내의 원자력 전문가에 대한 신뢰의 수준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디어와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 일시적 현상을 넘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문부과학성 웹사이트에 방사능 영향 예측 네트워크 시스템인 스피디를 통해 원전사고 직후부터 측정된 방사능 경로 지도가 공개된 2011년 4월 26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마쓰오카(松岡俊二, 2013)에 따르면 문부과학성 및 원자력 안전 보안원은 사고 직후부터 스피디를 통해 수 천 번의 확산 예측을 실시해왔으며, 그 결과 일본정부가 사고 직후 방사능 오염이 방사선 방향으로 확산될 것이란 가정 하에 실시했던 계획 피난과는 달리, 실제로는 북서쪽의 방사능 오염이 심각했고, 피난 대상지역이 아니었던 나미에마치(浪江町) 지역이 100시간 동안 30밀리시버트에 달하는 방사능에 노출된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보가 공식적으로 알려지고 이 지역이 계획적 피난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계획피난이 이루어진 3월15일로부터 한 달 가까이 지난 4월11일이었다.

    그렇다면 원전사고 직후부터 원자력 관련 전문가들이 미디어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을 하고 방사능 확산을 예측한 데이터를 무시한 피난 정책이 내려지는 등 공개성 둘러싼 문제가 불거진 이유는 무엇일까?

    앞 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원자력 에너지 시스템은 도쿄전력을 포함한 9개의 전력회사가 지역 독점적 형식을 띠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에너지 사용량이 장기간에 걸쳐 ‘직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원자력 개발체재가 가진 특징 중하나인 ‘서브 거버먼트 모델’(subgovernment model)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요시오카(吉岡齊, 1999)는 서브 거버먼트 모델이 어떤 특정 공공 정책분야에서 정치가, 관료, 업계 전문가로 구성된 일정 집단이 고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국가 정책의 결정권을 사실상 독점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모델이라고 정의하고 일본의 원자력 정책에도 전력·통신 분야와 원자력 과학기술 분야의 두 그룹이 연합하여 서브 거버먼트가 운영되어왔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56년에 발족한 일본의 원자력위원회는 앞선 두 그룹의 합의에 기반을 둔 원자력 개발 이용의 방침을 국책으로 시행하도록 하는 중심적 역할을 감당해 왔으며 법률상으로 일본 원자력 정책의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서 결정권을 행사해왔다. 일본의 원자력 위원회는 1961년에 제정하여 그 후 수차례에 걸쳐 개정한 ‘원자력 개발이용 장기 계획’에 근거하여 일본 원자력발전 사업의 방향을 정해왔을 뿐만 아니라 ‘국책’으로 사업을 진행해왔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지방의 재정확충이나 도시 지방간의 격차 감소 등 ‘공공적’ 목적을 위해 시행되는 공공사업의 한 부류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역주민의 적극적·소극적 ‘동의’를 통해 일본 전역에 원자력 발전소가 꾸준히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공공적’ 목적을 위한 사업이라는 사업의 성격 이외에도 원자력에너지의 안전성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믿음, 즉 ‘안전신화’가 가진 힘 때문이었다. 우찌하시(內橋克人, 2011)는 일본에서 원자력 에너지 관련 예산이 1954년부터 편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원자력 에너지의 이미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원자력 위원회를 비롯한 원자력 관련기업이 원자력 에너지의 위험성에 대한 보도 통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원자력 안전성에 대한 교육 실시, 유명 문화인을 기용한 원자력 캠페인 실시 등 크게 세가지 방식을 통해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안전신화를 구축해왔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안전신화를 만들어 온 이익공유형 폐쇄집단을 일본에서는‘원자력 마을’(原子力ムラ)이라고 부르는데, 원자력 마을은 앞서 언급한 원자력위원회를 중심으로 1950년대부터 정계·학계·산업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고, 1990년대 이후 버블경제가 붕괴되고 세계화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일본의 각 산업이 생존을 위해 구조조정이나 가격경쟁을 위한 개혁방안을 내놓을 때에도 여전히 독점을 행사한 ‘마지막 기득권층’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일본의 ‘마지막 기득권층’의 철저한 담합과 비밀주의가 예상밖의 자연재해를 계기로 가시화된 시스템의 실패, 즉, ‘구조적인 재해(構造災)11)’였다고 볼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원인과 문제를 분석한 후쿠시마원전사고 독립검증위원회(福島原發事故 獨立檢證委員會)12)의 조사·검증 보고서에서는 원자력 마을을 ‘중앙의 원자력 마을’과 ‘지방의 원자력 마을’로 나누어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 마을의 관계를 분석하여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중앙의 원자력 마을은 원자력 행정에 관련된 경제산업성과 에너지청, 문부과학성, 전력회사, 원자력 산업, 재계, 정계, 매스 미디어, 학술계, 전력관련 노동계를 포괄한 거대 원자력 유지 체제를 말하며, 중앙의 원자력 마을이 일본의 에너지 정책과 원자력 정책을 독점적으로 정하고 전문성이 높은 분야라는 이유로 시민단체의 참여를 제한하거나 사업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은 것이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편,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는 지역의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민박시설이나 음식점 등 원전 노동자 관련 산업의 이해당사자들로 구성된 지방의 원자력 마을이 오랫동안 원전 유치 및 원자로 추가 건설의 지지층 역할을 담당하면서 전원3법 교부금의 혜택을 누려온 것 또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福島原發事故 獨立檢證委員會, 2012: 323-334).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중앙 원자력 마을과 지방 원자력 마을의 이해가 결탁되어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정보가 철저히 차단된 채 원전 건설 사업이 국책, 그 중에서도 공공성을 띠는 공공사업의 형태로 추진되어 온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에 나타난 원자력 기술 전문가들의 발언 내용, 사고의 심각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보도가 지속된 것, 그리고 방사능 오염 확산에 대한 데이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표하지 않았던 것 모두 ‘원자력 마을’이란 이익 공유형 폐쇄집단의 통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둘러싼 일본사회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일본 국민들은 일본정부에 대해, 도쿄전력을 중심으로 한 원자력 마을에 대해, 그리고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매스미디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 나갔을까? 이어서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 변화와 원전관련 단체의 비밀주의가 원전사고의 극복과정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3) 공정성 위기가 낳은 안전·경제 대립론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방사능 오염문제가 일상의 먹거리 문제까지 침투하면서 이제까지 미디어에서 제공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던 많은 시민들이 미디어에 불신을 갖게 되었다. 한 예로, 미디어에 관한 전국 여론조사(メディアに關する全國世論調査)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1년 후인 2012년의 미디어 신뢰도는 NHK가 74.3%에서 70.1%로, 신문이 72%에서 68.9%로, 민영방송이 63.8%에서 60.3%로 떨어졌다13). 조사가 시작된 2008년 이후 거의 변화가 없던 수치가 4% 전후로 떨어진 것만 봐도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본 시민의 미디어 신뢰도에 미친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일본의 공개성 위기는 국내의 조사기관뿐만 아니라 국제 조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국경 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 가 내놓은 보도 자유도의 순위(World Press Freedom Index)에서도 일본의 보도 자유도는 2010년 11위에서 2011년 22위, 2012년 22위, 2013년 53위, 2014년 59로 매년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사고의 원인이 단순한 자연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자력 마을과 같은 일본의 오래된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민들은 원전사고 이후 전국 곳곳에서 원전 재가동 반대 운동과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건강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1990년대 이후 자발적 조직 참가율이 떨어지는 등 시민사회의 역량이 약화되던 때에 다시 활기를 찾은 시민 활동에 주목하는 연구도 다수를 이루었다(津田, 2012; 野間, 2012; 伊藤, 2012; 平林, 2012b). 공개성 위기가 오히려 시민활동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인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활동을 시작한 단체의 리더나 스텝 중에는 국가에서 정한 방사능 안전수치에 대한 불신과 정보은폐를 활동의 계기로 꼽는 경우가 많았다14). 그 밖에도 원전 재가동 반대 운동의 가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탈원전 시위의 경우, 2012년 3월부터 2014년 현재까지 매주 금요일 수상관저 앞에서 열리고 있는 관저 앞 시위(首相官邸前抗議)를 포함하여 도쿄에서만 이제까지 400회 넘게 일어났고15), 이제까지 운동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20∼30대의 젊은 연령층의 참가가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등16) 안전문제에 대한 일본 국민의 관심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그동안 침체국면에 들어섰던 시민성이 다시금 강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공개성의 위기를 계기로 활발해진 일본의 시민운동은 원전사고 후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원전사고 이후 일본 국민들 사이에 방사능 오염문제나 원전재가동 문제가 운동의 새로운 이슈로 부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문제가 실제적 정치이슈로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2012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처리가 한창 이루어지던 때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는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던 민주당의 3여 년에 걸친 집권이 막을 내리고 자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원전사고 이후 안전문제가 시민운동의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라는 정치적 선택에서 원전재가동을 추진하는 자민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왜 안전문제는 정치적 이슈로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던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풀어 나가기 위해 먼저 제46회 중의원의원 총선거 전국의식조사(第 46 回 衆議院議員 總選擧 全國意識調査)의 데이터를 살펴보기로 하자.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선거를 하면서 고려했던 사항을 연령별로 정리한 [표 2]를 보면, ‘원전 및 에너지’ 관련 이슈를 고려사항으로 꼽은 연령별 유권자의 비율은 20~30대에서 25.2%, 40~50대에서 31.5%, 60대 이상이 37.4%로 순위로 봤을 때 5위에서 8위에 머물러 있다. 한편, 모든 연령대의 유권자가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고른 것은 ‘경기대책’으로 40~50대가 70.5%로 가장 많았고, 60대 이상이 59.5%, 20~30대도 55.7%로 다른 이슈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경기정책과 밀접히 맞물려 있는 ‘고용대책’의 경우 40~50대가 35.1%, 20~30대가 28.5%, 60대 이상이 26.1%를 차지하고 있다. 2009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가장 많이 고려했던 사항이 경기 및 고용(20~30대 62%, 40~50대 71.5%), 연금문제(70.6%)였던 것과 비교하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경제문제의 비중이 높아진 것과 연령별 투표 고려사항이 경기관련 이슈로 일원화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유권자의 연령대와 상관없이 경기불황에 대한 불안이 확산된 것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에 일본사회가 놓여 있던 공정성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의 일본사회는 3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버블 경제 붕괴 이후 도시와 지방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국가주도로 실시한 공공사업이 결과적으로 지방의 역량을 약화시켜 공공사업에 의존하는 지역경제 사이클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여기에 1990년대부터 가속화된 세계화로 국가 성장을 이끌어 왔던 제조업 공장이 대부분 해외로 이전하고 1997년 이후 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가 더해지면서 일본은 고도 성장기에 구축해온 ‘일본형 공업화 사회’의 고용형태17)를 좀 더 ‘유연한’ 형태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1985년에 극히 제한된 직종에서 시행되던 파견노동의 업종이 1996년에 26개의 업종으로 확장되었고, 1999년부터는 원칙적으로 전 업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쉽게 고용할 수 있는 법이 마련되었다. 또한 2003년부터는 제조업 분야에서도 파견노동이 가능해져 고용의 불안정화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남성을 중심으로 한 신규 대졸자 정규채용과 종신고용제도를 통해 , 기업복지 등 기업을 사회 안전망으로 활용하면서 사회의 공정성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비정규노동자의 증가는 곧 공공성의 한 측면인 공정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와 같은 공정성 위기의 장기화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재난의 극복과정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문제가 2012년 중의원 선거 결과에서 드러난 안전경제 대립론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일본의 경제정책 아베노믹스가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전(前) 경제산업성 관료 코가 시게아키(古賀茂明)는 아베노믹스와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터뷰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제침체의 장기화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불거진 방사능 오염이나 원전 재가동의 문제를 경제 회복의 장애요소로 취급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원전사고를 경제 성장으로 극복하고자 한 논의는 대담한 금융정책과, 기동적인 재정정책, 민간투자를 환기시키는 성장전략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원전 재가동과 관련하여 아베내각은 2013년 6월에 원전 안전장치 설치가 완비되지 않아도 안전 검사 이후 5년 이내에 안전 장치를 마련하면 재가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원전 신 규제기준을 발표하였으며 2014년 4월에는 원자력 에너지를 일본의 중요한 기본 에너지원으로 지정하고 원전 재가동과 새로운 원자로 건설을 추진하기 위한 ‘에너지 기본계획’을 각의에서 결정하였다.

    아베내각은 그동안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을 통해 엔화약세 유도 정책을 실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가 개선되지 않은 이유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전가동이 중지되면서 광물성 연료 수입이 증가한 것에서 찾고 있다(淸水·佐藤, 2014). 화력 발전에 필요한 연료 수입이 증가하고 엔화약세가 정책적으로 시행되는 가운데 연료수입액 또한 증가했다는 논리다. 이와 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아베 내각은 아베노믹스의 마지막 정책인 경제성장 전략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고 있으며, ‘에너지 기본계획’에서도 원전규모에 대해 ‘확보해 나갈 규모를 정한다’고 명시하는 등 원자로 추가건설에대해서도 적극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원전 재가동이 경제회복과 경제성장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안전·경제 대립론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어난 시민사회의 반성과 그 반성을 통해 등장한 원전제로 정책노선을 원점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고, 이와 같은 정책을 뒷받침한 것은 경기 대책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권자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안전문제보다 경제회복, 경제성장의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사회 경제적 환경이 장기경기침체와 이로 인한 고용형태의 불안 확산 등 일본형 공업화 사회의 기능부전에 의한 공공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6)안전신화의 형성주체와 특징에 대해서는 4장 1절의 논의를 참조.  7)전원삼법은 원자력 발전이외의 다른 전력 에너지 발전소 건설에도 적용되지만 다음의 교부금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교부금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전원삼법을 통해 만들어진 교부금 중 원자력 에너지 발전과 관련된 교부금 종류는 크게 전원 입지지역 대책 교부금, 전원 입지 등 추진 대책 교부금, 전원 지역진흥 촉진 사업비 보조금의 세 분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의 교부금은 하위의 교부금 명목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전원 입지지역 대책 교부금에는 전원입지등초기대책교부금, 전원입지촉진대책교부금, 원자력발전 시설 등 주변 지역 교부금, 전력 이출등 교부금, 원자력 발전시설 등 입지지역 장기발전 대책 교부금이 포함되어 있고, 전원입지 등 촉진 대책 교부금에는 원자력 발전 시설 입지 지역 공생 교부금, 핵 연료 사이클 교부금, 원자력 발전 시설 등 입지 지역 특별 교부금, 광고 및 안전 등 대책 교부금이 포함되어 있다(경제산업성 자원에너지청, 2010: 6)  8)朝日新聞(2011). “神話の陰に-福島原發40年(4)”, 2011.5.28  9)총무성 시정촌결산상황조 http://www.soumu.go.jp/iken/kessan_jokyo_2.html 2014.11.14  10)국제원자력사고평가척도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경제협력개발기구원자력기관(OECD)가 기술전문가·미디어와 대중사이에 사고에 대한 이해와 이에 대한 의견교환을 원활히 하기 위해 책정한 척도다. 인구와 환경, 방사능의 관리 및 통제, 피해의 동심원적 확산(defense in depth)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1단계에서 7단계까지 구분되어 있다. 이 중 레벨1에서 3까지는 사건(incident)으로 , 레벨4부터 7까지는 사고(accident)로 분류된다. 레벨1에서 3까지는 아노미, 사건, 중대한 사건이 포함되어 있으며 레벨4에서 7까지는 시설 내부의 위험을 수반한 사고, 시설 외부의 위험을 수반한 사고, 대형사고, 심각한 사고가 포함되어 있다(http://www-ns.iaea.org/tech-areas/emergency/ines.asp, IAEA 홈페이지, 2014.11.11).  11)구조재(構造災)란, 과학, 기술, 사회 사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재해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지진과 쓰나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과학의 실패만으로 귀결될 수 없다는 것을 밝혀내는 주요개념이다. 이 개념을 고안한 마츠모토(松本)는 그의 책에서 과학과 기술, 사회를 잇는 여러 개의 채널에 대한 제도설계의 형태와 그곳에 등장하는 여러 개의 이질적인 주체가 다양하게 엮어내는 방식에 문제가 일어날 경우 구조재가 발생한다고 지적하며,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기술적 문제를 넘어선 조직 구조와 매뉴얼의 작동방식에 연결되어 있는 문제임을 밝혔다(松本, 2012: 3-5).  12)일본재건이니시어티브의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민간조사조(民間事故調)로, 2011년 9월 발족된 이후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에 대한 원인과 피해상황, 사고의 직접적 원인, 사고 배경, 구조적 문제점 등에 대해 민간의 독립된 입장에서 조사를 실시하여 2012년 조사검증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일본재건이니시어티브 홈페이지, http://rebuildjpn.org/project/fukushima/ 2014.11.13)  13)미디어에 관한 전국여론조사 데이터, http://www.chosakai.gr.jp/notification/pdf/report5.pdf  14)일례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자력 에너지와 관련된 시민활동의 상황을 전국단위에서 조사한 후쿠시마 원전사고후의 시민사회 활동에 대한 단체조사(福島原發事故後の市民社會の活動に關する團體調査, 2013년 실시)에 따르면 원전사고 이후 결성된 시민단체 중 73.3%는 원전사고와 재해에 대한 대책이 불충분하다는 인식에서, 43.8%는 원전사고 이후 일본정부의 대응이나 도쿄전력의 사고 처리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시민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응답하고 있다.  15)小熊英二(2013). 原發を止める人々. 東京: 文藝春秋.  16)2011년 6월에 열린 대표적인 탈 원전 운동의 참가자를 연령별로 분석한 平林祐子(2012a)에 따르면, 신주쿠에서 열린 데모 참가자 중 20대 이하가 23%, 30대가 29%, 40대가 15%, 50대가 15%, 60대 이상이 18% 포함되어 20-30대가 전체 참가자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일본형 공업사회의 고용형태의 특징으로는 대학졸업자의 정기적 일괄적 채용방식, 종신고용제도, 연공서열형 임금체계, 기업별(기업내) 노동조합결성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5. 나가는 말

    본 논문은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지속된 장기 경제 불황이 일본사회의 공공성 기반에 미친 영향을 국가주도의 공공사업의 문제점을 통해 분석하고 일본사회의 공공성 역량 저하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정책 방향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본 논문을 통해 발견한 점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버블 경제 붕괴 이후 도시와 지방 간 격차가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기 자극책으로 시행한 공공사업은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에 의존하는 지방 경제 시스템을 낳았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공공사업은 국가가 공공성을 담보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해 온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와 지방간 격차완화와 같은 공익성과 공정성 회복의 방안이 공공사업이라는 국가 주도의 사업에 한정되고 사업의 내용이 도로 건설과 같은 교통 인프라 건설에 집중되면서 공공사업은 지역경제 활성화나 지역 역량 강화와 같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더욱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피해지역인 후쿠시마의 경우 원자로 건설을 통한 수입이 원자로 건설시기에 집중되고 교부금의 용도가 공공시설 건설과 같은 인프라 확충 분야에 한정되어 지역 산업에 투자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원자로 건설로 창출되는 고용효과가 단기적이었던 것이 원자로 추가 건설을 수용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국가 주도의 공공사업을 통한 공공성 확보는 버블 경제 붕괴 이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일본 사회의 공공성 역량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해 볼 수 있다.

    둘째, 일본사회가 겪고 있던 공공성의 위기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의 공개성 문제뿐만 아니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경제정책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는 1990년대부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장기적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일본형 공업화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남성, 정사원고용, 종신 고용이라는 고용형태가 유동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과정 가운데 기업을 중심으로 보장되던 사원복지와 연금제도 등 일본형 사회안전망 제도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이와 같은 공정성의 위기 속에서 일어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사고의 심각성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지 않거나 방사능 오염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여 그에 대한 반발로 안전문제에 대한 시민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안전문제가 경제회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안전·경제 대립론이 정치적 이슈로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는 원전 재가동의 의지가 강한 자민당이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고, 아베내각이 경제 성장을 위해 원전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에너지 기본계획을 각의에서 결정한 것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안전문제에 대한 우려가 강함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원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와 같은 의식은 일본의 장기적 경기침체와 그로 인한 일본사회의 공공성 역량의 저하가 미친 영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정 단체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열려 있는 것, 전반의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공공성의 본래 개념에 비추어 생각해볼 때 일본이 겪어온 공공성 위기는 공공성을 담보하는 주체를 국가에 한정한 것과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 건설에만 사업 분야를 제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국가가 담보하는 공공성 안에 원자력 마을과 같은 비밀주의 조직과 전원3법 교부금과 같은 공정성과 공익성이 훼손된 장치가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의 위험성과 방사능 오염의 공포를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면서도 일본은 결국 원전 재가동이 경제 회복과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 된다는 안전·경제 대립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이 모두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공공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원전 재가동이외의 경제 성장을 위한 선택지나 원전 재가동과 핵연료 폐기물 처리에 드는 비용, 그리고 아베노믹스를 통해 과연 누가 경제 성장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합의된 것이라 볼 수 없으며, ‘공공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일본의 안전·경제 대립론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모순이 한국사회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1. 구 혜란 (2015) 공공성은 위험수준을 낮추는가. [한국사회정책] Vol.22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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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1]] 일본 공공사업 관련예산 추이
    일본 공공사업 관련예산 추이
  • [[표 1]] 공공사업을 통한 행정투자 추이
    공공사업을 통한 행정투자 추이
  • [[그림 2]] 자발적 결사 가입률 추이
    자발적 결사 가입률 추이
  • [[그림 3]] 일반적 타자에 대한 신뢰의식의 변화
    일반적 타자에 대한 신뢰의식의 변화
  • [[그림 4]] 원자력 발전소 입지 교부금의 종류와 시기별 교부금 추이
    원자력 발전소 입지 교부금의 종류와 시기별 교부금 추이
  • [[표 2]] 중의원 투표 시 고려사항의 변화(투표자 대상, 복수응답)
    중의원 투표 시 고려사항의 변화(투표자 대상, 복수응답)
  • [[그림 5]] 정규고용자와 비정규 고용자 추이
    정규고용자와 비정규 고용자 추이